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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일기

절터만 남았는데도 빛나는 이름 영암사지(靈巖寺址).

 

모산재 아래에 있는 영암사지는 오래전부터 간간 찾았던 곳인데 주로 모산재 산행을 하고 난 후 들렸던 곳이라 대단찮게 여겼었답니다.

그리고 대략 30년전만 하여도 이곳은 그냥 볼품없는 폐사지였구요.

그 뒤 황매산 철쭉이 엄청난 인파가 몰려드는 전국구가 되는 바람에 덩달아 영암사지도 눈여겨보는 장소로 바꿔졌는데 그 뒤 사지를 보수하여 현재는 보물 3점을 보유하고 있는 국가 지정 사적지가 되어 있습니다.

 

모산재 산행 전 이곳에 들려서 찍은 사진들과 함께 유홍준교수(전문화재청장)의 '나의문화답사기' 6권에 소개된 내용을 주로 인용문으로 사용하면서 영암사지에 관한 내용을 소개 합니다.

인용문에는 모두 "따옴표"를 사용하였습니다.

 

 

황매산의 암석도 그렇지만 이곳 모산재 암반은 모두 화강암입니다.

 

지리학과 기근도 교수의 설명입니다.

 

"저는 문화유산으로서 영암사터보다 배산을 이루는 황매산의 화강암에 대해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나라 자연에는 너무 흔해서 귀한줄 모르고 귀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이 두가지 있는데, 하나는 갯벌이고 또 하는 화강암입니다. 지금 가시는 영암사터 황매산은 대표적인 화강암 산입니다.

우리나라는 화강암의 나라입니다. 화강아마은 땅 속에서 마그마가 굳어져 지표로 올라와 침식당하면서 노출된 것입니다. 이 화강암이 석영, 장석, 운모로 구성되어 있음은 중고등학교때 배워서 잘 알고 계시겠지요? 화강암이 물에 들어가면 알갱이가 풍화하는데, 석영은 우리가 모래사장에 누웠다 일어날 때 등에서 바로 떨어지는 것이고, 운모는 필름처럼 반짝이는 것으로 금모래라고 하고, 장석은 뽀얗습니다.

 

이 화강암이란 녀석은 참으로 고마운 존재입니다.

 

첫째, 화강음은 하천에 모래사장을 만들어줍니다.  화강암이 심층풍화한 것이 모래입니다. 서울 상계동에 블록공장이 많았던 것은 도봉산, 아차산에서 내려온 모래를 중량천이 범람하면서 공급해주기 때문이겠죠. 속초 바닷가의 모래는 설악산 쌍천계곡에서 흘러내린 것입니다.

 

둘째, 화강암이 땅속에서 오랜 세월 풍화하면서 비옥한 들팜을 만들어 줍니다. 호남평야가 바로 화강암지대입니다.

 

셋째, 화강암지대는 지하수가 맑고 깨끗한 우리나라 돌산의 물은 독일의 비델이나 프랑스의 에비앙은 따라올 수 없는 생수입니다.

 

넷째, 화강암지대는 배수가 잘됩니다. 도시를 형성시킨 분지를 보면 서울, 춘천, 안동, 거창, 충주등이 모두 화강암지대입니다.

 

그리고 화강암은 수직절리와 수평절리가 발달해 여러형태의 바윗덩어리로 나타나면서 아름다운 산봉우리를 형성합니다. 금강산처럼 판구조가 큰 것도 있고, 인수봉처럼 솟아오르기도 하고, 설악산 울산바위처럼 흔들바위로도 나타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화강암의 성정(性情)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여기에는 두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화강암은 무엇보다 단단하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굳게 뭉쳐 있을때는 아름다운 바위와 산봉우리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두번째 특징은 분해될 때는 확실하게 부스러져 모래사장을 만들어주고, 물을 빨아들여 맑게 걸러주고, 비옥한 농토를 만들어 줍니다. 이것이 화강암입니다."

 

 

 

 

"누구나 영암사터가 등진 황매산(※ 모산재를 일컷는 말)을 처음 보게되면 그 환상적인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만다.

삼각형으로 뾰쪽히 솟아오는 산봉우리가 예닐곱 굽이로 길게 펼쳐져 있는 눈부신 하얀빛의 화강암 골산이다. 병풍처럼 둘러선 이 배산(背山)의 아름다움은 차라리 신령스럽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오죽했으면 절집 이름을 불교적 이미지가 아니라 영암사(靈巖寺)라고 했겠는가."

 

 

합천읍에서 황매산자락 모산재로 가는 길에는 합천호를 지나게 됩니다.

