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 일기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육신사(六臣祠)와 달성 삼가헌(三可軒)


대구광역시 달성군과 경북 왜관군과의 경계지역인 하빈면 묘리(妙里)에는 조선 세조 때의 사육신인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浮)의 위패를 모신 육신사(六臣祠)란 사당이 있습니다.
묘리의 묘골마을은 사육신 중의 한 사람인 충정공 박팽년 선생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온 마을입니다.

사육신이란 단종의 삼촌인 수양이 어린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이에 집현전 학자들이 다시 단종 복위를 꾀하다 사전 발각되어 모두 목숨을 잃은 충신 6명을 말하는데 요즘에는 공조판서를 지낸 김문기(金文起)를 포함하여 7인을 일컫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멸문이 되어(나중 숙종 때 모두 복직되었습니다.) 그 가족 중 남자들은 모조리 참살되었는데 이 중 유일하게 박팽년의 유복손인 박일산(朴壹珊)이 살아남아 박팽년의 기일만 챙기다가 나중에 나머지 5위의 사육신도 같이 같은 날 제사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이에 관하여는 '처음에는 육신사의 전신인 낙빈사(洛濱祠)를 지어 제향하여 오다가 1691년(숙종17) 낙빈서원을 건립하여 제사를 지냈다. 1866년(고종3)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페령으로 낙빈사가 서원(書院)과 함께 철거되었으며, 1924년 낙빈서원이 재건되면서 위패를 다시 봉안하게 되었다. 이후 1974년 충효위인 유적정화사업에 따라 현재의 위치에 육신사로 이름을 붙여 사당을 재건하였다.'라고 네이버 사전에는 설명되어 있습니다.

사육신의 모든 가족이 화를 입었는데 박팽년의 손자 박일산이 유일하게 살아남은 계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대구 역사기행'에서 인용)

'박팽년의 둘째 며느리 성주 이씨가 형벌을 받을 때에 마침 임신 중이라 "아들이면 죽이고 딸이면 키워서 관비로 보내라"라는 엄명을 받게 되었다. 이씨 부인은 친정이 가까운 대구로 와서 관비로 있던 중 아들을 낳았다. 이때 같이 와 있던 부인의 여종이 마침 임신이었다가 같은 무렵 딸을 낳았다. 여종은 키워서 주인의 집안 대를 잇게 해 드려야지. 종이 낳은 자식은 아들이거나 딸이거나 종의 신세를 못면하는 법이니, 내 딸은 아무데서 크나 같은 신분이지만 주인의 아들은 그대로 두면 죽게 되고 내가 키우면 종의 신분으로라도 목숨만은 건질 수 있겠지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여종은 부인과 의논하여 아기를 남몰래 바꾸었다. 귀한 집 아들을 맡은 여종은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 숨어 살면서 정성으로 키웠다. 아들은 이름도 없이 '박씨 성은 가진 노비'란 뜻으로 '박비'라고만 불렀다.'

대구에서 대중교통은 시내버스 성서2번 (강창교에서 50여분 소요)
대건중고교 - 우방드림시티 - 죽전네거리 - 용산네거리 - 성서공단역 - 계명대학교정문 - 강창교 - 매곡네거리 - 문양역 - 동곡초교 - 달서중고교 - 묘리(육신사) 日 8回 왕복

현재 화원에 있는 대구 교도소가 육신사가 있는 하빈면으로 옮겨진다는 계획 때문에 이곳 육신사에도 그걸 반대하는 프랜카드가 어지럽게 붙어 있어 사진 촬영에 제약을 많이 받게 되네요. 따라서 아래 사진에 중요 관전 포인트가 나오지 않은 점은 이런 연유 때문이란 것을 양해 바랍니다.

육신사가 있는 묘리마을의 전경입니다. 묘리(妙里)는 말 그대로 지형이 묘하게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라 하네요. 박팽년선생과 관계된 집들이 많습니다.

달성군 하빈면 묘리의 지도입니다. 왼편 위 빨간 동그라미로 육신사의 위치를 표시하여 두었습니다.

위성사진으로 묘리마을의 전경을 살펴 봅니다. 묘리에서 낙빈서원과 달성삼가헌 넘어가는 고개는 차량통행이 불가능 합니다. 도보로 걸어가야 합니다.

육신사.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데 요즘 교도소이전 문제로 이곳에 반대 프랜카드가 난무하여 앵글 잡기가 아주 곤란합니다.

육신사 좌측에 있는 삼문인 성인문(成仁門)

사당건물, 웅장한 느낌은 있지만 '충효위인 유적화사업'으로 70년대에 만든 것이라 시멘트 골조로 건축 되었습니다.

육신사 우측에 있는 태고정(太古亭).현판은 양녕대군의 친필이라 합니다. 보물 554호로 아주 오래된 고택이네요.
청마루 위에는 일시루(一是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박팽년의 유일한 혈육인 박일산이 지은 것으로 임진왜란때 불탄 것을 광해6년(1614)에 다시 지은 것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요즘 아파트 수명이 50년도 못가는데 참 대단합니다.



사진의 오른편에 보이는 노란색 현판은 초천자(草千字)라 하여 초서로 쓴 천자문입니다.



