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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일기

구미 상모동 박정희대통령 생가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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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갓집 행사를 마치고 구미를 지나다가 마침 시간이 일러 상모동에 있는 박정희 대통령의 생가에 다녀 왔습니다.

몇십년전에 한번 와 봤는데 기억으로는 그때는 누추한 초가만 한채 있었던 걸로 생각되는데 지금은 새 단장을 하여 생가 건물인 초가집도 새 단장을 하였고 주변에 부속 건물이 많이 생겨져 있습니다.

 

배고픔을 모르는 요즘 시절의 아이들한테 아무리 옛날 얘기를 해 봐야 뜬구름같은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불과 40~50년전만 하여도 우리 세대를 비롯한 그 이전의 세대들은 지지리도 못 살고 배고픈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걸 해결해 준 분으로 박정희대통령을 지목하는데 주저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변하여 이제는 박정희를 보는 시각을 그때의 배고픔 해결과 산업근대화를 이룬 공적은 뒤로 밀리고 독재자나 비판적인 내용만으로 평가를 하는 일부의 시각을 볼때 안타까운 점이 참 많기도 합니다. 그때 그 시절을 겪어 본 분들이라면 아마도 쉽사리 그러지 않겠지만...

 

'요즘 참 좋은 세상이다.'고 많이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내 생각을 맘대로 적고 어디다 내 뱉어도 그리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인데, 재 생각으로는 아마도 박정희 대통령이 그때 집권하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나라는 '참 좋은 세상이다.'라고 이야기 하기 힘들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암튼 누구는 어떻게 생각하던 말든..

마침 구미에서 시간이 좀 나서 오래 전의 방문기억을 떠 올리며 다시 한번 박정희 대통령의 생가를 찾았습니다.

요즘 구미는 거대한 산업기지로 탈바꿈하여 도시 전체가 엄청나게 크졌습니다. 이전에는 구미와는 외진 자리에 자리했던 상모라는 마을이 이제는 구미의 중심지에 가깝게 되이져 있네요. 

 

생가건물은 그리 넓지 않습니다. 박정희대통령이 1917년 태어나서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할때까지 살았던 집이라 하는데 아주 조그만 초가 한채가 생가의 전부입니다. 나머지는 부속건물과 전시관 등이구요.

 

 

 

 

 

 

사생관이 뚜렷했던 박대통령 인생 주관의 핵심은 애국심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인생의 모토로 늘 생각하였을 '내 인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라는 글귀가 새겨진 비석이 입구에 서 있습니다.

 

 

 

생가로 올라가는 입구입니다.

 

 

 

초가집으로 된 생가 건물의 뒷벽이 보여지고 그 앞 마당에는 박정희대통령과 육영수여사의 실물크기사진이 있습니다.

곁에서 같이 찍을 기념사진용도 같습니다.

오래 전 생가건물은 너무 낡고 부실해서 재로 보수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방 내부에는 별다른 장식물이 없고 옛날 공부하던 앉은뱅이 책상이 하나 놓여 있습니다.

 

 

 

다른 전시관에서 본 어느 화백이 그린 그림입니다.

이게 옛날의 생가 모습입니다.

 

 

 

생가 건물 옆에 있는 추모관입니다.

두분의 영정이 모셔져 있고 그 옆으로 생화로 만든 꽃바구니가 놓여져 있습니다.

내부에는 향내가 가득하구요.

 

 

 

 

 

 

 

양켠 벽에는 두 분의 생전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네요.

왼편사진은 성나자로병원을 방문하여 후원금을 전달하는 사진이고 오른편은 헌혈을 하는 장면입니다.

육여사는 헌혈을 자주 하였다고 하네요.

 

 

 

 

 

 

 

1970년 4월 1일 포항종합제철기공식

그 옆에 박태준사장도 보여지네요.

 

이때 박대통령이 한 치사가 명연설로 기억되는데 옮겨 놓습니다.

 

 

박태준 사장 이하 회사 간부, 종업원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오신 내외 귀빈 여러분!


