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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일기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 있는 안동의 봉정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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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6권이 지난 5월에 출간 되자마자 인터파크에서 당일로 배송받아 일부러 조금씩 아껴 읽었는데 그만 아쉽게 다 읽어 버렸습니다. 늘 그렇지만 이런 책들을 읽어면서 마음속으로 생각해 본 것은 다음에 여행 가더라도 꼭 같이 따라쟁이 한번 해 보자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작가의 눈과 작가의 마음을 그대로 따라 하면서 같은 느낌을 가져 보는 것도 여행의 묘미같이 느껴질 것 같구요.

"아는 만큼 보인다." 이 세상의 어느 곳에서도 이 말이 맞지 않는 곳이 있을까요?
이 冊 저자인 유홍준 교수는 시리즈 첫 권인 1권 머릿말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미술사를 전공으로 삼은 이후 내가 주위 사람들로부터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어떻게 하면 미술에 대한 안목을 갖출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 막연한 물음에 대하여 내가 대답할 수 있는 최선의 묘책은 "인간은 아는 만큼 느낄 뿐이며, 느낀 만큼 보인다"는 것이었다. 예술을 비롯한 문화미란 아무런 노력 없이 획득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것을 아는 비결은 따로 없을까? 이에 대하여 나는 조선시대 한 문인의 글 속에서 훌륭한 모범 답안을 구해 둔 것이 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간단한 여행을 떠날때에도 그 곳 풍습이나 내력, 또는 역사를 조금만 더 알고 떠나보면 보는 시야가 휠씬 달라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안동의 봉정사는 이곳 지방에서는 가장 크고 유명한 절집입니다. 70년때 초반에 개 보수때 이곳에 있는 극락전이 우리나라 최고(最古) 목조 건물로 알려지면서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이 가진 타이틀을 단박에 빼앗아 유명세를 타다가 1999년 영국여왕이 우리나라에 와서 가장 한국적인 곳이 보고 싶다며 찾은 곳이 바로 이곳 봉정사가 되어 졸지에 가장 고풍스럽고, 가장 한국적이고, 가장 단아하고, 가장 아름다운.. 등등의 수식어가 붙어 버린 '유명한' 절집이 되어버린 곳입니다.

 

그러나 이 봉정사도 그 이전에는 경북 오지의 첩첩 산중에서 별 볼일 없는 절로서 그저 케케묵은 절집 중 하나였답니다. 72년 해체보수시 이 절집의 가치를 그때 만약 알았더라면 最古인 극락전의 앞판떼기 모습이 아래 사진처럼 뼁끼 칠한거 마냥 단조롭지 않고 그때 있었다는 벽화 그림들도 살려 놓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마냥 드는 곳입니다. 그나마 단청을 새로 입히지 않고 그대로 고이 놔둔 대웅전의 처마 밑 풍경은 너무나 감격스러워 보는 내내 운치가 묻어 있어 그것만으로도 이 절은 두고두고 가장 한국적인 절이다. 라고 자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의문화유산 답사기에서 봉정사에 대한 내용은 시리즈 6권 중 3권의 p91에 '니, 간고등어 머어봤나?'하는 제목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저자인 유홍준은 아시다시피 대구에서 영남대 박물관장 하다가 명지대 교수시 문화재청장으로 임명 되었는데 어떤 미친 영감쟁이가 남대문에 불을 지르는 바람에 책임을 지고 물러난 분입니다. 제가 아주 존경하는 분이구요. 이번 6권에서는 제 고향 陜川땅과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한 居昌도 소개되어 있고 또 얼마 전 다녀 온 경복궁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지난 문화재청장시의 고충과 운영의 내용들이 같이 올려져 있어 여러가지로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이번 봉정사 여행은 순전히 유교수의 글을 따라 떠나 보기로 하였습니다. 이동경로는 안동민속경관지 - 제비원석불 - 봉정사로 하였습니다.  
아래 사진과 함께 올려진 설명 내용 중 노란 테두리 속의 글들은 모두 책에 올려진 글귀를 그대로 인용한 것들입니다. 따라쟁이 여행의 재미는 작가와 느낌을 같이 해 본다는 것입니다. 목적도 그렇게 두었구요. 약간 더워지는 날씨에 조용한 산사에서 나름 좋은 공부를 하고 왔습니다.

