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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그림

섬진강 - 김용택 ( 김용택의 시 섬진강 1 ~ 12편 모두 감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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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1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뜰에
어둠을 끌어다 죽이며
그을린 이마 훤하게
꽃등도 달아준다
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껄껄 웃으며
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노을 띈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
고갯짓을 바라보며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자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섬진강 2

저렇게도 불빛들은 살아나는구나.
생솔 연기 눈물 글썽이며
검은 치마폭 같은 산자락에
몇 가옥 집들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불빛은 살아나며
산은 눈뜨는구나.
어둘수록 눈 비벼 부릅뜬 눈빛만 남아
섬진강물 위에 불송이로 뜨는구나.
밤마다 산은 어둠을 베어내리고
누이는 매운 눈 비벼 불빛 살려내며
치마폭에 쌓이는 눈물은
강물에 가져다 버린다.
누이야 시린 물소리는 더욱 시리게
아침이 올 때까지
너의 허리에 두껍게 감기는구나.
이른 아침 어느새
너는 물동이로 얼음을 깨고
물을 퍼오는구나.
아무도 모르게
하나 남은 불송이를
물동이에 띄우고
하얀 서릿발을 밟으며
너는 강물을 길어오는구나.
참으로 그날이 와
우리 다 모여 굴뚝마다 연기나고
첫날밤 불을 끌 때까지는,
스스로 허리띠를 풀 때까지는
너의 싸움은, 너의 정절은
임을 향해 굳구나.

 



섬진강 3

그대 정들었으리.
지는 해 바라보며
반짝이는 잔물결이 한없이 밀려와
그대 앞에 또 강 건너 물가에
깊이 깊이 잦아지니
그대, 그대 모르게
물 깊은 곳에 정들었으리.
풀꽃이 피고 어느새 또 지고
풀씨도 지고
그 위에 서리 하얗게 내린
풀잎에 마음 기대며
그대 언제나 여기까지 와 섰으니
그만큼 와서 해는 지고
물 앞에 목말라 물 그리며
서러웠고 기뻤고 행복했고
사랑에 두 어깨 깊이 울먹였으니
그대 이제 물 깊이 그리움 심었으리.
기다리는 이 없어도 물가에서
돌아오는 저녁길
그대 이 길 돌멩이, 풀잎 하나에도
눈익어 정들었으니
이 땅에 정들었으리.
더 키워나가야 할
사랑 그리며
하나둘 불빛 살아나는 동네
멀리서 그윽이 바라보는
그대 야윈 등,
어느덧
아름다운 사랑 짊어졌으리.
 

 


