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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일기

대가야의 역사를 보여주는 고령 지산동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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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야국이란 나라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을까?

 

대강 알고있는 얕은 지식은 백제와 신라 사이에 낑긴 나라이고 그리 부각이 되지 않는 역사를 가지고 있고 연표와 연대가 불확실하고 뜬금없이 일본이 지네들 역사라고 가끔씩 우기는 나라... 역사시간에도 기억에 남을 정도로 공부한 것 같지가 않는 그런 정도였습니다.

조금 더 생각해 보니.. 김해에는 금관가야가 있고 고령 대가야가 있다는 정도..

 

그런 가야가 갑자기 제 머리속의 화두로 떠 오른 것은 어느책에서 읽은 임나일본부에 관한 내용입니다.

임나(任那)라는 것이 가야를 의미하고 일본 넘들이 이곳을 점령하여 일본부를 설치하였다는 내용인데 이건 가지고 이넘들이 우리나라를 35년간이나 식만통치한 걸 합리화시키는 방편으로 삼았는데 이게 참으로 안타까운게 이걸 극적으로 반박할 자료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암튼 가야라는 나라의 역사는 우리의 옛 자료들 보다는 일본의 역서인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도움을 많이 받는것 같습니다.



역사적인 논리로 가야를 파고들면 제 얕은 지식이 한계에 다달아 어렴풋이 알고 있는 가야에 대한 지식도 엉터리가 될 것 같이 이쯤 마무하고..


지난번 왕산 산행을 하면서(http://duga.tistory.com/2440) 산 초입에 있는 구형왕릉을 보고 이런저런 궁금한 것이 많이 생겼더랬습니다.

김해의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 구형왕릉이 왜 이곳 산청에 묻혀 있을까? 

자기 땅은 김해인데?


구형왕은 김해를 중심으로 한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이고 신라와의 싸움에 져서 신라에 흠수되었습니다.

물론 그 뒤 신라에서는 흡수한 가야의 왕실을 따스하게 보살폈는데 이에 구형왕의 아들 김무력이 여러 전선에서 맹 활약을 하였으며 김무력의 손자 김유신(구형왕의 증손자)이 신라의 명장이 되고 그의 여동생이 김춘추와 결혼하여 문무왕을 낳았으니 어찌보면 구형왕은 신라에 그 씨를 뿌린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구형왕이 신라에 망하고 난 뒤의 행적이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으니 이곳 산청에 있는 구형왕릉이 전(傳)구형왕릉이라고 하여 역사의 기록을 세세히 되살펴 봐야 할 것입니다.

암튼 역사에는 가야가 6개의 나라(지금은 7개의 나라로 제 정립되고 있음)로 나눠져 통치되고 있었고 전체 세력은 경상도 뿐만 아니고 지금의 충청도와 전라도를 아울러 넓게 퍼져 있었다고 하니 대단히 큰 세력 집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야에서 가장 큰 맹주가 지금의 고령에 거점을 둔 대가야인데 김해에 거점을 둔 금관가야와 함께 가장 큰 세력을 가진 나라였던 것 같습니다. 고령 대가야는 서기 562년에 멸망하였다고 하는데 그 전 520년 정도 존속한 나라였다고 하니 조선의 500년 역사가 찬란하게 조명 되는데 비해 사료가 거의 전무하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대구에서 가까운 고령은 대갸야의 도읍지로서 한때 500년 역사의 중심이었는데 고령읍이란 명칭을 대갸야읍으로 바꾼 곳입니다.

이곳 대가야읍 주산자락 지산동에 가면 정말 놀라울 정도로 커다란 고분들이 많은데 전체 총 704기가 확인이 되었다고 하니 그 숫자가 엄청납니다.


저도 이곳에 올라가서야 고분이 정말 많다는 걸 보았는데 이런 엄청난 고분이 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다는게 놀랍고 신기했습니다.

대개의 고분들은 이미 도굴에 의하여 거의 훼손이 되었는데도 그 뒤 새롭게 발굴조사를 하면서 엄청난 문화재가 발견되었습니다. 이때 발굴 된 것들은 고분군 아래 있는 박물관에 온전히 전시되고 있습니다.