우리는 지금 공업국가 건설을 위해서 전역량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공업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요소가 갖추어져야 되겠고, 또 우리들이 해야 할 일들이 많겠지만 특히 선행되어야 될 몇 가지 기간산업이 있는 것입니다. 즉, 오늘 이 자리에서 기공식을 보게 되는 철강공업이라든지 또는 시멘트공업, 석유공업, 전력의 개발, 석탄, 비료 등 근간이 되는 중요한 산업들을 우선해서 개발해야만 공업이 발달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다 잘 알고 있는 상식입니다.

그 중에서도 기계공업, 조선공업, 자동차공업 등을 육성함에 있어서, 또한 모든 건설사업을 촉진함에 있어서, 철강 공업은 가장 근간이 되는 산업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가 시도하고 있는 군수산업을 육성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철강공업을 우선적으로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부는 지난 1962년부터 8,9년 동안 꾸준히 종합제철공장 건설을 추진해 왔습니다.

그러나, 철강공업이라는 것은 워낙 자금이 방대하게 드는 것이고 또 기술이 뒤따라야 되며, 이러한 문제가 해결된다 하더라도 이 제철공장에서 나오는 철강재의 생산 원가가 국제 시가와 맞먹을 수 있도록 저렴하게 생산되어야만, 이에 뒤따르는 여러가지 연관 산업의 제품들을 싼값으로 만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어려운 문제점이 있기 때문에 그간 정부는 미국의 저명한 회사들과 직접 교섭을 해 봤고, 이것이 잘 되지 않아서 독일의 ‘데마그’라든지 기타 큰 기업체들과 교섭도 해 봤으나, 역시 여의치 않았기 때문에, 다음에는 ‘ECOCK’, 즉 대한경제협의체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나라들과 교섭을 해서 상당한 정도까지 추진되어 오다가, 이것 또한 여러가지 문제점이 있어서 결국은 작년도에 일본측과의 교섭에서 최종적으로 합의를 보는 등 여러 고비를 넘겨 종합제철공장을 건설하게끔 되었던 것입니다.

이 공장은 앞으로 내외자를 합쳐서 약 2억 2천백만불,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약 670억원 정도의 투자를 하게 되고 앞으로 3년간의 건설 기간을 소요로 하여, 모든 것이 순조롭게 추진되면 73년 여름에 거서는 약100만톤 규모의 제철 공장을 완성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 공장이 완공된 다음에도 우리는 앞으로 계속해서 2백만톤, 3백만톤 규모로 시설을 확장해 나가지 않으면 국내 수요를 충족할 수 없을 것으로 내다봅니다.


내가 지금 추측하기로는 우리나라의 공업이 발정해 나가는 추세를 보아서, 우리나라에서도 1970년대 후반기쯤 가서는 약 1,000만톤 정도의 철강재 생산 능력을 가져야 될 것이고, 또 그러한 공장들이 계속 건설돼 나가야 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느 책에서 본 바로는 2차대전이 시작되기 전의 일본의 철강재 생산 능력은 불과 300여만톤밖에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들은 9천만톤의 철강재 생산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불원 1억톤을 돌파할 세계 2위 내지 3위 정도의 대철강재 생산 국가로 성장할 것입니다.
우리도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았으니 서둘러서 이 철강재 공업을 빨리 육성해야 되겠고, 그렇게 함으로써 기계공업, 조선공업, 자동차공업 기타 국내 건설산업, 또한 군수산업 등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게 되어야 하겠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공장 건설을 위한 여러가지 대외적인 교섭이나 절충을 위해서 오랜 시일을 소요했기 때문에, 최종적인 확정이 늦어지고 오늘에야 비로서 공장의 기공을 보게 되었지만, 정부로서는 벌써 67년도 여기에 따르는 지원 시설 사업을 추진해 왔습니다. 여러분들이 보시는 바와 같이, 방대한 항만 시설이라든지, 먼 거리에서 이 공장 지대가지 공업용수를 끌어오기 위한 댐 건설과 송수 시설이라든지, 또는 여기로 들어오는 인입선 철도, 기타 300만평 가까운 공장 부지의 조성 등 여러가지 사업을 그동안 남이 모르는 사이에 추진해서, 오늘 정도의 진전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밖에도, 이 본공장 외에 연관 산업 공장들을 건설하기 위해서 약 100여만평의 부지를 조성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앞으로, 이런 모든 시설들이 예정대로 순조롭게 진행되면, 이 포항 지대는 우리나라의 울산과 맞먹을 수 있는 공업의 일대 중심지가 될 것이고, 특히 여기 새로이 건설하고 있는 항만 시설을 장차 연간 1,000만톤 이상의 하역 능력을 가진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항구가 되리라고 내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여러가지 어려운 문제, 즉 대외적인 교섭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토지를 매상하는 문제, 또는 이 지역에 거주하던 주민들을 다른 데로 이주시키는 문제, 항만 건설을 위한 여러가지 기술적인 무제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와 애로점이 많았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장 이하 회사 간부, 기술자, 종업원 여러분들이 꾸준히 노력으로 오늘 벌써 이와 같은 여러가지 기초 지원 시설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동안 여러분들의 노고에 대해서 다시 한번 치하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본격적인 공장 건설을 시작하는 여러분들에게는 지금까지 했던 것보다 더 어렵고 더 중요한 일들이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됩니다.