 

봉정사 인근 답사 지도 - 위 지도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권 구입시 사은선물로 받은 답사노트에 실린 지도입니다.

안동 민속 경관지를 건너가기 전의 주차장에서 바라 본 경관 - 사진에서 보이는 목교다리를 걸어서 건너가도 되고 그 옆의 다리를 차로 건너가도 됩니다.

법청동 임청각에서 굴다리로 철둑을 빠져 나오면 바로 눈앞에 안동댐 보조댐이 나타나고 댐 건너편 산자락으로는 민속박물관과 민속경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안동댐으로 수몰될 운명에 잇던 건물 중 예안의 선성현(宣城縣), 객사(客舍), 월영대(月映臺), 석빙고 같은 준수한 건물들을 옮겨 놓았고 까치 구멍집, 도투마리집, 통나무집 같은 안동지방의 민가들도 옮겨와 야외건축박물관을 만들면서 바로 그 민가에서 안동의 향토음식을 팔고 있다.

 

수몰지역내의 향토민가들을 옮겨와 지어 논 것들인데 이전 시골의 느낌이 묻어 납니다.
차를 가지고 들어 갈 수 있고 윗쪽으로 올라가니 영화 셋트장도 있네요.

 

지금도 안동장에서는 장바구니에 뱃자반 간고등어를 한 손 사가지고 걸음도 상쾌하게 돌아가는 할머니를 얼마든지 볼 수 있다.한 손이란 보통 두마리인 줄로 아는데 정확히 말해서 큰 것 하나에 작은 것 하나로 한 손에 꽉 쥘 수 있는 양을 말한다. 그래서 어려서 부터 여기에 입맛을 길들인 안동 사람은 간고들어가 없어면 서운해하며 안동에만 틀어박혀 산 아이들은 생선은 간고등어 외엔 없는 줄로 알고 자란다. 그런 사람을 안동 답답이 또는 갑갑이라고 한다.

 





찻집을 겸하고 있는 어느 기와 한옥집인데 축담 아래 꽃들이 너무 운치 있습니다. 여주인 인듯한 분이 나와서 다정하게 맞아 주네요.

안동 민속경관지에서 제비원 까지는 승용차로 약 20분 거리.

안동 시내에서 영주로 가는 5번 국도를 타고 북쪽으로 시오리쯤 가면 느릿한 고갯마루 너머 오른쪽 산기슭 암벽에 새겨진 커다란 마애불을 길에서도 휜하게 바라볼 수 있다. 이 불상은 '안동 이천동(泥川洞) 석불' (보물 제 115호)이라는 공식 명칭을 갖고 있지만 조선시대에 제비원이라는 역원(驛院, 요즘 여관)이 있던 자리여서 흔히 제비원 석불로 통한다. 요즘엔 그 독한 안동 제비원 소주로 이름이 낯설지 않게 되었지만 원래 제비원의 이미지는 소주보다는 단연코 이 석불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석불에 올라가 보니 앞쪽에 바위(좌)가 하나 더 있고 그 사이에는 공간이 있어 예불을 올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저도 요즘은 절(寺)에 가면 아내한테 배운 절(拜) 솜씨로 부족하나마 부처님께 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불전함 인사도 걸러지 않구요.

얼핏 생각하기에 안동 양반들은 한자어를 많이 썼을 것 같은데 이처럼 한글 이름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것은 한글이고 한자고 한번 접수한 것은 무조껀 끝까지 지키고 보는 전통고수의 저력 때문인 것이다. ........ 이래저래 안동에는 한자어를 둘어싼 일화가 있다. 임재해의 『이바구 세상』에는 이런 애기가 나온다. 한 총각이 강제로 선도 보지 않고 결혼을 하게 됬는데 여자가 반촌 출신이 아니라 민촌(民村) 출신인지라 영 맘에도 안들고 깔보게 되어 첫날밤 신방에서 색시를 멋지게 곯려주려고 한자로 운(韻)을 던져 대구(對句를 읊어 제시하지 못하면 면박을 줄 속셈으로 ""청포대하자신노(靑袍帶下紫腎怒)"라고 했다는 것이다. 풀이하여 '푸른 도포 허리띠 아래에서 보랏빛 신이 노했도다'. 그런데 색시는 뜻밖에도 이를 척 받아서 화답을 하는데 "홍상고중백합소(紅裳袴中白蛤笑)" '즉 붉은 치마 고쟁이 속에서 흰 조개가 웃는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세상에 많은 대구가 있지만 이처럼 절묘한 것은 드물다.

