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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별 가족의 글

詩人이자 奇人 千祥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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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이라는 새끼 

                               


                                  천상병 



우리니라 신문에서나 방송에서나 
잡지에서 
‘김일성의 독재’라고만 하지 
‘36년 독재’란 말은 아니 합니다. 
잠깐 독재라도 
호되게 당하는 판국인데 
36년이나 혼자세상이었다니 
아무리 공산국이라도 
이건 역사상 처음 일입니다. 


공산국의 독재는 흔해 빠지지만 
스탈린 소련 독재도 
30년 정도였는데 
36년이라니


요런 놈은 인간이 아니라 

새끼입니다. 


말하자면 

공산주의의 악독성을 밝히는 

포스터와 같은 짐승입니다. 


아들 정일을 후계자로 지명했다니 
요놈은 
공산주의의 원리조차 모르는 
무식하기 짝이 없는 
진시황같은 욕심쟁이입니다! 


사람이 사람 다와야 말이 통하지 
요따위 사람 탈 뒤집어 쓴 
숫 짐승하고 무슨 말 하시겠다니 
우리 전두환 대통령님께서는 
너무나 너무나 한 나이팅게일입니다











어제 막걸리 자리에서 千祥炳 시인이 김일성에 관한 詩 를 썼었다는 얘기가 나와 

이런저런 야그를 하던중 千시인에 대한 자료를 찿다 이곳에 올려도 괜찮겠다 싶은 글이 있어 옮겨봅니다. 




아래 자료는 <네이버캐스트>에서 옮겨 왔습니다.




                                                                    -  아       래  -




1967년 7월 14일 자 신문을 펴든 문학인들은 1면 톱기사로 실린 ‘동백림을 거점으로 한 북괴대남공작단 사건(동백림 사건)’의 전모와 함께 연루된 사람들의 이름이 실린 것을 보았는데, 그들은 어리둥절한 채 제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엔 뜻밖에도 시인 천상병(千祥炳, 1930.1.29~1993.4.28)의 이름이 올라 있었던 것이다.

1963년 10월 상순 일자 미상일 19시경 서울 명동 2가 유네스코 뒷골목 소재 미상 대폿집에서 강빈구와 특주 두되를 식음(食飮)하는 자리에서 강빈구로부터 자신은 동독 및 동백림 등 적성국을 왕래하였을 뿐 아니라 난수표도 받아 왔다면서 출판사를 경영하여 회색 잡지를 발간하거나 불연(不然)이면 한국에서 고생하지 말고 동독에 갈 생각이 없느냐는 등의 권유를 받고 동인(同人)이 반국가단체의 구성원으로 그 목적수행을 위하여 암약중인 간첩이란 점을 충분히 지실(知悉)하였음에도 이를 수사정보기관에 고지치 않고……

이 사건은 재불화가 이응로(李應魯), 재독작곡가 윤이상(尹伊桑), 그리고 몇몇 재독 유학생들이 동베를린(과거 동독의 수도)을 구경하고 돌아온 것을 두고 북한의 배후 조종에 따른 어마어마한 ‘간첩단’ 사건으로 확대·조작된 것이다. 중앙정보부 발표문에 따르면 천상병은 강빈구와 만난 자리에서 “동인이 간첩활동을 하고 있어 수사대상 인물임을 기화로 금품을 갈취할 목적 하에 동인에 대하여 중앙정보부에서 내사중이라고 말하여 상피의자로 하여금 공포감을 갖게” 한 뒤에 수십여 차례에 걸쳐서 “1백 원 내지 6천5백 원씩 도합 5만여 원을 갈취착복”하면서 수사기관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서울대 상대 동문이자 친구인 강빈구(姜濱口)는 동독 유학 중 동독을 방문했었다는 얘기를 천상병에게 자랑스럽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천상병은 예의 다른 문인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강빈구로부터도 막걸리 값으로 5백 원, 천 원씩 받아썼던 것이다. 그것이 순진무구하고 천진난만한 시인 천상병이 ‘국사범’으로 조작되는 사건의 실체였다. 금세 사건의 진상을 파악한 문인들은 어처구니없어 실소를 터뜨렸다. 어쨌든 천상병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3개월, 그리고 교도소에서 3개월 동안 갖은 고문과 치욕스러운 취조를 받고 난 뒤 선고유예로 풀려났다.