사장 이하 전사원들이 일치단결해서 우리 민족의 하나의 역사적 사업이 될 수 있는 이 포항종합제철 공장을 여러분들 손으로 완공한다는 긍지와 보람을 느끼고 이 공장을 훌륭한 공장으로 건설해 주기를 부탁해 마지 않습니다. 특히, 오늘 이 자리를 빌어 그동안 이 공장 건설에 대해서 여러가지 협조를 많이 해 주신 이 지방 주민 여러분과 또 도지사, 시장, 군수 등 유관 기관의 여러분의 노고에 대해서도 아울러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앞으로도 이 공장이 예정대로 준공이 되자면 이 공사를 담당하고 있는 회사 당국은 물론이거니와, 현지 주민 또는 기관, 도 여기 주둔하는 해병 사단 기타 모든 사람들이 힘을 합쳐서 협력을 해 주어야만 될 줄 압니다.
물론 정부로서도 이 공장은 가장 관심이 많고 또 우리가 역점을 들인 사업이기 때문에, 최대한의 지원을 하겠다는 것을 다짐하는 바입니다.
감사합니다.

 

 

 

농민들이 기뻐하는 걸 가장 좋아 했다고 하는데 막걸리를 즐겨 마신 분이시지요.

 

 

 

박정희 대통령이사용하였다는 우물펌프

 

 

 

생가 건물 아래쪽에는 중흥역사관이라는 건물이 새로 마련되어 있었는데 잠시 들려 봤습니다.

 

 

 

입구에는 최첨단 홀로그램으로 만들어진 박정희대통령의 초상화가 있는데 어느 방향에서 봐도 같은 모습입니다.

 

 

 

대형 모자이크 사진이 전시되어 있는 방 안에 어느 여학생이 스마트폰에 집중하고 있네요.

이곳에는 젊은이들도 많이 찾아 오는데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참 궁금합니다.

 

 

 

박정희대통령의 친필 휘호들이 많이 걸려져 있는데 그 중 맘에 딱 드는 것이 요것입니다.

 

 

 

 

 

 

 

 

 

 

 

집권시 사용하였던 집무실의 집기들이 옮겨져 있습니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60년대 70년데 우리네 시골마을을 송두리채 바꿔 놓은 깃발.

조금 아쉬운 것이 있다면 정겨운 흙담들이 모두 부로꼬벽돌로 바꿔진 것.

그리고 지금은 석면이 들어있다하여 근방에도 가지 않는 슬레트로 만든 그때의 지붕 조각으로 불판을 하여 괴기를 신나게 구워 먹었다는 ...

 

 

 

박대통령이 직접 작성한 새마을 운동에 관한 내용들

 

 

 

박정희 ..하면 떠 오르는 서독 파견 광부와 간호사 이야기.

 

 

대강의 이야기를 웹에서 빌려와 옮겨 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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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4년 12월10일 박정희대통령 내외는 서독의 수도 본에서 자동차로 한시간 남짓 떨어진 함보른 광산으로 출발했다.