합천호 못미쳐 합천영상테마파크가 있고 그 옆에는 수력발전소가 있습니다. 이 수력발전소는 합천호 상류쪽에서 산 밑으로 기다란 터널을 뚫어 그 곳으로 물길을 내어 낙차를 이용한 발전을 하게 되는 곳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발전소를 거쳐 나온 물은 조정지댐이라고 하는 또 다른 저수지에 보관이 되는데 합천호 바닥에 있는 물을 발전으로 이용하고 모아 둔 곳이기 때문에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스하여 아침에 들리면 거의 이런 몽환적인 풍경을 연출한답니다.

 

 

 

 

 

요즘 합천호는 거의 만수입니다.

제가 고향에 들리면서 늘 이곳을 지나가게 되는데 호수가 만수가 되는 경우가 잘 없는데 이번에는 볼때마다 만수가 되어 있네요.

 

 

모산재 풍경입니다.

이번 여행은 모산재 아래에 있는 영암사지를 보기 위함인데 덤으로 모산재 산행도 겸하였답니다.

https://duga.tistory.com/2969

 

 

"얼마만큼 가다 황매산으로 오르는 길을 버리고 영암사터로 향하면 이내 해묵은 느티나무가 있어 절터 초입임을 알려준다. "

 

 

 

"여기서 사람들은 대부분 왼편으로 난 길을 따라 절마당으로 곧장 들어선다. 그러나 나는 항상 오른편 아랫길로 내려가 석축 아래에 서서 삼층석탑과 쌍사자석등이 황매산늘 병풍삼아 오롯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나서야 절마당으로 돌아 들어간다."

 

 

뒷편으로 모산재가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습니다.

영암사지 파노라마 풍경.

클릭하면 크게 보여 집니다.

 

"영암사는 대단한 절이었던 것 같다. 지금 남아 있는 유물들을 보면 모두 나말여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삼층석탑(보물 제 480호), 쌍사자석등(보물 제 353호), 염암사지귀부(보물 제489호) 등 보물이 석 점이고, 영암사터 자체도 사적 제 131호로 지정이 되어 있을 정도다." 

 

 

아침나절이라 사진이 역광이 되었는데 대기저수지 반대로 보여지는 하늘편에 하얀 띠구름이 너무 멋집니다.

 

 

요즘에 다시 만든 석재와 이전에 있던 석재를 발굴하여 서로 조합하여 만든 절마당 석축.

하수구 역활을 한듯한 오래된 석조물이 영암사지가 예사로운 절이 아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가지런히 쌓아올린 석축은 다른 절집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전해준다. 영암사터에 들어서면서 바로 만나는 승방권역의 석축을 보게되면, 긴 사각형으의 장대석을 이 맞추어 쌓으면서 높은 높은 열한개의 단으로 이루어졌는데, 아홉째 단과 다섯째 단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네모난 쐐기돌이 돌출해 있는 것이 아주 멋스럽다. 그 자체로 현대건축의 디자인 같다는 감동을 준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부분 이것을 일종의 장식으로 알고 있다. 어느날 봉은사 주지 명진스님이 뜬금없이 나에게 이렇게 물어왔다.

 

"영암사터 석축을 보니 네모난 돌들을 붙여놓았던데, 그게 무슨 법칙이 있는 겁니까?"

"갑자기 그건 왜 물어봐요? 스님한테도 그런 섬세한 면이 있었어요?"

"주지를 맡고 보니 절집의 돌 하나하나를 다시 보게 되는구먼. 그게 생각나 우리 절에도 축대를 쌓으면 벤치마킹해보려고."

"그러나 그건 겉보다 속이 더 멋있는 거여."

"속이라니?"

"그건 장식으로 붙여놓은 것이 아니라 속에 깊이 박혀 있는 팔뚝만한 긴 돌의 머리가 그렇게 나와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축대가 튼튼해지죠. 경주 불국사 석축에도 이 팔뚝돌이 있고, 석굴암 천장에 돌출해 있는 것도 똑같은 것이예요."

 

 

두 점의 보물을 나란히 보는 풍경.

석탑과 석등.

 

 

 

"영암사터가 폐사지면서도 화려한 환상의 나라 유적지라는 느낌을 주는 것은 다름아닌 쌍사자석등이 있기 때문이다. 쌍사자석등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볼 수 없는 통일신라시대 석공의 창작으로 현재 볍주사 쌍사자석등, 중흥산성 쌍사자석등과 함께 우리 불교미술의 정수를 보여준다. 그 중에서도 병풍처럼 둘러선 황매산을 향해 우뚝 서 있는 이 쌍사자석등은 폐허가 되어 모든 것이 사라진 폐사의 잃어버린 가치를 남김없이 복원해준다. 쌍사자석등은 영암사지의 중심이고 핵이고 꽃이다. 그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놓인 위치가 이 유물을 더욱 빛나게 한다."

