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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일기

미스터리로 가득한 천불천탑의 운주사를 찾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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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가고 싶은 여행지가 있는데, 일부러 꼭꼭 아껴두면서 마음 속으로 그리움만 쌓아 둔 적이 있나요?
전남 화순에 있는 운주사(雲住寺)가 저한테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렇게 고이 아껴둔 여행지 운주사를 한적한 겨울 초입, 조용한 계절에 찾아가 보았습니다.
천불천탑(千佛千塔)으로 유명한 운주사는 미스터리와 수수께끼가 가득한 곳입니다. 동행한 아내 順의 관람 총평(總評)이 이를 대신합니다.

"정말 재미있고 이상한 곳이네요."

일단 이 곳은 확실한 것이 없는 절입니다. 창건연대나 조성배경, 누가, 왜.. 등등..이 하나도 밝혀진 것이 없는 그야말로 모든 것이 미궁속의 절..
천불천탑이란 말은 조선시대 인문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적혀 있는 기록으로 확인 되는데 "운주사 재천불산 사지좌우산척 석불석탑 각일천 우유석실 이석불 상배이좌(雲住寺 在天佛山 寺之左右山脊 石佛石塔 各一千 又有石室 二石佛 相背以坐)" 라 하여 이곳 운주사는 천불산 아래 있고 좌우 산에 석불과 석탑이 각각 일천기씩 있다고..

그렇게 만든 석불과 석탑은 세월이 지나면서 없어지고 지금은 석탑 21기와 석불 100여기만이 남아 있습니다. 어찌보면 가치가 있는, 제대로 된 작품(?)들은 다 없어지고 못난이들만 남아 있다고 보면 되겠네요.
이곳 불상들과 석탑을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제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지멋대로, 아무렇게나.. 위태하여 서 있는 석탑들은 하나같이 슬쩍 밀면 넘어 갈 것 같아 이런 자세로 수백년의 시간을 이어 온 것이 정말 신기할 뿐입니다. 불상들도 인품과 위엄(?)을 갖추고 있다기보담 심술난 석공이 패대기 친 작품으로 여겨질만큼 우왕좌왕합니다. 그러나, 여물다만 퇴적암의 거친 바위로 만든 부처의 모습이나 탑의 생김새에서 상대적으로 정갈하고 균형적인 현대인의 마음을 적셔주는 뭔가가 있습니다. 묘한 매력이 느껴집니다. 이곳 저곳에 기대어 서 있는 불상들과 눈을 맞추고, 돌을 다듬었다기보담 주워 얹었다는 느낌이 드는 이상한 모양의 탑들을 둘러 보면서 이 미스테리한 수수께끼를 풀어 볼려고 용을 쓰다가는 결국 포기하고 대웅전에 들어가 부처님 전 문안 인사나 드리고 되돌아 나왔습니다.

우리가 들어 갈때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는데 나올 무렵이 되니 몇 사람의 관람객이 보입니다.
입장료는 3,000원이며 경내의 이곳 저곳과 양 산자락을 천천히 모두 둘러보는데 대략 두어시간만 하면 충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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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월간 山' 誌의 2005년 6월 별책부록인 '좋은 산 좋은 절'에 나온 운주사에 관한 글을 생노가다로 모두 옮겨 적은 것입니다. 이 글은 현대불교신문 논설위원(2005년 현재)이셨던 윤제학님이 '월간 山' 誌에 기고한 글로서 운주사에 관하여는 그 어느 글보다 더 재미있게 적혀 있네요.


천불산 운주사

저절로 솟아오른 탑과 천진불(天眞佛)의 땅

돌부처를 만드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이를 때, '깍는다.' 혹은 '조각한다.' 고 말하지 않습니다. '털어낸다.'고 합니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땐 참 재미있는 직업 사투리라고만 생각했습니다. 돌을 깍아내는 그 무거운 노동을 마치 '먼지터는' 일인 양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무심(無心)도 참 멋있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말의 밑자리 깊숙이에 깔린 오의(奧義)를 이해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본래 바위 속에 있는 부처를 드러내는 일' 이 곧 돌부처를 만드는 일이라는 얘기였습니다. 이 말은 모든 중생의 마음속에는 부처의 싹이 있다는 여래장(如來藏) 사상과 맞닿습니다.