박대통령과 뤼브케 서독대통령이 한 차에 타고, 육영수여사는 뤼브케대통령 부인과 바로 뒤차에 탔다.

 

오전 10시40분, 박대통령과 뤼브케대통령이 탄 차가 탄광회사 본관 앞에 도착했다.

박대통령내외가 방문한다는 소식에 광부들은 양복 정장, 간호사들은 색동 저고리를 입고 좌우에 줄을 서서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광산 악대가 주악을 올리는 가운데 박대통령은 기다리고 있던 광부, 간호사들과 손을 잡았다.

 

"근무 중 이상 무"

 

"각하, 안녕하십니까!"

 

광부들 대부분이 군에 다녀왔기 때문일까?

광부들은 군기가 잔뜩 든 군인들처럼 거수경례를 하며 큰 소리로 인사를 했다.

박대통령도 거수경례를 하며 그들의 인사에 답하고 악수를 나눴다.

박대통령보다 10m쯤 뒤떨어져서 걷던 육영수여사는 간호사들에게 일일이 말을 건넸다.

육여사가

"고향이..."

하고 묻자 간호사들은 울기 시작했다.

 

"가족들에게서는 연락이 잘 옵니까?"

"일은 고달프지 않습니까?"

 

육여사가 세번째 간호사와 악수를 하면서

"고향이..." 아마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향"이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그 간호사는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것이 신호가 돼서 간호사, 광부 할 것 없이 울기 시작했다.

음악을 연주하던 광산 악대도 꺽꺽거리며 울었다.

벌써 행사장인 강당 중간쯤에 가 있던 박대통령도 뒤를 돌아보며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간호사들에게 둘러싸인 육여사는 몸을 가누지 못한 채 주저 앉으려 했다.

주위에서 간신히 육여사를 부축했다.

사진을 찍던 사진기자들도 카메라를 내려 놓고 함께 울었다.

취재기자들도 주저 앉아 통곡했다.

독일인 광산회사 사장도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10분이상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박대통령 내외는 단상에 올랐다.

광부들로 구성된 악대가 애국가를 연주했다.

박대통령의 선창으로 시작된 애국가는 뒤로 갈수록 제대로 이어지지를 못했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애국가가 후렴으로 넘어가는 대목에서 합창은 흐느낌으로 변했다.

마지막 소절인 "대한 사람 대한으로"에 이르러서는 가사가 들리지 않았다.

 

함보른 광산회사 테드 호르스트 영업부장이 환영사를 읽었다.

그는 "한 나라 국가원수가 이 곳을 찾아 준 이 역사적 순간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라며 한국인 광부들의 근면함과 규율을 칭찬했다.

 

박대통령, "후손을 위해 번영의 터전이라도 닦읍시다"

그의 차분한 환영사로 식장의 분위기가 겨우 진정됐다.

박대통령이 연단으로 올라갔다.

박대통령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코를 푼 다음 연설을 시작했다.

 

"여러분, 만리타향에서 이렇게 상봉하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조국을 떠나 이역만리 남의 나라 땅 밑에서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서독 정부의 초정으로 여러 나라 사람들이 이곳에 와 일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한국 사람들이 제일 잘하고 있다고 칭찬을 받고 있음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다시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박대통령은 원고를 덮어 버렸다.

자신의 마음에 떠오르는 이야기를 전하기 시작했다.

 

"광원 여러분, 간호원 여러분, 모국의 가족이나 고향 땅 생각에 괴로움이 많을 줄 생각되지만, 개개인이 무엇 때문에 이 먼 이국에 찾아왔던가를 명심하여 조국의 명예를 걸고 열심히 일합시다.

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을 위해 남들과 같은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닦아 놓읍시다"

 

흐느낌 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박대통령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다가 결국 울고 말았다.

강당안은 눈물 바다가 되고 말았다.

 

박대통령은 광부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고 파고다 담배 500갑을 선물로 전했다.

30분 예정으로 광산에 들렀지만, 광산에서 행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는 데만 한 시간이 걸렸다.