천상병 시인 <제공: 도서출판 답게>

“이젠 몇 년이었는가
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
당한 그날은……

이젠 몇 년이었는가 
무서운 집 뒷창가에 여름 곤충 한 마리 
땀 흘리는 나에게 악수를 청한 그날은…… 
네 살과 뼈는 알고 있다.
진실과 고통 
그 어느 쪽이 강자인가를……”

- 천상병 ‘그 날은 새’ 부분

천상병은 중앙정보부에서 “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 전기고문을 세 번씩이나 당했다. 그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정신병원에도 갔다 오고 아이도 낳을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그는 이 사실을 스무 해나 지난 뒤에 털어놓았다. ‘그날은 새’라는 시는 ‘그날’의 고통과 치욕의 경험을 간결하고 단호한 시행 속에 압축해놓고 있다.

 

“고문은 받았지만 진실과 고통은 어느 쪽이 강자인가를 나타내 주었기 때문에 나는 진실 앞에 당당히 설 수 있었던 것이다. 남들은 내가 술로 인해 몸이 망가졌다고 말하지만 잘 모르는 사람들의 추측일 뿐이다.” 그를 한번이라도 만나본 사람은 그가 ‘정상’이 아니라는 걸 금세 알 수 있다. 불편한 손놀림과 발걸음, 잿빛의 얼굴, 입가에 허옇게 달라붙은 침의 흔적,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라고 말하는 그만의 어눌하면서도 동어반복적인 화법…… 시인은 사람들이 술 때문에 그의 몸이 망가졌다고 말하지만 그건 잘못된 ‘추측’이라고 단호하게 일축한다. 고문의 후유증, 오랜 떠돌이 생활로 인한 영양실조, 지속적인 음주가 합세해서 시인의 삶을 극도의 신체적 기능 저하의 삶으로 밀어 넣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진실’을 거머쥐고 있는 강자다.


천상병은 1930년 일본 효고현 히메지에서 태어나 중학교 2학년 때까지 거주하다가 해방을 맞아 귀국한다. 마산중학교 3학년에 편입한 그는 매우 조숙한 천재의 면모를 보인다. 그의 조숙한 재능은 당시 마산중학교 국어교사이던 김춘수의 눈에 띄어 1949년 시 ‘강물’ 등을 <문예>에 발표하기도 한다. 곧 한국전쟁이 터지고 전란 초기에 미군 통역관으로 6개월 동안 근무한 그는 1951년 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입학한다. 이 무렵 그는 송영택김재섭 등과 동인지 <처녀지>를 발간하고, <문예>에 ‘나는 거부하고 저항할 것이다’라는 제목의 평론을 내놓으며 시작(詩作)과 함께 비평 활동도 겸한다. 천상병은 1952년 <문예>에 시 ‘갈매기’로 완료 추천을 받고 정식으로 문단에 나온다.

 

1954년 그는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을 그만두고 문학에 전념한다. 그는 이때 <현대문학>에 월평을 쓰는가 하면 외국 서적의 번역에 나서기도 한다. 그러다가 1964년부터 2년 동안 김현옥 부산 시장의 공보비서로 일하는데, 이것이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직장 생활인 셈이다. 1967년에 어이없게도 ‘동백림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여의 옥고를 치른 그는 죽을 때까지 다른 직업 없이 오직 시인으로 살아간다.

