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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그림

일곱살때 할머니에게서 드른 흰 암여우 이얘기 - 서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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횅하게 휘영청 밝은 달밤엔
꼬리 아홉개 달린 흰 암여우가
우리집 뒷골 세갈림길에서
재주를 휙하고 한번 넘으면
쉬는 숨결에서도 항시 좋은 향내가 나는
꽃보다도 더 이쁜 여자가 되어
사내들을 호리러 나온다고,
어느 달밤에 할머니가 말씀하셔서,

나도 사내는 사내인지라
이튼날 아침엔 나막신 신꼬
골목길로 나서서 한식경을 기웃거리며
찾어보았지만
영영 그 모양은 보이지 않어서,

언덕에 올라
개(浦) 넘어 山쪽을 건네다 보니
보리밭 위에 흰구름만 둥둥둥 떠가면서
그 구름그늘에 보리 누른빛이
어섬프레 잠기고 있었을 뿐,

여든살이 된 이날 이때까지도
그런 여자를 만나본 일은 없다.
숨결이 늘 향기로운 그런 여자도,
그 아홉개의 흰꼬리가 드디어 드러나는 여자도
아직까지는 본 일이 없다.
아마 이것은 할머니가
못된 여자를 조심하라는 뜻으로
내나이 일곱살때에 일찌감치 말씀해 두신 것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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