섬진강 4
누님의 초상

누님, 누님들 중에서 유난히 얼굴이 희고 자태가 곱던 누님.
앞산에 달이 떠 오르면 말수가 적어 근심 낀 것 같던 얼굴로
달그늘진 강 건너 산속의 창호지 불빛을 마룻기둥에 기대어 서서
하염없이 바라보고 서 있던 누님. 이따금 수그린 얼굴 가만히 들어
달을 바라보면 달빛이 얼굴 가득 담겨지고, 누님의 눈에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그 그렁그렁한 눈빛을 바라보며 나는 누님이 울고 있다고
생각했었지요. 왠지 나는 늘 그랬어요. 나는 누님의 어둔 등에 기대고 싶은
슬픔으로 이만치 떨어져 언제나 서 있곤 했지요. 그런 나를 어쩌다 누님이,
누님의 가슴에 꼭 껴안아주면 나는 누님의 그 끝없이 포근한 가슴 깊은 곳이
얼마나 아늑했는지 모릅니다. 나를 안은 누님은 먼 달빛을 바라보며
내 등을 또닥거려 잠재워주곤 했지요. 선명한 가르맛길을 내려와
넓은 이마의 다소곳한 그늘, 그 그늘을 잡을 듯 잡을 듯 나는 잠들곤 했지요.
징검다리에서 자욱하게 죽고 사는 달빛, 이따금 누님은 그 징검다리께로
눈을 주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했지요. 강 건너 그늘진 산속에서
산자락을 들추면 걸어나와 달빛속에 징검다리를 하나둘 건너올 누군가를
누님은 기다리듯 바라보곤 했지요.
그러나 누님, 누님이 그 잔잔한 이마로 기다리던 것은 그 누구도 아니라는 것을,
누님 스스로 징검다리를 건너 산자락을 들추고 산그늘 속으로 사라진 후
영영 돌아오지 않을 세월이 흐른 후, 나도 누님처럼 마룻기둥에 기대어
얼굴에 달빛을 가득 받으며 불빛이 하나둘 살아나고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누님이 그렇게나 기다리던 것은 그 누구도 아니며 그냥 흘러가는 세월과
흘러오는 세월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나도 얼마나 많은 아름다운 것들과
헤어져 캄캄한 어둠속을 헤매이며 아픔과 괴로움을 겪었고 그 보다 더 아름다운 것들과
만나고 또 무엇인가를 기다렸는지요.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아픔과 슬픔인지요 누님.
누님, 누님의 세월, 그 세월을, 아름답고 슬픈 세월을 지금 나도 보는 듯합니다.
누님, 오늘도 그렇게 달이 느지막이 떠오릅니다. 달그늘진 어둔 산자락 끝이
누님의 치마폭같이 기다림의 세월인 양 펄럭이는 듯합니다. 강변의 하얀 갈대들이
누님의 손짓인 양 그래그래 하며 무엇인가를 부르고 보내는 듯합니다.
하나둘 불빛이 살아났다 사라지면서 달이 이만큼 와 앞산 얼굴이 조금씩 들춰집니다.
아, 앞산, 앞산이 훤하게 이마 가까이 다가옵니다. 누님, 오늘밤 처음으로 불빛 하나
다정하게 강을 건너와 내 시린 가슴속에 자리잡아 따사롭게 타오릅니다.
비로소 나는 누님의 따뜻한 세월이 되고, 누님이 가르쳐준 그 그리움과 기다림과
아름다운 바라봄이 사랑의 완성을 향함이었고 그 사랑은 세월의 따뜻한 깊이를
눈치챘을 때 비로소 완성되어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누님, 오늘밤 불빛 하나
오래오래 내 가슴에 남아 타는 뜻을 알겠습니다. 누님, 누님은 차가운 강 건너온
사랑입니다. 많은 것들과 헤어지고 더 많은 것들과 만나기 위하여, 오늘밤 나는
사랑 하나를 완성하기 위하여 그 불빛을 따뜻이 품고 자리합니다.
누님이 만나고 헤어진 사랑을 사랑하며 기다렸듯 그런 세월, 그 정겨운 세월......
누님의 초상을 닦아 달빛을 받아 강 건너 한자락 어둔 산속을 비춰봅니다
 

 


섬진강 5


이 세상
우리 사는 일이
저물 일 하나 없이
팍팍할 때
저무는 강변으로 가
이 세상을 실어오고 실어가는
저무는 강물을 바라보며
팍팍한 마음 한끝을
저무는 강물에 적셔
풀어 보낼 일이다.
버릴 것 다 버리고
버릴 것 하나 없는
가난한 눈빛 하나로
어둑거리는 강물에
가물가물 살아나
밤 깊어질수록
그리움만 남아 빛나는
별들같이 눈떠 있고,
짜내도 짜내도
기름기 하나 없는
짧은 심지 하나
강 깊은 데 박고
날릴 불티 하나 없이
새벽같이 버티는
마을 등불 몇 등같이
이 세상을 실어오고 실어가는
새벽 강물에
눈곱을 닦으며,
우리 이렇게
그리운 눈동자로 살아
이 땅에 빚진
착한 목숨 하나로
우리 서 있을 일이다.
 