천불천탑(千佛千塔)으로 널리 알려진 전남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 운주사에서 '돌을 털어내어' 부처를 드러낸 천 년 전 석수(石手)들의 무심을 봅니다. 그 무심, 45년 간 장광설을 해 놓고도 끝내는 '한 마디도 한 바 없다.(一字不說)' 고 한 석가모니 부처의 거대한 시치미 떼기와 많이도 닮았습니다. 나도 흉내내어 이렇게 말해 봅니다. '운주사에서 나는 저절로 솟아오른 탑과 또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 부처를 만났다.'

운주사는 수수께끼와 미스터리로 가득 찬 공간입니다. '누가, 왜, 언제' 그 많은 탑과 불상을 만들었는지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에 대한 해석도 범람합니다. 그럴수록 신비성만 더 깊어질 뿐입니다. 운주사의 역사와 창건 배경에 관한 추정과 주장의 난무속에서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자신의 눈으로 상상의 날개를 펼쳐볼 것. 비전문가의 무식한 용감이라는 타박을 들을지 모르겠지만, 고고학적 해석과 미술사적 탐구의 중요성과는 별개로 우주사 느끼기의 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천불천탑의 조성과 관련된 설화 한 토막을 보겠습니다.

"도선국사가 하루 낮밤 동안 천불천탑을 세울 적에 맨마지막에 와불(臥佛)을 일으켜 세우려 했는데, 공사에 실증을 낸 동자승이 거짓 닭 울음소리를 내는바람에 하늘에서 내려온 석공들이 날아가 버려 와불만 누운 상태로 남게 되었다."

지극히 신비적인 이야기입니다. 물론 후대에 만들어진 얘기입니다. 1984년부터 1991년까지 이루어진 전남대 박물관의 네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와 두 차례의 학술조사 결과 초창 상한 연대를 11세기로 추정 하는데, 도선 국사의 활동시기는 9세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이야기가 만들어 졌을까요? 도선 국사의 권위에 기댄 것이겠지요. 또한 도선 국사의 권위는 또 다른 창건 설화를 낳습니다. 이른바 도선 풍수의 핵심개념인 사탑비보(寺塔裨補)에 근거한 설화입니다. 사탑비보란, 절과 탑을 세워 국토의 모자라고 빈 곳을 돕고 채우는 것을 말하는데, 이에 따른 설화는 다음과 같습니다.

도선 국사가 보기에 우리땅의 생김새는 '달리는 배(行舟)'의 형국인데, 큰 산줄기가 동해로 치우쳐 국토의 정기가 일본으로 새 나가기 때문에 이곳 화순 땅 운주사에 천불천탑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고려 초기 건국의 이념적 배경으로 내세워졌던 비보설(裨補說)이 투영된 설화로 보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운주사가 우리에게 던지는 많은 수수께끼 가운데서도 가장 흥미로운 것은 왜 와불을 일으켜 세우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해석학적 충동은 급기야  '와불이 일어서는 날 천지가 개벽할 것' 니라는 혁명적 상상력으로 절정을 이룹니다. 한번도 테평성대를 맞아 본 적이 없었던 민초들의 간절한 바람의 소산이겠지요.

이렇듯 운주사는 끊임없이 우리의 상상력을 춤추게 했습니다.  창건과 관련된 오늘날의 학문적 해석도 다채롭습니다.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능주 지방의 호족 세력에 의한 창건(박경식). 능주 지방으로 이주해 온 이민족 집단의 창건(신영훈) 등이 창건 주체에 관한 추론입니다. 신앙 정체성이나 성격에 대해서도, 천민들과 노비들의 미륵공동체(박태순), 세계 역사상 유례가 드문 중세시대 천민 노비들의 해방구(힐트만), 도교사원(신영훈), 밀교사원(고유섭), 민간 기복처(문경화), 의상의 법성게도(法性偈圖)의 밀교적. 민속적 전개(홍윤식), 몽고 침략을 물리치기 위한 백고도량(百高道場)이라는 다양한 견해가 나와 있습니다. 최근에는 몽골군에 의한 조성(소재구)이라는 새로운 주장도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런 추정과 주장들이 나름의 이론적 근거를 들지만 실증 단계에서는 추론에 불과하다는 것이 발굴 조사에 바탕을 둔 견해입니다.