 

천상병 시인 <제공: 도서출판 답게>


1970년 겨울 어느 날부터인가 동가식서가숙하며 떠돌던 천상병의 모습이 갑자기 사라졌다. 명동이나 종로에서 더는 그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1971년 봄이 다 가도록 종적을 감춘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의 안부를 궁금해 하는 몇몇 문인들이 연고가 있는 부산에 연락을 넣어왔지만 거기에도 천상병은 없었다.

 

“죽지 않았을까?” 가까운 시인들은 주민등록증도 없이 이 시인이 길에서 쓰러져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천상병이 죽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예감은 움직일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참 아까운 친구였는데. 안됐어. 시집 한 권도 없이 세상을 뜨다니!”

시인 민영 등이 ‘요절시인’ 천상병의 유고시집을 묶어주기 위해 이리저리 전갈을 넣어 작품을 모으기 시작했다. 잡지에 흩어져 있는 작품 60여 편을 모았지만 시집 출간비용을 조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시인 성춘복이 그 시집을 내겠다고 선뜻 나섰다. 그래서 1971년 12월에 당시로서는 호화 장정의 천상병시집 []가 나오는데, 시집 출간 소식이 신문이며 방송 등을 통해 알려지며 장안의 화젯거리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천상병이 살아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그는 거리에서 쓰러진 채 발견돼 행려병자로 오인되어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었던 것이다. 얼마 뒤에 천상병은 백치 같은 무구한 웃음을 흘리며 다시 친구들 앞에 나타났다. 천상병은 기인답게 버젓이 살아 있으면서 첫 시집을 ‘유고시집’으로 낸 유일무이한 시인이 되었다.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터에
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날.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 천상병 ‘새’, [새] 조광출판사(1971)

새는 그의 시 세계의 중심 심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시적 자아의 대리자 또는 자유 지향성의 상징이다. 새는 삶과 죽음, 천상과 지상의 교차점을 향해 날아간다. 삶은 견디기 힘들만큼 고통스럽다. 그러자 시인은 죽은 다음날 새가 되어 돌아와 죽음과도 같은 고통 속에 있는 자신의 현존을 응시한다. 영혼이 새가 되어 다시 삶을 바라보자 그것은 홀연히 찬란한 것으로 비친다. 그렇게 시인의 초연함은 삶의 절망과 고통을 한순간에 찬란한 것으로 바꿔놓는다. 시인은 한 마리 새가 되어 죽음 쪽에서 삶을 바라보고 삶과 죽음을 동시에 노래하며 현실을 초월하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다.

 

천진무구함과 무욕으로 무장한 천상병은 생전에 자본주의적 관행과 생리에 대해 무차별적인 테러를 감행한다. 그는 시 쓰기 외에 다른 일은 하지 않았다. 그는 유유자적 떠돌며 동료 문인들과 시인 지망생들에게 술값이나 밥값 명목으로 2천 원씩을 아무 거리낌 없이 뜯어낸다. 시인은 악의없는 ‘갈취범’이었지만 그를 미워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사람들은 그를 미워하기는커녕 희귀한 문화재처럼 아끼고 사랑했다. 우리는 “세속적인 관행을 무시하며, 사회적 권위와도 무관하며, 사회의 풍습이나 통념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자기의 길을 걸어간 사람”을 기인이라고 한다. 직업 관료나 사무직 같은 시인의 무리 속에서 천상병은 군계일학으로 돋보이는 기인이며 천부적인 시인임이 틀림없다.

 

천상병이 시의 소재로 가장 많이 삼은 게 가난이다. 일정한 직업 없이 떠돌던 그에게 가난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고, 어쩌면 자연스런 일로 받아들여졌을지 모른다. 오죽하면 “가난은 내 직업”이라고까지 노래했을까.

아버지 어머니는
고향 산소에 있고

외톨배기 나는 
서울에 있고 

형과 누이들은 
부산에 있는데, 

여비가 없으니 
가지 못한다.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나는 영영 
가지도 못하나? 