 

제비원 석불 구경하고 다시 30 여분 달려 도착한 최종 목적지인 봉정사(鳳停寺).
마침 단체로 오신듯한 보살 아줌마들이 무리지어 내려오고 있어 잠시 비켜서고 나니 그 뒤 이 절간에는 간간 찾아 오는 나 같은 이 외에는 적막감마저 드는 아주 조용한 산사입니다.

일주문 지나 절집으로 오르는 언덕 옆에 커다란 소나무가 '나 자빠질란다. 배 째라.' 하는 식으로 기울고 있는 것을 쇠막대기로 겨우 받쳐두고 있네요.

 

일주문을 넘어서면 산길 좌우로는 해묵은 고목들이 높이 치솟아 하늘을 가리는데 그 나무가 참나무라는 사실이 차라리 놀랍다. 우리는 보통 야산에 즐비한 작은 참나무만 보아와서 참나무가 이렇게 크게 자랄 수 있다는 생각을 좀처럼 하지 못한다. 그러나 숯 중에서는 참나무 숯이 최고이고, 철도 침목처럼 강하면서도 탄력이 있어야 하는 것에는 참나무를 썼던 것을 생각하면 참나무가 왜 수많은 나무 중에서 '진목(眞木)'이란 뜻의 참나무라는 이름을 차지했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절집 입구인 만세루(萬歲樓)..

입구 상단에 '천등산봉정사( 天燈山鳳停寺)'란 현판이 붙어 있습니다.

 

봉정사의 절집 진입로는 만세루인 덕휘루(德輝樓) 아래로 난 돌계단으로 되어 있다. 정성을 다해 가지런히 쌓았으면서도 천연의 멋을 다치지 않은 돌계단을 밟고 만세루를 향하면 넓은 가슴으로 품에 안을듯 압도하는 누각에 몸을 맡기고 싶어지는데 우리는 반드시 누마루 아래로 난 돌계단으로 고개를 숙이고서야 안마당으로 들어설 수 있으니 성역에 들어가는 겸손을 반강제적으로 초입부터 보이게 된다.

 

만세루 이층 누각에는 법고가 있습니다. 그 옆으로 목어가 걸려 있는 것도 보여지네요. 둘다 두드려서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내부에는 출입금지. 이런 더운 날 누각에 앉아 곡차(막걸리) 한잔 했으면 좋겠다는 불경스런 생각이 드네요. 우리나라의 법고는 모두 쇠가죽으로 만드는데 양쪽으로 암수 가죽으로 서로 다르다고 합니다. 서로가 그리워 하여 잘 울라고 그리 만든다고 하는데...ㅎ



드뎌 우리나라 최고(最古) 목조 건물인 봉정사 극락전(極樂殿)을 만났습니다. 국보 15호, 그 앞에는 고려 중엽때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3층 석탑이 있습니다.
극락전은 보는 사람마다 여러가지 이유로 칭찬을 많이 하지만 저는 그리 보이지 않습니다. 건물 앞쪽 벽면에.. 흐유.. 완전 새로 칠해 버려... 이게 어디 800년이나 된 건물로 보여 집니까? 바로 엊그제 지은 것으로 보여지게 만들어 놓고..
이 건물이 해채보수 하기 전에는 저 벽에 희미하나마 벽화도 있었답니다. 70년대 그땐 문화재 보수 같은 의미는 그냥 깔끔하게 뜯어 고치는 거..ㅜㅜ

