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글과 그림

중국의 국보1호 별칭이 붙은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

반응형

 

중국이 국보 1호로 칭하는 이것은?

어느날 두가가 세로에 비해 가로의 길이가 무척이나 긴 동양화 그림을 한 점 만났다. 그림을 이곳에 올려 한눈에는 도저히 보여 드릴 수 없는 가로 길이가 엄청나게 긴 그림이었다.
그리고 그 그림의 소재를 파악 하던 중 그것이 바로 중국의 국보인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란걸 알았고, 중국에는 우리와 달리 국보에 순위가 없는데도 이 청명상하도를 중국의 국보 1호라고 칭하는 곳이 많았다. 이는 그만큼 이 그림이 대단하다는 뜻이리라...


일단 그림을 먼저 한번 훑어 보시고 다시 설명을 잇고자 한다.(아래 그림보기를 클릭. 마우스를 그림의 좌측에 두면 그림이 좌로 이동, 중간부근에 가까울수록 천천히 이동함. 이 그림에 대한 설명은 아래에 별도 있슴)
그림보기


흔히 동양화를 논할때 양대산맥이 있는데 당나라 왕유가 원조인 남종화(南宗畵)에서는  원나라 황공망(黃公望)이 그린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를 최고로 치고,  풍속화의 경우에는 위에 이야기 한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를 으뜸으로 친다고 한다.


청명상하도는 지금부터 천년 전, 중국 북송(北宋, 960-1126)시대 때 풍속화가 장택단(張擇端)의 대표작이다. 이 그림의 풍경은 청명절(4월 5일경) 전후 그 당시 북송의 수도인 변경(汴京, 지금의 河南星 開封)을 흐르는 강가 주변의 시끌벅적한 풍경을 아주 상세하게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에는 각양 각색의 인물이 700여명 등장하고, 100여채의 집, 34개의 점포, 48개의 마차, 배, 가마 등과, 84 마리의 가축, 기타 동물은 60여 마리, 190그루의 나무, 교량은 20여개고, 선박도 20여척,100여자(字)의 낙관(落款)글자와 6개의 도장 등으로 가득 차 있는 중국 고대의 최대 규모의 풍속 그림이다.
특히, 각 인물 및 건물 내의 세심한 부분까지 정교하게 표현돼 있는데, 이 많은 사람과 동물 중 같은 표정의 그림은 없다고 한다.

원작의 크기는 세로(폭) 25.5cm 가로(길이) 525.7cm로 얇은 비단에 그려서 현재 베이징(北京)의 고궁박물관에서 가장 엄격하게 관리 보관되어 지고 있다.


이 그림은 그 사연도 많아 최초에 장택단이 그려 송나라 왕 송휘종에게 올리고, 송휘종은  이 그림을 너무 좋아해서 친필로 그림에 청명상하도라고 쓰고 쌍용(雙龍)도장을 찍었다. 송휘종은 멋지게 그려진 그림에 무척 기뻐하며, 이때부터 청명상하도는 송휘종 조길에 의하여 황궁내부에 수장된다.

북송이 멸망한 후 송휘종 조길과 아들 송흠종 조환은 금나라에 포로가 되어 북방으로 끌려갈 때, 북송 궁중에 보관돼 있던 청명상하도와 6000여건의 예술품도 金에 노략된다. 송휘종 조길의 11째 아들인 宋高宗 趙構는 항주에서 황제에 오른다.


장택단은 송고종 조구에게 국가의 원한을 잊지 않도록 하고 금나라에 항거하게 하기 위하여, 문을 걸어 닫고 다시 한 번 청명상하도를 그려 송고종 조구에게 바친다. 그러나 송고종 조구는 부친인 송휘종 조길과 달랐다. 그는 그림에 흥미가 근본적으로 없었으므로, 그림을 돌려보낸다. 장택단은 그림을 길게 펼치고,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그는 홧김에 그가 그린 청명상하도를 불살라버린다. 다행히 집안 사람들이 그 중의 절반을 구해낸다.


이후 명나라에 들어서 청명상하도는 陸完의 수중에 들어간다. 육완이 죽은 후에는 그의 부인이 그림을 베개에 넣고 꿰매어 버리고, 자신의 목숨처럼 아꼈으며 친아들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陸부인의  조카 중에 王씨 성의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그림을 잘 그렸고 유명한 인물들의 서화를 좋아했다.


육부인이 집안에 청명상하도를 수장하고 있는 것을 알고는 여러 번 부탁해서, 육부인이 결국은 보여주게 된다. 다만, 다른 사람에게 절대 말을 못하게 하였다. 왕은 10 여번 본 후에 그림을 모방하여 한 폭 그리게 된다. 명나라 때의 간신으로 유명한 嚴嵩은 이때 사방으로 청명상하도를 손에 넣기 위해 찾았는데, 마침 왕도어사라는 사람이 800냥을 들여 왕모로부터 모방한 청명상하도를 입수하고, 엄숭에게 바친다.