머리가 어질어질할 지경입니다. 그렇지만 정신을 가눌 길이 영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양한 주장가운데서 공통분모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미완(未完)의 도량(道場)' 이라는 점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가 되겠지만 미완의 근거는와불입니다. 왜 일으켜 세우지 않았냐는 것이지요. 앞서 본 도선 국사의 하루 낮 밤 조성설도 그 출발점은 와불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불상의 양식으로 봐선 누워 있는 두 불상의 양식이 불상들의 양식은 좌불상(坐佛像)과 입불상(立佛像)이라는 점입니다. 일반적으로 와불이라 함은 부처의 열반상을 이릅니다. 팔베개를 하고 모로 누운 부처상 말입니다. 오늘날에는 이런 자세에 대해 심장이 약간 왼쪽으로 치우쳐 있기 때문에 가장안정적이라는 인체공학적 설명을 하기도 합니다. 다들 경험했겠지만 잠 못 이루며 뒤척이는 밤, 마지막 자세가 이와 같이 된다는 점을 상기하면 제법 그럴 듯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여하튼 운주사의 와불은 양식으로 본다면 와불이 아닙니다. 실제로 이들 두 부처는 떼어 내려고 한 흔적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와불 아래에 선 시위불(侍衛佛, 머슴부처라고도 함)이 와불 옆에서 떼어낸 것이 확실한 점에 비추어 보면, 일으켜 서우려 한 최초의 의도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냥 누운 채로 두엇을까요? 기술적 한계, 마지막 단계에서 포기, 혹은 불사 주체의 좌절, 최초의 의도 수정등으로 짐작해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지점에서 나의 상상력이 춤을 추기 시작 합니다. 떼어내려 하다 보니 그냥 두는 것이 더 근사하다는 데 생각이 미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런 나의 상상은 골짜기에 선 위태로울 정도로 가파른 상승감을 보여주는 탐으로 이어집니다. 그것에서 나는 하늘과 하나가 되려는(天人合一) 불탑 조성자들의 꿈을 봅니다. 그래서 나는 운주사의 와불은 '누운 부처'가 아니라 '하늘과 마주한 부처'라고 말해 봅니다. 실제로 와불 옆 산기슭에는 하늘이 내려 앉아(七星石) 있고, 최근에는 불탑의 배치가 하늘의 별자리와 일치한다는 주장이 제기 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별자리에 대해서는 매력을 느끼지 못합니다. 모든 불탑의 배치에서 어떤 원칙이나 기준을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과잉 해석은 상상력보다 못하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해석은 설득을 강요하지만 상상은 늘 열려 있습니다.

사실 운주사 도량에 첫 발을 딛는 순간 '천불천탑'을 느끼지는 못했습니다. 안 넘어지고 서 있는 것이 용하다 싶은 석탑, 못 생겼다 못해 만들다 만 것 같은 석불이 첫인상의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몇 번을 반복하여 산을 오르내리자 비로소 천불천탑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산줄기 맞은편의 석탑이 금방 솟아오른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더불어 호남정맥의 무등산에서 흘러내린 천불산의 두 산줄기 사이 계곡의 평지에 있는 탑과 불상들도 태초부터 그렇게 생겨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현재 운주사에서 천불천탑이라는 말과 달리 18기의 탑과 100여 석불(불완전한 것 포함)만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천불천탑은 단순히 많다는 의미의 수사(修辭)가 아니라 실제로 그랬을 거라는 확신으로 다가옵니다.

"이 동네에서는 소 여물통도, 절구도, 빨랫돌도 심지어는 개 밥그릇도 본래 돌탑이거나 돌붙처였다고 보면 됩니다."