봉정사가 세상에 이름높은 것은 현존하는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된 집인 극락전(국보 제 15호)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 창건연대를 확실히 알고 있는 가장 나이 많은 집은 에산의 수덕사 대웅전이다. 이곳에서는 1934년 해체공사 때 1308년에 창건되었다는 기록을 발견했다. 그렇다고 이 집이 가장 오랜 건축물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1916년 해체 중수 때 묵서명(墨書銘)이 발견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1376년에 중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창건은 이보다 100년 이상 앞선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한동안 부석사 무량수전이 최고의 목조건물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1972년 9월, 봉정사 극락전을 중수하기 위해 완전 해체했을 때 중도리에 홈을 파고 '기록이 들어 있는 곳"아라는 뜻으로 '기문장처(記文藏處)'라고 표시한게 잇어서 열어 보았더니 정말로 상량문이 거기에 들어 있었다. 이 상량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 이 절은 옛날 능인대덕(能仁大德)이 신라때 창건하고.. 이후 원감(圓鑑), 안충(安忠) 등 여러 스님들에 의해 여섯차례나 중수되었으나 지붕이 새고 초석이 허물어져 1363년에 용수사(龍壽寺)의 대선사 축담(竺曇)이 와서 중수했는데 ...
이렇게 무량수전보다 13년 앞선 1363년 중수한 사실을 알려 주는데 그러나 이 사실만으로 지금 최고(古)의 건물로 지목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주된 논거는 건축양식상 고식(古式)으로 판단되는 점이 많기 때문이다.

 

봉정사 극락전의 또 다른 매력은 지붕이 높지않고 낮게 내려앉아 안정감을 줄 뿐만 아니라 아주 야무진 맛을 풍긴다는 뜻이다. 그것은 이 집의 측면관에서도 잘나타나 있지만 무엇보다도 내부에서 정확히 관찰된다. 이집은 9량집으로 되어 있으면서도 9량집 건물 가운데에 들어앉아야 할 4개의 높은 기둥[高柱] 중 앞쪽 2개를 생략하여 내부공간이 아주 넓고 시원해 보인다. 그러나 앞쪽 고주가 생략된만큼 대들보는 뒷쪽 고주로 직접 연결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높이에 차이가 있으므로 이것을 어떤 식으로든 처리하지 않으면 안되는 가구(架構)상의 문제가 생겼는데 그것을 아주 슬기롭고 멋있게 해결했다.

 

극락전 앞, 왼쪽에 자리한 고금당(古金堂). 16~17세기의 고려시대 건물로 알려져 있으며 보물 제 449호로 지정 되어 있습니다.
근데 제 눈에는 건물에 비하여 지붕이 너무 커다는 생각이 드네요. 사진을 약간 옆에서 찍게 되면 정말 이상하게 보여 집니다.

돈을 '항거' 안고 있는 돌 부처님.. 누구도 벼락맞을 짓은 하지 않는 것 같아 보기 좋습니다.

국락전과 함께 이 절의 명물인 대웅전(大雄殿). 원래 보물이었는데 국보(제311호)로 승격되었습니다.
조선 초기 건축물로 알려져 있어 이곳 봉정사는 각 시대별 건축 양식을 연구하는데도 아주 중요한 곳이라 합니다.  

대웅전 건물의 측면입니다. 이 절집에서 가장 오래 쳐다보며 머문 곳입니다. 공포(貢包.처마를 받치려고 댄 목재)가 간략한 형식으로 전형적인 초기 다포(多包.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놓이는 형식) 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런 복잡한 내용은 고건축가들이나 챙기고 제 눈에는 그저 벗겨진 단청.. 그것만이 아름답게 다가왔습니다. 이 건물도 해체보수할 무렵 이 단청을 새로 칠해 버릴까말까 많이 망설였다 하는제 정말 그냥 두길 잘 했습니다. 저기 위의 극락전은 이 건물과 비교화여 완전 실패한 개보수로 보여 지는 이치입니다.



대웅전 내부 천정입니다. 다른 곳에는 입구에 사진촬영금지라 써 붙여 놓아 승질났는데 이곳에서는 그 글귀가 안 보여 일단 한장 찍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전시회나 이런 건물내부 촬영에 너무 인색한것 같습니다. 선진국에서는 대형 박물관 등에도 후랫시만 사용하지 않으면 촬영을 허용하는 곳이 많습니다.