 


섬진강 6
억새풀

물들은 스스로 흘러 모여
제 깊이를 만들어 힘을 키우고
얼음으로 강물을 감추어
농부들을 편히 건네주며
참을 길 없는 뜨거운 속마음만 흘려
강 스스로 강이게 하였다가
녹을 철엔 차례로 녹아 넘치며
물길을 열어
섬진강 좁은 물목들을 지나며
힘껏 부서지고 마음껏 외쳐
부시시 잠깨는 지리산 이마를 때려
퍼뜩 진달래를 피워놓고
막을 길 없는 물살로
시퍼렇게 굽이쳐 흐르는구나.
부서진 것들은 금빛 모래로
구례 강변에 쌓아 빛나게 하고
거친 숨결 달래가며
물 깊이 다시 굳세게 만나
하동 포구 억센 억새들을 흔들어
억세게 키우는구나.
아름다운 하늘 아래
그 푸른 물결로 출렁이며
땅 무시하는 밥 아까운 헛소리 헛짓들을 불러
개펄 진흙으로 쌓아 뼈로 딛고 서서,
우리나라 알 만한 그리움들은 다 불러
제 살로 보내 억센 몸을 쑥쑥 키워내며
두고 보라고,
두고 보면 알 것 아니냐고
알 만한 주먹들은 진즉 알 것 다 알고 있다고
학도 봉도 아닌 것들이
비싼 밥 싸게 먹고 앉아
배부른 소리들 작작하며
까불지들 말라고,
불끈불끈 핏줄들을 키워 불거지며
여기저기 손 휘두르며
이거 보라고, 이 주먹들을 보라고
불쑥불쑥 주먹들이 솟는구나.
 

 


섬진강 7

울래 울래 나도 울래
날 저물고 저녁 오면
이 산 저 산 소쩍새야
여기저기 발동기야
가문 논에 물 품으며
천수답에 물 품으며
물 품은 논 개구리야
이 논 저 논 새벽까지
나도 울고 너도 울고
울음 모아 함께 울래
쌀금 똥금 부엉부엉
날 가문다 부엉부엉
양식 없다 부엉부엉
사람 없다 부엉부엉
농부새야 부엉부엉
풀잎 뒤에 풀벌레야
나뭇잎에 개구리야
발동기는 물을 품고
지게 밑에 쓰러져서
이슬 속에 선잠 자고
섬진강물 깊은 데로
몸 담그고 나도 울래
너도 울고 나도 울고
울음 모아 함께 울래
닭이 울고 새벽 오고
섬진강물 품어대며
소쩍소쩍 소쩍새야
목이 타다 소쩍새야
앞산 옆산 옆산 뒷산
뺑뺑 돌아 소쩍새야
개골개골 개구리야
이 논 저 논 메마른 논
물꼬 둑에 개구리야
통통통통 발동기야
안 돌아가면 애통기야
잘 돌아가면 발동기야
저기 저 물 품어올려
모도 심고 설움 심어
어헤라야 어헤라야
어화 둥둥 섬진강아
어라 둥둥 가문 강아
오고 흘러 섬진강아
천리만리 섬진강아

 

 


섬진강 8

달이 불끈 떠오른다.
첩첩산중 달 떠오면
그대는 장산리 마을회관 술집을 나선다.
시린 물소리로 강물을 건너
갈대들이 곱은 손 들어 가리키는
어둔 산굽이 강길을 다라
끄덕끄덕 걷는다.
내 친구,
서울에서 돈 못 벌고
중동을 다녀와도 어쩐지 우리는 못 산다며
첩첩산중으로 못난 여자 데리고
검은 염소 몇 마리 끌고 돌아왔지.
그대는 누구인가
내 친구,
소주 몇 잔 거나하게 걸치고
강길을 홀로 걷는 그대는 내 친구.
겨울 시린 달빛 강물에 떨어져 어는데
어둔 산 밑 달그늘 속
담뱃불 빤닥이며
그대 여자 홀로 기다리는 깊은 산속으로
라면 몇 봉지 지게에 달고
서리 끼는 풀들을 밟고 헤치며
달빛 돌아오는
산굽이를 흥얼흥얼 돌아간다.
인생 쓴맛 단맛 다 본 내 친구,
스레이트 지붕
빳데리 불빛 깜박이는 산속으로 가는
그대는 누구인가
내 친구.
 