절 아랫동네에서 태어나 52년째 살고 있다는 박병일씨의 말입니다. 다소 과장된 말이라 쳐도 일제 때의 반출과, 관리가 전무하다시피 했던 80년대 초반까지 이곳저곳으로 옮겨갔을 사정을 고려하면 1481년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의 다음 기록은 사실에 가깝다고 봐야 할 것 입니다. "운주사는 천불산에 있는데, 절의 좌우 산기슭에는 석불과 석탑이 각각 천개 씩있다."

운주사의 이름은 한자로 運舟寺, 運柱寺, 雲住寺 등으로 쓰였는데, 발굴조사 때 발견된 고려시대 기와에 새겨진 글자로 雲住寺임이 밝혀졌습니다. 어쩌면 계곡과 산기슭에 불탑이 구름처럼 가득하여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운주사는 천불천탑의 명성에 비해 뒤늦게 알려진 절입니다. 80년대 이후부터, 비교적 먹고 살만해지고 나서야 문화재에 눈을 돌릴 여유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토속적 미감에 대해 눈뜬 시기도 바로 그때부터입니다. 이에 더하여 전남대에 교환교수로 와 있던 독일인 힐트만 교수가 운주사를 해외에 알림으로써 운주사는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그래서인지 외국인이 가장 많이 찾는 절이자 외국인의 뇌리에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절입니다. 우리것이 곧 섹몌적일 수 있다는 모범 사례를 보여 주는 절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흔히 학자들은 운주사 불탑들의 미학적 특징을 말하면서 파격미, 도전적 단순미, 해학미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들이 의도적인가 아닌가에 대하여는 확정적으로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의도적이었다는 확신을 가집니다. 퇴적암의 무른 특성을 살려 정교한 표현대신 그에 걸맞는 불탑의 표정을 만들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탑의 경우, 조각수법은 투박해도 축조기술 측면에서는 최고의 경지를 보여준다는 사실에 주목하면 결코 기술적 한계 때문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일명 거지탑으로 불리는, 거의 다듬지 않은 몸돌과 지붕돌로 쌓은 석탑도 그것을 뒷받침합니다. 다시 말해 거지탑은 형식과 기법애 구애받지 않겠다는 의도의 직접적 표현이라는 얘깁니다.

또한 불탑의 배열은 원칙 없음을 원칙으로 삼은 게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있는 그대로의 돌을 그 자리에서 깎고 다듬어 세웠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탑들이 기단석이 따로 없고 자연 암반을 기단으로 삼았을뿐 아니라, 앉은 방향(坐向) 또한 들쑥날쑥한 점이 그 방증입니다.

운주사는 분명 미완의 도량입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미완(未完)의 완(完)'이라 믿습니다. 자연 그대로를 부처의 몸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천진(天眞)한 마음이 부처로 화현한 땅 운주사. 그곳의 못생긴 부처님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네 마음 속 천진이 바로 메시아'라고,

석수가 돌을 털어내듯이, 마음자락 하늘 향해 펼치고 두드려 봅니다. 켜가 너무 두텁습니다. 또 절망하는 이 순간, 운주사의 못난이 부처가 빙긋 웃습니다.





공사바위(불사바위)에 올라 내려다 본 운주사 경내. 아래 지도와 180˚ 꺼꾸로 보면 됩니다. 
계곡 속에 절이 자리하고 있고 좌우 능선 이곳 저곳에 탑들이 산재하고 있습니다.
정면 우측 능선 안부 소나무 몇 그루가 숲으로 되어 있는 곳에 유명한 와불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운주사 경내 지도 - 일주문 들어가면서 우측 능선(입구에서 본 방향)에 있는 탑들을 관람하고 경내 구경한 다음 공사바위(불사바위)까지 올라갔다가 내려 온 다음 좌측 능선에 올라 와불 참배 후 칠성바위 쪽으로 내려 오면 됩니다.

영구산(靈龜山) 운주사(雲住寺)란 현판이 걸려 있는 일주문.
옛날 운주사를 세운 운주도사가 거북으로 변해 사람을 실어 왔다는 전설로 인해 산 이름이 영구산으로 불리웠다 합니다.