 

봉정사는 결코 큰절이 아니다.그러나 봉정사는 정연한 건물배치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단정하고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산사가 되었다. 봉정사는 불국사처럼 대웅전과 극락전이라는 두개의 주전(主殿)을 갖고 있고 각각의 전각이 독자적인 분위기를 장악하고 있어서 이 두 공간의 병렬적 배치가 봉정사에 다양성과 활기를 부여한다.

 

스님, 밥통 여기 걸어 놓고 어디 가셨나이까?

 

대웅전 앞 서편 마당에 있는 화엄강당(華嚴講堂). 이것도 보물(제 448호)입니다. 대웅전 처마밑 보다 낮게 만들다 보니 기둥을 짤막하게 하여 전체 구조가 가분수 형태입니다. 현재는 스님들의 공부방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눈여겨 보지 않으면 지나칠 화엄강당의 옆 기둥 모습. 가운데 기둥은 사각형, 양쪽은 둥근형. 음양의 조화로 이렇게 만들었다 합니다.

대웅전 앞 오른편 건물인 무량해회(無量海會). 단조로운듯 보이나 오른편으로 누각이 되어 있어 요즘으로 치면 반지하가 딸린 특별하게 보이는 건축물입니다.



사찰 귀퉁이에 있는 법종각. 이 절에서 가장 대접을 못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데려온 자식마냥..
우리나라 종과 외국 종의 가장 큰 차이점은?
정답 : 외국에선 안에서 치고 우리나라 종은 바깥에서 치고..

 

왼편 산기슭에 있는 산신각에도 올라가 보았습니다. 너무 호젓하여 뭔가 나타날 것 같은..  

봉정사 가람의 배치는 좀 오밀조밀하게 보여지나 한편 보면 아주 구성이 잘 짜여진 듯 합니다.
대웅전과 극란전의 구역이 완전 구분되고 자연석으로 쌓은 축대등이 조화되어 우선 보기에 정겨움이 앞서는 절로 나타나 집니다.

유홍준교수가 답사기에서 꼭 들려 보라고 권한, 본절의 오른쪽 옆 200여 m 떨어진 곳에 있는 영산암(靈山庵).
유 교수의 답사기에는 이전에 이곳에는 출입이 안 되었던 모양인데 지금은 자유로이 출입이 가능 합니다. 우화루(雨花樓)를 통하여 들어 갑니다.

봉정사 답사는 요사체 뒷쪽 산자락에 자리잡은 영산암(靈山庵)까지 다녀와야 제 맛을 알게 된다.영산암은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닳은」을 촬영한 곳으로 유명한데 암자인지 거기가 참선방인지 누가 일러주는 일도 없고, 간혹 스님의 허락을 얻지 못해 들어갈 수 없으니 여기서 지나쳐 버리는 경우가 많아 안타깝다.

 

이곳도 머리 꼿꼿이 각을 세우고 세우고 폼 잡고 들어가다가는 별(☆) 구경 할 수 있는 곳입니다.

내부가 정말 맘에 듭니다. 아주 멋진 정원을 보는 듯한..

영산암은 안에 들어가지 않고 낮은 돌담 너머로 안마당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뜻깊은 답사가 될 수 있다. 영산암은 낡고 낡은 누마루인 우화루(雨花樓) 밑으로 대문이 나 있고 안에 들어서면 서너채의 승방이 분방하게 배치되어 있다.





먼저 대웅전격인 법당으로 들어가 인사부터 올리고..

입구에서 좌측편에 자리한 송암당(松岩堂). 이곳도 처마밑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비록 단청의 색은 바래고 낡았지만 쳐다보고 있으니 그 옛 선인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 하네요. 전체 건물들이 이어져 있어 네모칸(ㅁ) 모양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제 슬슬 되돌아 갈 시간입니다. 본절 우측에 있는 입구. 만세루를 통하지 않고 돌아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만세루를 지나 되돌아 내려 갑니다. 언제 다시 와 볼까나..



이호신 화백이 그린 '천등산 봉정사'인데 가람의 구조가 바로 그대로 입니다.
위의 사진에도 소개된 '자빠질려고' 하는 소나무도 잘 묘사하여 두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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