양반동네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기와집들이 많습니다. 근간에 복원 중인 집들도 많구요

도곡재(陶谷齋) 대문에서 바라본 안마당. 솟을대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도곡재(陶谷齋). 도곡 박종우의 재실로 사용된 건물. 정조 2년(1778) 대사성 서정공 박문현이 지었습니다.
원래 4칸이었는데 좌측은 재실로 사용하면서 넓힌 것입니다.

충효당(忠孝堂).
인조(仁祖) 22년(1644년) 충정공 박팽년(朴彭年)의 7대손인 금산군수 숭고(崇高)가 별당으로 건립한 것으로 그 후 충효당으로 개칭하여 청년에게는 충과 효를 지도하고 예와 악을, 궁도와 마술을 실습시키며 부녀자들에게는 법도를 가르쳤다고 하며 원래 정면 5칸, 측면2칸이었으나 1995년 이설 개축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



사육신 박팽년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서 얕은 언덕 하나를 넘어가면 삼가헌(三可軒)이 나타납니다.
아주 분위기 있는 고택(古宅)인데 별당 앞에 있는 백일홍(배롱나무)과 연꽃이 심어져 있는 인공 연못이 멋들어지게 어울려지는 집입니다.
이런 시골 고택을 가지고 한번 살아 봤으면 하는 마음이 불쑥 드는 아름다운 옛집입니다.
이 집은 박팽년의 11대손인 박성수(朴聖洙)가 1769년에 이곳에 초가를 짓고 자기의 호를 따라 삼가헌(三可軒)이라 한 것에서 유래 되었는데 그 뒤 그의 아들 박광석(朴光錫)이 초가를 헐고 기와집으로 고쳐 지었습니다. 그의 호 삼가헌이란 의미는 이곳 사랑채 안에 걸린 삼가헌기(三可軒記)'에 따르면, "삼가(三可)'란 '천하와 국가를 바르게 할 수 있고, 벼슬과 녹봉을 사양할 수 있으며, 날카로운 칼날을 밟을 수 있다는 뜻으로 선비의 기상을 담고 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삼가헌 고택 앞에 서 있는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달성 삼가헌은 1769년 충정공 박팽년의 11대손인 삼가헌 박성수가 현재의 정침터에 지은 살림집이다. 이 건물은 처음에는 초가였으나 그의 아들인 박광석이 이를 헐고 1809년에 안채를, 18년 후에 새로 사랑채를 지었다. 1874년에는 박광석의 손자인 박규현이 파산서당으로 사용하던 건물에 누마루를 부설하여 별당채를 짓고 '하엽정'이라는 현판을 달았는데, 하엽정과 어우러져 운치를 더하는 연당 역시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사랑채의 당호인 삼가헌의 유래는 건물 내부 벽에 걸린 '상가헌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삼가'란 천하와 국가를 바르게 할 수 있고, 벼슬과 녹봉을 사양할 수 있으며, 날카로운 칼날을 밟을 수 있다'라는 뜻이다.

대구 달성군 하빈면 묘리 800
중요민속자료 제104호(1979.12.28)
시대: 조선 영조 45년(1769) 건물 7동

대문에 들어서면 먼저 백구가 뛰어나와 맞는데 짖기는 사납게 짖어도 꼬리를 신 나게 흔드는 걸 보면 방문자라고는 아무도 없는 겨울철 모처럼 만난 인기척에 반가워서 짖는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제 임무가 낙동강 물레길 탐방이라 시간이 많지 않아 촘촘히 둘러보지는 못하고 나왔습니다. 뒤편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사육신을 모신 서당인 낙빈서원(洛濱書院)이 있는데 이곳까지는 가 보지 못했네요.
묘리의 육신사와 이곳 삼가헌, 낙빈서원은 달성 낙동강 물레길 탐방의 시발 지점으로 먼저 들려서 둘러보시면 사육신의 의미를 되새기는 아주 좋은 답사처가 될 것 같습니다.



사랑채를 들어서면 백구가 짖으면서 방문객을 맞습니다. 인기척이라는 전혀 없는 집에 일단 백구의 안내를 받아 들어섭니다.

달성 삼가헌 사랑채. 5칸으로 되어 있는데 왼편 두칸은 대청마루로 오른편은 방으로 사용되고 있네요.

오른편 옆에는 초가를 얹은 자그만 광이 보입니다.
이곳 저곳의 소화기들이 우선 눈에 들어 오는데 조금 인테리어를 하여 앵글에 숨어지게 하여 두었으면 좋겠네요.

이곳 삼가헌에서는 이 건물이 뽀인트입니다. 별당으로 사용하였던 하엽정(荷葉亭)입니다.
이전에 서당으로 사용했던 건물에 누마루를 붙여서 더욱 운치를 높였네요.

별당 앞에는 인공연못이 있고 주위에는 수목들이 많습니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되면 그야말로 한폭의 산수화가 연출 될 것 같네요.





위성으로 본 묘리마을과 삼가헌입니다. 육신사에서 삼가헌까지는 도보로 약 20여분 얕은 고개를 넘어 걸어가면 됩니다. 이 구간으로 차량은 통행 불가합니다.


마을 입구에 있는 강정보 녹색길 안내판입니다.
..........................................................................................

이 내용은 달성군 홍보기자 블로그인  달성사랑 블로그와 같은 내용으로 동일하게 연재 됩니다.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육신사(六臣祠)와 달성 삼가헌(三可軒)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