생각느니, 아, 
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 천상병, ‘소릉조(小陵調) – 70년 추일(秋日)에’, [새]

여비가 없어 고향에 가지 못할 정도의 가난이라면 몹시 심한 가난일 것이다. 이 정도라면 궁핍이 시인의 몸과 마음을 틀림없이 옥죄었으련만 ‘소릉조’의 어디에도 그 흔적은 없다. 그저 가볍게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나는 저승에도 영영 못 가는 게 아닌가.” 하고 한갓진 걱정을 늘어놓고 있을 뿐이다. 이미 시인은 가난에 익숙해져서 그것에 따로 불만을 갖거나 원한을 품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길들이고, 가난이 주는 조촐한 지복을 즐긴다. 그래서 가난의 고통과 힘을 동시에 체득한 시인은 “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하고 삶의 신비에 대해 경이감을 나타낸다.

오늘 아침을 다소 행복하다고 생각는 것은, 
한 잔 커피와 갑 속의 두둑한 담배, 
해장을 하고도 버스값이 남았다는 것. 
오늘 아침을 다소 서럽다고 생각는 것은 
잔돈 몇 푼에 조금도 부족이 없어도 
내일 아침 일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난은 내 직업이지만
비쳐오는 이 햇빛에 떳떳할 수가 있는 것은 
이 햇빛에도 예금 통장은 없을 테니까.…… 
나의 과거와 미래 
사랑하는 내 아들딸들아, 
내 무덤가 무성한 풀잎으로 때론 와서 
괴로왔음 그런 대로 산 인생 여기 잠들다. 라고, 
씽씽 바람 불어라.

- 천상병 ‘나의 가난은’, [새]

평생을 가난하게 살다 갔지만 시인에겐 가난조차 비참이나 불행, 원한이나 분노의 감정이 아니라 오히려 자족하는 마음을 갖자, 조촐한 행복의 조건들이 욕심 없이 투명한 눈으로 비쳐든다. 이런 마음으로 사니, 욕심에 눈이 어두워 작은 것의 귀함과 삶의 거대함, 그리고 무상으로 주어지는 행복의 조건들을 놓치는 일은 없었다. 물질적 궁핍의 상태인 가난조차 시인의 내면에 넉넉한 낙관주의를 만들어내는 정신적인 덕성의 요소가 되었다.

 

병원에서 요양하며 몸과 마음을 추스른 시인은 1972년에 친구의 손아래 누이인 목순옥과 결혼해 가정을 꾸린다. 1979년에는 첫 시집 []에 실린 작품들을 거의 다 옮겨 실은 시선집 [주막에서]를 <민음사>에서 펴낸다. 이어 1984년에는 [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다], 1987년에는 [저승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을 내놓는다.

 

목순옥 여사와 천상병 시인 <제공: 도서출판 답게>

 

 

한 도시학자가 말한 바로는, 서울 인사동 큰길의 총 길이는 2킬로미터를 조금 넘는다고 한다. 그러나 큰길의 뒤쪽으로 굽이굽이 이어지며 뻗어나간 골목길의 총 길이는 놀랍게도 큰길의 열 곱절이 넘는다. 그 인사동의 큰길과 굽이굽이 이어지는 골목길의 켜에는 골동품이며 옛 서화와 서책을 파는 오래된 상점과 유명·무명 화가들의 그림이 상설 전시되는 화랑, 많은 찻집과 음식점 등이 빼꼭하게 들어차 있다. 인사동 큰길에서 어느 골목 어귀로 들어서면 ‘귀천’이라는 간판이 달려 있는 작은 찻집이 하나 눈에 들어온다. ‘귀천’은 천상병의 널리 알려진 시편이고, 찻집 ‘귀천’의 주인은 시인의 아내 목순옥이다. 그 찻집 벽면에는 파안대소하는 천상병 시인의 커다란 얼굴 사진이 붙어 있다(2012년 1월 현재 목순옥 여사의 조카가 운영하는 2호점만 운영되고 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천상병, ‘귀천(歸天)’, [새]