보수공사 중인 보물 제796호 9층석탑.
아래 사진들에서도 보여 지지만 이곳 운주사의 석탑들은 아래 위 탑신의 폭 차이가 별로 없어 매우 위태로워 보이는 특징이 있습니다.

입구 우측 언덕 위에 있는 거지탑(5층석탑)입니다.이 거지탑 밑 부분은 난간 공사로 나무판자등이 어질러져 있어 사진을 잘랐습니다.
건너편으로 보여지는 건 칠성바위와 석탑.







마애여래좌상 올라가는 길 옆에 있는 석불들.. 맨 왼편 자그마한 돌부처에 눈이 가네요. 뭔가 새침하게 약간 방향이 돌아져 있어...

흡사 데려온 자식마냥 외롭다는 느낌이 팍 드는...

석조불감 앞에 있는 석탑. 7층이나 9층석탑들이 대개 이렇게 기단과 탑신의 몸통이 비슷한 크기여서 보기에 아주 위태합니다.
어찌어찌 그냥 겨우 버티고 서 있는 듯한.. 이런 자세로 수백년을 버텨 왔다는 것이 너무 신기하네요.

보물 제 797호로 지정되어 있는 석조불감(石造佛龕).
불상을 모시기 위하여 만든 집을 불감이라 하는데 이곳 감실 안에는 2구의 불상이 등을 붙인채 모셔져 있습니다. 

빵이 생각나는 .. 탑. 보물 제 798호인 원형다층석탑(圓形多層石塔)입니다.그 어디서도 구경하기 힘든 특별한 모양입니다.

넘어가지 않고 버티고 있는 것이 오히려 신기한...





대웅전과 지장전. 대웅전 마당에는 훼손이 심한 다층석탑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불사바위(공사바위) 오르는 길 옆에 있는 항아리탑(원형구형탑).
 스님의 공양그릇인 발우 모양으로 바위를 다듬어 쌓아 올렸는데 정말 특이 합니다.



이 탑도 아주 재미있습니다. 명당탑(원반형사층석탑)이라 하는데 이곳 운주사 인근에 있는 바위들이 납작하게 잘 갈라지는 특징을 이용하여 만든 것 같습니다.
옥개석 밑 탑의 색상이 서로 다른데 아마 아랫쪽 탑신은 후대에 새로 만들어 이은 듯 합니다. 우측에 있는 사층석탑은 분황사 전탑과 비슷한 신라석탑의 유형입니다.





범종각.

오늘의 하이라이트. 와불을 만나러 올라 갑니다. 경사진 계단길을 약 10여분 오르면 됩니다.

오르는 중간에 바위 처마 밑의 석불도 구경 하구요.

와불(와형석조여래불), 석불좌상과 입상이 나란히 누워 있습니다. 길이가 12m, 넓이 10m의 거대한 규모이며 이 부처가 일어나는 날 세상이 바꿘다고 합니다.
맨 위의 인용한 설명글에 이 와불에 대한 내용이 상세히 나와 있습니다.. 

조연으로 출연한 아내 順과 비교하여 크기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근데 여기서 촬영 팁 노하우 한가지.
위 사진과 같이 지미집으로 촬영 한 것 같은 공중촬영은 어떻게 한 것일까요?
그냥 대수롭잖게 보면 별 거 아니지만 사진을 보면서 약간 궁금증을 가지셨다면 아마 분명 사진을 좀 찍어 본 분이실 것 같습니다.
제가 지미집을 가지고 갔을리도 없을 것이고 그렇다고 나무 위에 올라가 찍은 것도 이닙니다.
정답은 삼각대를 끼워 최대한 발을 길게 빼 들어 올리고 셀프타이머를 설정하여 촬영하면 이렇게 되지요.ㅎㅎ



칠성바위. 커다란 원형의 바위가 7개 만들어져 있는데 전체적인 각도가 북두칠성 형태라 합니다.



못 생긴 죄로 얼굴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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