이번 정부에서 가야사에 대한 복원을 추진하고 있는데 온전한 가야의 역사가 되살아나길 기대하여 봅니다.




가야사 복원은 사실에 기초해야 된다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일본의 역사책인 일본서기나 우리나라의 고대 삼국유사 같은 것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대가야의 진실을 찾는 노력이 있었으면 합니다.



고령에 있는 대가야 박물관입니다.

입장료가 2000원이 있는데 그냥 대충 둘러 볼 것 같으면 들어갈 필요 없고 조금 찬찬히 시간을 내여 둘러 볼 곳입니다.



박물관 내부

재법 넓습니다.

전시물도 많구요.


위에 보이는 석탑은 몇 층 석탑일까요?


절에 가면 이런 옛 석탑들이 많은데 석탑의 층수는 어떻게 결정 할까요?

가장 흔한 힌트는 처마가 위로 올라간 것만 층수로 세면 되는데 위의 탑은 12층 석탑입니다.

아래는 기단이고 상부는 장식부분입니다.

대개 탑의 홀수로 되어 있는데 위 사진은 아마도 소실된것이 있을것으로 추정됩니다. 







대개 이런 박물관에 가면 입구에 사진 촬영금지라고 되어 있는데 이곳 고령대가야박물관도 어김없이 그런 표시가 있어 담당자를 불러 따졌습니다.


아주 전근대적인 사고방식.

외국에서는 유명 박물관에도 이미 사진촬영을 거의 허락하고 있는데 이런 구태가...

조목조목 설명을 하고 나서 박물관을 다 둘러보고 나오면서 보니..

그 입간판이 치워지고 없더군요.




고분에서 나온 진짜배기 금입니다.

18K인지 24K인지는 모르지만 ...

1500년 역사 전에 만들어진 금 귀걸이입니다.

옛날에는 귀에 구멍을 뚫지않고 귀 둘레로 걸어서 사용했다 합니다.



정말 정교하고 아름답습니다.

그 시절 어떤 기술로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진짜입니다.

무려 1500년 전.. 

어느 공주가..

어느 왕비가..

어느 후궁이..

하고 있었던 그 패물입니다.



박물관에는 거의 진품 유물이 전시되고 있는데 간혹 이렇게 복원품이나 모조품이 전시된 것도 있습니다.

어떻게 구분하냐구요?

적어 놨습니다.

조그맣게..



박물관 구경을 마치고 바로 뒤에 있는 고분군으로 올라 가 봤습니다.

요새말로 깜놀입니다.

업창나게 많습니다.

확인된 고분이 700개가 넘는다고 하니 정말 놀랍습니다.










유물발굴과 함께 통신선매립공사를 하고 있어 뷰가 조금 어중간했습니다.









가장 유명한 44호 고분입니다.

많은 유물이 나온 곳이구요,

순장이란 말을 많이 들어 봤지만 그 구체적인 뜻을 몰랐는데 이번에 확실히 알았습니다.

왕이 죽으면 그를 따라 많은 사람들이 같이 묻혔는데 이를 순장이라 합니다.

이곳 무덤에서는 몇십명의 순장자가 나왔는데 그들은 대략 왕의 저승길에서 뒷바라지를 해 줄 사람들..

시중이나 음식, 이발, 의료,침구..등등..

이들 담당자들이 같이 묻혔는데 이들은 산채로 묻힌것이 아니고 살아있는 이들을 살해하여 같이 묻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아냐구요?

순장된 사람들 대개가 두개골 뒷부분 함몰된 상처들이 있다고 하네요.




지산동 고분에서 내려다 본 고령.. 대가야읍입니다.






대가야읍에서 올려 다 본 고분군..


이곳 고령에는 놀다가 배가 고프면 갈치정식집을 찾으면 됩니다.

알려진 집이 두어곳 있는데 검색하면 금방..

푸짐한 수입갈치(?)조림과 갈치찌개 그리고 인심좋게 한가득 공기밥이 제법 먹을만 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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