‘귀천’에서도 시인은 고통스러운 현존의 삶을 죽음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바라보고 있다. 누구보다도 비참하고 불행한 삶을 이어가며, 누구보다도 고통스러운 삶을 견딘 시인은 놀라운 관용과 초연함으로 삶을 끌어안는다. 그러자 비참과 불행으로 얼룩진 삶은 “아름다운 소풍”이 되어버린다. 이 시의 어디에도 삶의 고단함이나 죽음의 쓸쓸함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이런 것을 맑고 담백한 어조로 가볍게 건너뛰는 것이다.

나의 다소 명석한 지성과 깨끗한 영혼이 
흙 속에 묻혀 살과 같이 
문드러지고 진물이 나 삭여진다고?

야스퍼스는 
과학에게 그 자체의 의미를 물어도 
 절대로 대답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억지밖에 없는 엽전 세상에서
용케도 이때껏 살았나 싶다.
별다른 불만은 없지만, 

똥걸레 같은 지성은 썩어버려도 
이런 시를 쓰게 하는 내 영혼은 
어떻게 좀 안 될지 모르겠다. 

내가 죽은 여러 해 뒤에는 
꾹 쥔 십 원을 슬쩍 주고는 
서울길 밤버스를 내 영혼은 타고 있지 않을까?

- 천상병 ‘한 가지 소원’, [새]

천상병은 한때 초기의 서정적 스타일에서 벗어나 리얼리즘 스타일의 시를 내놓기도 한다. 금욕주의적인 초연함과 넉넉한 관용으로 세상을 끌어안던 그는 몇몇 시에서 오랫동안 감춰온 날카로운 현실 비판 감각을 드러낸다. 시인은 밤 버스를 타고 있는 서민으로서 감당해야 하는 현실을 투명하게 응시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여기서 그는 불합리하고 모순투성이인 현실을 “억지밖에 없는 엽전 세상”으로 마음껏 비하하고, 그 속에서 “용케도 이때껏 살았나 싶다.”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도 한다. 이런 것은 앞서 펼쳐보인 시 세계에서는 나타나지 않던 자세다. 무엇 때문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현실 세계에 대한 강한 불만과 대립 의식이 사그라지지 않고 거의 날것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의 현실 비판 의식은 더 강화되지 않고, 다시 도가(道家)적인 자연의 삶, 가난한 일상 속에서 접하는 자연에 관심을 보이며 높은 경지의 소박성을 추구하는 시 세계로 돌아간다. “비시적인 것과 시적인 것, 일상적 관찰과 철학적 의미, 초연한 관조와 정치적 관심, 소박한 표면과 깊은 내면을 결합하는 독특하고 뛰어난 시”들을 빚어낸 천상병은 후기로 접어들며 이전보다 한결 단순하고 소박하며 고졸한 세계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그의 시는 순수한 것의 원형인 어린아이의 심성을 지향하고, 순진성의 시학을 구현한다. 어린 것, 순진한 것, 약하고 착한 것을 내포한 동심에 대한 사랑과 선(善)지향은 천상병 시 세계의 움직일 수 없는 특징이다.

 

말기에 이르면서 천상병은 천진난만할 정도로 단순한 어조로 기독교의 신인 하느님을 예찬하는 시를 쓰기도 했다. 기독교적 세계관이 깊이 스며든 그의 유고시들은 우주를 지배하는 하느님과 그 섭리에 감사하는 내용으로 짜여 있다. 시에서 하느님은 대우주에 비견되는데, 그는 절대자를 향한 무궁한 외경심과 찬양 속에서도 어린아이처럼 “하느님은 어찌 생겼을까?” 하는 순진한 호기심을 드러낸다.


천상병 시인 <제공: 도서출판 답게>

하느님은 어찌 생겼을까? 
대우주의 정기(精氣)가 모여서 
되신 분이 아니실까 싶다. 