 

"앞으로 돌출해나온 사람 키보다 휠씬 높은 석축 위에서 마치 호령하는 사령관처럼, 또는 교향악단의 지휘자처럼 홀로 우뚝한 것이다. 본래 석등은 받침대, 간주석, 화사석, 지붕돌로 구성되어 형식상 변화의 여지가 많지 않다. 화사석에 조각장식을 넣거나 간주석을 고복형이라고 해서 장구 몸통처럼 형상화하는 정도이다. 그러나 더욱 아름답고 화려한 석등을 만들겟다는 조형의지는 통일신라시대에 쌍사자석등이라는 기발한 구성의 석등을 낳았다. 영암사터 쌍사자석등은 두마리의 사자가 가슴과 앞발을 맞대고 화사석을 받친 모양으로, 사자들의 뒷다리에 한껏 힘이 모여 있다. 그만큼 역동적인데, 발돋움을 하느라 슬쩍 올라간 사자의 궁둥이가 귀엽기 짝이 없다. 그런 중 쌍사자의 뒷다리와 앞발 사이를 공허공간(空虛空間)으로 깍아낸 것은 조각적으로 대성공이었다."

 

 

이 쌍사자석등은 1933년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 넘들이 훔쳐서 의령군 대의면까지 달아나는걸 가회면서기와 이곳 주민들이 붙잡아서 면사무소에 보관해 두었다가 이 후 경남도에서 탐을 내어 부산으로 가져 갈려는 걸 막어서 지금 자리에 이건 해 둔 것입니다.  해방후에는 국보로 지정이 되었으나 이런 수난중에 다리 한쪽이 부러져 보물로 격하되었구요.

사진을 잘 보면 한쪽 다리 기브스 한 것이 보여 집니다.

 

 

 

 

 

 

 

 

 

"영암사터의 석축에서 선조들이 뭐가 달라도 다르게 한 것은 금당의 석축을 쌓으면서 석등 자리를 앞으로 돌출시키고 양옆으로 무지개 돌계단을 놓은 것이다.

영암사터는 비탈을 고르면서 권역을 나누었기 때문에 터를 넓게 쓸 수 없었다. 간신히 금당 자리를 앉혀놓았지만 석등을 세울 만한 공간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석축을 앞으로 내쌓으면 승방권역이 그만큼 좁아질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이 문제를 선조들은 아주 간단히, 그러나 아주 슬기롭게 해결했다. 다름아니라 석등을 앉힐 만큼만 철(凸)자 모양으로 내쌓은 것이다. 그리고 돌출된 석등 자리 양옆으로 승방권역에서 금당으로 오르는 돌계단을 설치했다. 이 돌계단 또한 영암사터의 빼놓을 수 없는 걸작이다. 통돌을 깍아 무지개 속선으로 여섯 단의 디딤돌을 새겨놓아 조심조심 오르게끔 되어 있다.

 

우리나라 절집의 구조를 보면 부처님을 뵈러 걸어가는 동안 어떤 식으로든 자신도 모르게 몸가짐을 바르고 하고 몸을 숙이게 하는 건축적 장치가 들어 있다. 대부분 만세루 아래를 통해 몸을 숙이고 들어가게 되 어 있거나 대웅전 앞은 축대고 막아놓고 양옆으로 애돌아 들어가게 해놓은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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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곡선의 아름다움을 무어라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고작해야 무지개의 한 자락을 오려놓은 것 같다는 표현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한국의 자연과 건축'이라는 주제로 강연할 때면 영암사터를 빼놓은 적이 없다. 한번은 포항공대 교수연수회에 초청강연을 가서도 이 돌계단을 보여주면서 무어라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는 예쁜 곡선이라고 말하고 지나갓다.

강연이 끈난 다음 교수들과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 토목과 교수 한분이 내개 한 수 가르쳐줄 듯이 말을 걸어왔다.

 

"아까 슬라이드로 보여준 영암사터 돌계단 정말 멋있습니다. 토목공학도 입장에서도 감탄이 절로 나오던데요. 그런데 다른 건축은 아름다움의 특징을 다 잘 표현하면서 이 멋진 돌다리에 대해서는 왜 그냥 지나갔습니까?"

 

"좀처럼 표현할 문구가 잡히지 않아서 그랬어요."