 


섬진강 9

강 건너 산밭에 하루 내내 스무 번도 더 거름을 져나르셨단다.
어머님은 발바닥이 뜨겁다며 강물에 발을 담그시며 자꾸 발바닥이 뜨겁단다.
세상이야 이래도 몸만 성하면 농사짓고 사는 것 이상 재미있고 속 편한게
어디 있겠냐며 자꾸 갈라진 발바닥을 쓰다듬으시며 자꾸 발바닥이 뜨겁단다.
어머니, 우리들의 땅이신 어머니. 오늘도 강을 건너 비탈진 산길 거름을
져다 부리고 빈 지게로 집에 오기가 아까워 묵은 고춧대 한짐 짊어지시고
해 저문 강길을 홀로 어둑어둑 돌아오시는 어머니, 마른 풀잎보다
더 가볍게 흔들리시며 징검다리에서 봄바람 타시는 어머니.
아, 불보다 더 뜨겁게, 불붙을 살도 피도 땀도 없이 식지 않는 발바닥으로
뜨겁게 뜨겁게 바람 타시는 어머니. 어느 물, 이 나라 어느 강물인들
어머님의 타는 발다닥을 식히겠습니까 어머니,
우리들의 땅이신 어머님.
 

 


섬진강 10
하동 포구

전라도나 경상도
여기저기 이곳저곳
산굽이 돌고 논밭두렁 돌아
헤어지고 만나며 아하,
그 그리운 얼굴들이
그리움에 목말라
애타는 손짓으로 불러
저렇게 다 만나고 모여들어
굽이쳐 흘러
이렇게 시퍼런 그리움으로
어라 둥둥 만나
얼싸절싸 어우러지며
가슴 벅찬 출렁임으로 차오르나니
어화 어화 숨차
어화 숨막히는 저 물결
어화 어기여차
저 시퍼런 하동 포구
 

 

 

섬진강 11
다시 설레는 봄날에

당신, 당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곱게 지켜
곱게 바치는 땅의 순결,
그 설레이는 가슴
보드라운 떨림으로
쓰러지며 껴안을,
내 몸 처음 열어
골고루 적셔 채워줄 당신.
혁명의 아침같이,
산굽이 돌아오며
아침 여는 저기 저 물굽이같이
부드러운 힘으로 굽이치며
잠든 세상 깨우는
먼동 트는 새벽빛
그 서늘한 물빛 고운 물살로
유유히.
당신, 당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섬진강 12
아버님의 마을

세상은 별것이 아니구나.
우리가 이 땅에 나서 이 땅에 사는 것은
누구누구 때문이 아니구나.
새벽잠에 깨어
논바닥 길바닥에 깔린
서리 낀 지푸라기들을 밟으며
아버님의 마을까지 가는 동안
마을마다
몇 등씩 불빛이 살아 있고
새벽닭이 우는구나.
우리가 여기 나서 여기 사는 것
무엇무엇 때문도 아니구나.
시절이 바뀔 때마다
큰 소리 떵떵 치던
면장도 지서장도 중대장도 교장도 조합장도 평통위원도
별것이 아니구나.
워싱턴도 모스끄바도 동경도 서울도 또 어디도
시도 철학도 길가에 개똥이구나.
아버님의 마을에 닿고
아버님은 새벽에 일어나
수수빗자루를 만들고
어머님은 헌 옷가지들을 깁더라.
두런두런 오손도손 깁더라.
아버님의 흙빛 얼굴로,
어머님의 소나무 껍질 같은 손으로
빛나는 새벽을 다듬더라.
그이들의 눈빛, 손길로 아침이 오고
우리들은 살아갈 뿐,
우리가 이 땅에 나서 이 땅에 사는 것
누구누구 무엇무엇 때문이 아니구나.
비질 한번으로 쓸려나갈
온갖 가지가지 구호와
토착화되지 않을
이 땅의 민주주의도,
우리들의 어설픈 사랑도 증오도
한낱 검불이구나.
빗자루를 만들고 남은 검불이구나 하며
나는 헐은 토방에 서서
아버님 어머님 속으로 부를 뿐
말문이 열리지 않는구나.
목이 메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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