대우주는 넓다. 
너무나 크다.

그 큰 우주의 정기가 결합하여 
우리 하느님이 
되신 것이 아니옵니까?

- 천상병 ‘하느님은 어찌 생겼을까?’

1988년 만성 간경화증으로 춘천의료원에 입원한 시인은 의사로부터 가망이 없다는 진단을 받으나 불사조처럼 살아난다. 이후 그는 시집 [요놈 요놈 요 이쁜 놈!](1991), 동화집 [나는 할아버지다 요놈들아](1993)를 펴낸다.

 

1993년 4월 28일, 병든 몸으로 누워 있던 시인은 마침내 숨을 거둔다. 천상병이 고단한 이 세상의 소풍을 끝내고 하늘로 돌아가던 날, 의정부시립병원 영안실 밖으로는 추적추적 봄비가 내렸다. 그가 죽고 난 뒤 몇 백만 원인가 하는 조의금이 들어왔다. 시인의 가족으로는 처음 만져보는 큰돈이었다. 시인의 장모는 그걸 사람들 손이 타지 않는 곳에 감춘다고 감춘 것이 하필이면 아궁이 속이었다. 그걸 모르고 시인의 아내는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가난하지만 순진무구했던 시인이 죽어서도 ‘만악의 근원’인 돈을 없애버리려고 ‘장난’을 했는지도 모른다. 시인이 죽은 해 ‘진짜’ 유고 시집 [나 하늘로 돌아가네]가 나오고, 세 해 뒤인 1996년에는 [천상병 전집]이 간행된다.

  

  

천상병 연보

  1. no.연도내용
  2. 119301월 19일 일본 효고현 히메지에서 2남 2녀 중 차남으로 출생.
  3. 21945해방과 함께 일본에서 귀국, 마산중학교 3학년에 편입.
  4. 31949당시 마산중학교 국어교사이던 시인 김춘수 시인의 주선으로 <문예>에 시 '강물' 등을 발표(추천 시인은 유치환).
  5. 41950전란 초기 미군 통역관으로 6개월간 근무.
  6. 51951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입학. 송영택김재섭 등과 함께 동인지 <처녀지> 발간. <문예>에 평론 '나는 거부하고 저항할 것이다'를 발표.
  7. 61952<문예>에 시 '갈매기'로 추천 완료되어 정식으로 등단.
  8. 71954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수료.
  9. 81956<현대문학>에 월평 집필, 다수의 외국서적 번역.
  10. 919642년 여간 김현옥 부산 시장의 공보비서로 재직.
  11. 101967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 약 6개월간 옥고를 치름.
  12. 111970고문의 후유증과 음주생활로 인한 영양실조로 거리에서 쓰러져 행방불명.
  13. 121971행려병자로 오인되어 서울 시립 정신병원에 입원. 유고시집 [] 발간(살아있으면서 첫 시집을 '유고시집'으로 낸 유일무이한 시인이 됨).
  14. 131972친구 목순복의 손아래누이인 목순옥과 결혼.
  15. 141979시선집 [주막에서] 간행(첫 시집 [새]에 실린 작품들을 대부분 옮겨 실음).
  16. 151984시집 [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다] 간행.
  17. 161985천상병 문학선집 [구름 손짓하며는] 간행.
  18. 171987시집 [저승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간행.
  19. 181988만성 간경화증으로 춘천의료원에 입원. 가망이 없다는 진단을 받으나 불사조처럼 회생.
  20. 191990시집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 간행.
  21. 201991시집 [요놈 요놈 요 이쁜 놈!] 간행.
  22. 211993동화집 [나는 할아버지다 요놈들아] 간행.
  23. 2219934월 28일 별세
  24. 231993진정한 의미의 유고 시집 [나 하늘로 돌아가네] 간행.
  25. 241996[천상병 전집] 간행.
  26. 252007[천상병 평론] 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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