 

"그러면 이렇게 정직하게 말하면 어떨까요?"

 

"어떻게요?"

 

"싸인(sine) 12도의 각도를 유지하고 있다." 

 

 

 

 

 

위에서 내려다 본 돌계단의 운치.

옆에 파인 홈은 아마도 난간을 만들어 세워 둔 자리가 아닐까 생각 됩니다.

 

 

보물 제353호로 지정된 쌍사자 석등과 보물 제480호로 지정된 삼층석탑이 빈 터에 나란히 서 있습니다.

 

 

 

 

 

 

"영암서터 금당자리를 둘러보면 돌계단 난간석에 '가릉빈가(迦陵頻伽)를 조각해놓은 것을 볼 수 있다. 가릉빈가는 사람 머리에 새의 몸을 하고 한없이 아름다운 소리를 내며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천상의 새다. 이 가릉빈가가 날개를 편 모습으로 난간석을 조각하였는데, 쌍사자석등처럼 공허공간을 만들어 맞뚫림을 했다."

 

 

 

"금당의 기단을 이루는 석축 사방엔 지킴이로 사자가 조각되어 있다. 어떤 사자는 넙죽 웅크리고 어떤 사자는 고개를 돌려 뒤를 보고 있다. 묘사가 정확하고 조각이 아주 정교하여 뛰어난 석공의 솜씨임을 알 수 있다."

 

 

 

 

 

 

 

 

금당자리 지대석

 

 

 

"금당터 위로 올라가보면 불상을 모셨던 자리의 지대석에도 아주 작은 팔부중상(八部衆像) 조각들이 남아 있다. 이 또한 돋을새김으로 아주 사실적이다. 도데체 영암사에 어떤 석공이 있었길래 이 좁은 공간까지 손길을 아끼지 않았는지 존경과 감사의 마음이 절로 일어난다."

 

 

 

 

 

 

 

 

조사당 터

책에는 금당 오른편 윗쪽에 있다고 했는데 잘못 표기되었습니다.

오른편이 아니고 왼편 윗쪽.

비석을 잃은 돌거북 한쌍이 있습니다.

 

 

영암사를 창건한 스님이나 그 뒤를 이은 고승의 비석임이 분명한듯한데 윗 부분이 사라져 많이 아쉽습니다.

두 점을 합쳐 보물로 지정이 되어 있습니다.

위는 동쪽 돌거북.

서쪽에 비해 아주 디테일하고 고개를 들고 있는 형국입니다.

 

 

서쪽에 있는 돌거북

동쪽에 비해 디테일이 조금 약하지만 우람한 면이 있습니다.

햇살이 비쳐서 사진 명암이 짙어 보기가 조금 사납습니다.

 

 

"염암사터는 남아있는 유물로보아 하대신라에 창건된 절이고, 발굴결과 고려시대까지 유지되었던 것까지는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깊은 산중의 오지에 어떤 인연으로 누가 창건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것이 없다. '삼국유사' '삼국사기' '삼가현읍지' 어디에도 영암사라는 절에 대한 언급은 나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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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서울대도서관에서 '합천 영암사 적연국사비'의 옛 탁본이 발견되어 영암사라는 속전이 사실인것으로 확안하게 되었다.

비문에 의하면 적연국사는 경상도 성주사람으로 13세때 전라도 장흥 천관사에 들어가 중이 되고 37세에 중국에 유학하고 귀국했다. 성종이 스님을 대사로 봉했고, 목종이 대선사로 승진시키며 임금의 곁에서 불법을 전하게 하였다 .그러다 80세가 되었을때 가수현(오늘의 가회면) 영암사에서 조용히 주석(駐錫)하다 현종 5년에 입적하니 향년 83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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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적연국사의 비는 조사당 남쪽에 있는 돌거북 위에 세워져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영암사가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조선초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절터 발굴 때 나온 도편이 조선초 분청사기까지만 있기 때문이다. 이후로는 폐허가 되어 발굴전까지만 해도 석축 아랫단은 밭이었다.

 

이런 영암사터의 유물을 오늘날까지 이나마 지켜낸 것은 전적으로 마을사람이었다. 1933년 일본인이 몰래 쌍사자석등을 훔쳐가는 것을 막아 면사무소에 보관해두고, 1959년에는 석등을 절마당으로 옮겨 놓았다. 그리고 주민들은 무너진 삼층석탑을 바로 세우고 헌 집 두 채를 옮겨놓아지어 이 절터를 지켰다."

 

 

 

절터만 남았는데도 빛나는 이름 영암사지(靈巖寺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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