엄숭이 그림을 표구하도록 맡기자, 표구하는 사람은 모방품이라는 것을 눈치 채고 왕도어사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는 대가로 돈을 요구하다 거절당한다. 표구상은 일부러 가짜임을 드러내도록 표구하여, 엄숭이 손님들 앞에서 그림을 보여주다 망신을 당한다. 이후 엄숭은 왕도어사를 모함하여 죽여 버린다. 왕모도 연루되어 감옥에서 굶어죽는다.

이 이야기는 널리 퍼져, 이후 일봉설전기라는 극본으로 정리된다. 그러나 사실은 육완이 죽은 후, 육완의 아들이 돈이 필요해 그림을 팔아버리는데, 곤산의 顧鼎臣이 이를 매입한다. 이후 엄숭과 그 아들 嚴世蕃에게 빼앗긴다. 엄숭 부자가 탄핵을 받아 가산이 몰수되면서 청명상하도는 명황실로 들어간다.

淸1644-1911)나라에서도 청명상하도는 몇 번의 곡절을 겪는다. 우선 수장하게 되는 사람은 陸費犀이다. 그는 안휘 상향 사람이며, 乾隆帝때 진사를 지낸 사람이며, 청명상하도에 발을 쓰고 도장을 찍어둔다. 오래지 않아 그림은 畢沅의 손에 들어간다. 필원은 강소 태창 사람으로 역시 건륭제 때의 進士이다. 필원은 금석과 서화를 좋아하여 많은 서화를 소장한다.


그는 청명상하도를 매입한 후, 동생인 畢龍과 함께 낙관을 찍어둔다. 필원이 사망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청의 황실은 필원이 호광총독을 지낼 때 직무유기와 군비남용을 하였음을 들어 가산을 몰수한다. 이 때, 그림은 淸 황실로 들어간다. 청황실에서는 청명상하도를 자금성의 영춘각에 걸어두며 이후 1860년의 영국 프랑스 연합군의 침입과 1900년의 팔국연합군의 칩입 때도 빼앗기지 않고 살아 남는다.


1911년 선통제 부의의 퇴위 이후, 그림은 부의가 동생 부걸에게 상으로 내리고, 그림은 천진조계의 장원(張園)에 걸어둔다. 1932년 만주국을 세우면서 그림은 다시 장춘으로 가져가 동원 도서루에 걸어둔다. 1945년 8월 부의가 장춘에서 도망치면서 만주국황실의 많은 서화와 보물들이 민간에 흩어지게 된다.

1946년 중국인민해방군이 장춘을 점령한 후, 해방군 간부인 장커웨이(張克威)는 지방간부들을 통하여 만주국황실에서 흘러나온 유물 수십 점을 수집하는데, 거기에 청명상하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1947년에  장커웨이가 동북행정위원회로 전근 가면서 청명상하도를 비롯한 서화들을 당시 동북지방의 주요한 지도자 중의 한 명인 린펑(林楓)에게 넘겨준다. 린펑은 청명상하도를 동북박물관에 넣었으나 그림은 다시 북경의 고궁박물관으로 보내진다.

오랜동안의 방랑을 거쳐 청명상하도는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그림은 크게 초,중,후반 등으로 나눠 살펴볼 수 있는데 초반부는 개봉시 교외의 풍경이고 중간부는 무지개다리(虹橋)라고 불리우는 다리를 중심으로 백성들의 삶의 현장들이 보여지고 있으며 후반부에서는 점포들이 늘어서 있는 성(城)의 다운타운을 나타냈다.


아래 그림은 현재 북경의 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원본을 6조각으로 나눈 것이다.













이제 궁금증이 하나 생긴다. 그럼 위에서 컴퓨터 화면으로 본 청명상하도(그림 한번 더 보기)는 무엇인가? 그렇다.. 컴퓨터 화면으로 만난 청명상하도는 장택단이 최초에 그린, 지금 북경의 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청명상하도의 원본 그림에 컴퓨터로 채색을 하여 1000년 전의 그림 그대로 최초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그림 그것으로 만든 것이다.
그렇게 1000년을 거슬러 올라가서 만난 청명상하도를 폭의 방향으로 16조각을 내어 보았다.

중국의 8대 고도의 한곳인 하남성 개봉에는 청명상하도를 본떠 만든 청명상하원이라는 테마공원이 있는데 멋지고 아름답게 만들었지만
아무래도 상업적인 냄새가 나는건 어쩔수 없다.



반응형


Calendar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Recent Comments
Visits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