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과 그림

신경림 - 가난한 사랑 노래

두가 2024. 5. 23.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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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시인이 어제 하늘나라 여행을 떠났네요.

시인으로서 명성이 오르면 정치에 텀벙 발을 담근다든지 넥타이 매고 다니면서 얼굴에 기름끼가 생기는 그런 스타일이 아닌 늘 털털하고 소박한 이미지로 남아있는 존경하는 분이었지요.

막걸리 주당 천상병, 김관식 시인과 친했다고 하는데 아마도 술친구로서 시인으로서 죽이 맞았다고 생각이 되네요.

 

신경림 시인의 작품 중에서 가장 많이 소개가 되는 게 '가난한 사랑노래'입니다.

이 시의 탄생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시인이 서울 성북구 길음동 산동네에 살 때였다고 합니다. 

집 근처에 자주 들르던 술집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그 집 딸과 연인 사이인 한 청년을 만났다는군요. 

그는 부조리한 세상에 맞서는 열정을 지녔지만, 한편으론 많이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처지를 못내 부끄러워하는 순박한 젊은이였죠.

청년이 고민을 털어놨습니다. 

그 집 딸을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너무 가난해서 결혼 얘기를 꺼내기가 힘들다는 것이었습니다. 

하긴 딸 가진 부모로서는 그런 사위를 맞아들이기가 쉽지 않겠지요. 

그래서 청년은 그 집 딸과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기를 여러 번이나 했다고 합니다.

그 얘기를 듣고 시인은 청년에게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둘이 결혼하면 주례도 해 주고 결혼 축시도 써주겠노라고 약속했습니다.

그 말에 힘을 얻어서 둘은 머잖아 결혼식을 올리게 됐지요.

 

결혼식장에서 시인은 그들을 위해 '너희 사랑'이라는 축시를 읽어주었습니다.

너희 사랑

-누이를 위하여

 

낡은 교회 담벼락에 쓰여진
자잘한 낙서에서 너희 사랑은 싹텄다
흙바람 맵찬 골목과 불기 없는
자취방을 오가며 너희 사랑은 자랐다
가난이 싫다고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고
반 병의 소주와 한 마리 노가리를 놓고
망설이고 헤어지기 여러 번이었지만
뉘우치고 다짐하기 또 여러 밤이었지만
망설임과 헤매임 속에서 너희 사랑은
굳어졌다 새 삶 찾아 나서는
다짐 속에서 너희 사랑은 깊어졌다
돌팔매와 최루탄에 찬 마룻바닥과
푸른 옷에 비틀대기도 했으나
소주집과 생맥주집을 오가며
다시 너희 사랑은 다져졌다
그리하여 이제 너희 사랑은
낡은 교회 담벼락에 쓰여진
낙서처럼 눈에 익은 너희 사랑은
단비가 되어 산동네를 적시는구나
훈풍이 되어 산동네를 누비는구나
골목길 오가며 싹튼 너희 사랑은
새 삶 찾아 나서는 다짐 속에서
깊어지고 다져진 너희 사랑은

 

결혼식은 어느 건물의 비좁고 허름한 지하실을 빌려서 했습니다.

청년이 노동운동으로 지명수배를 받아 쫓기는 신세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지요.

숨어서 치른 결혼식은 자못 감동스러웠습니다.

축하객은 다 합쳐봐야 열 명 정도밖에 안 되었지만, 얼마나 가슴 저린 사랑의 결실인지 알고 있었기에 저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축하를 보냈습니다.

그날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곧장 집으로 돌아온 시인은 두 사람이 겪은 마음고생과 인생의 쓰라림을 달래는 마음으로 시 한 편을 더 썼습니다.

그때 탄생한 시가 바로 '가난한 사랑 노래'입니다.

 

 

 

가난한 사랑 노래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 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집 책꽂이에 오래 보관되어 있던 것인데 1984년에 사서 꽂아 둔 책이니 애착이 많았던 책이네요.

그동안 수차례 책장 정리를 하면서 많이 버리곤 했는데 말입니다.

 

 

접혀있는 페이지가 한곳 있어 펼쳐보니 박인환의 시 '어린 딸에게' 란 시가 있는 곳입니다.

83년생 딸을 낳고 1년이 지난 시기..

그 어린 딸을 앞에두고 이 시를 읽어면서 저는 그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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