박대통령은 곧바로 발길을 돌릴 수 없었다.

강당 밖으로 나온 대통령 일행은 광부들 숙소를 돌아 봤다.

 

우리 광부들의 얼굴과 팔, 다리 등에는 상처투성이였다.

채탄 작업중 부러진 드릴이 튀어 오르는 바람에 입은 상처들이었다.

"지하 1000M 아래에서 채탄작업을 하고 나서 갱위로 올라와 한 잔 마시는 것이 즐거움이지만, 한국인 광부들은 그 돈도 아껴 본국으로 송금한다"는 얘기를 박대통령은 들었다.

 

광부 대표 유계천씨는 탄가루묻은 손을 내밀며 "이국 땅에서 대통령 내외분을 뵈니 친부모를 만난 것처럼 기쁘다"면서 계약기간 만료 후에도 독일에 남아 일할 수 있게 주선해줄 것을 요청했다.

 

박대통령 내외가 함보른광산을 떠나려는데 한국인 광부들이 다시 몰려들었다.

갓 막장에서 나와 검은 탄가루를 뒤집어 쓴 작업복 차림의 광부들이 많았다.

그들은 박대통령에게 손을 내밀었다.

 

"각하, 손 한번 쥐게 해 주세요"

 

박대통령 일행을 태운 차는 한국인 광부들에게 가로막혀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차 안의 박대통령은 계속 울고 있었다.

옆 자리에 앉았던 뤼브게 서독 대통령은 "울지 마세요. 우리가 도와줄 테니 울지 마세요"라며 박대통령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본의 숙소에 도착한 박대통령 내외는 한국일보의 정광모기자를 방으로 불렀다.

박대통령과 육여사는 하도 울어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정기자가 "울지 마세요. 저녁에 파티가 있는데 울면 어떻게 합니까."라며 내외를 위로했다.

 

그러자 박대통령 내외는 정기자를 붙들고 펑펑 눈물을 쏟았다.

한참만에 눈물을 그친 박대통령은 정기자에게 두가지 다짐을 했다.

"기왕에 정해진 동남아 순방만 마치고 나면, 우리 국민들이 밥술깨나 들게될 때까지는 외국에는 나가지 않겠다"

"우리 국민들이 밥이라도 제대로 먹게 만들어야겠다"

 

통역관으로 박대통령을 수행했던 백영훈(전 국회의원)씨는 "그때 박대통령이 광부,간호사들과 함께 흘린 눈물이 조국근대화의 시발점이었다"고 했다.

 

조선일보 기자로 당시 박대통령을 수행했던 이자헌(전 체신부장관)기자는 그날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으며, 1964년 12월11일자 조선일보 1면에 쓴 기사의 제목은
'후손위해 번영의 터전을-모두 눈물 적시며 감격의 한때"였다.

 

"눈물바다였어요. 간호사들이 육여사를 붙들고 울고, 육여사가 통곡을 했어요.

취재하던 기자들도 울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날의 일은 내 인생에서 아주 충격적인 사건으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함보른 광산에서 박대통령 내외를 만난 광부와 간호사들은 조국의 처참한 가난이 서러워서, 돈을 벌러 이역만리에서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자신들의 처지가 서러워 눈물울 흘렸다.

 

1963년부터 1977년까지 79,000여명의 광부와 10,000여명의 간호사들이 독일로 파송됐다.

수십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선발된 광부들 가운데는 상당수의 대학졸업자들이 포함돼 있었다.

정광모씨는 "당시 독일에 간 광부들 가운데 진짜 광부 출신은 소수였고, 공과대학 등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면서 "첫번째로 나가는 사람들이 잘해야 앞으로도 계속 광부들을 내보낼 수 있다"고 해서 '배운 사람들'을 이력서 위조해서 광부라고 내보냈다"고 했다.

 

1962년10월 한국이 서독으로부터 최초로 들여온 1억5000만 마르크의 차관은 바로 이들 광부와 간호사들의 급여를 담보로 들여온 것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독일 정부 차관은 우리나라에 대한 공공차관이 중단된 1982년까지 총 5억9000만 마르크에 이르렀다.

 

 

 

 

 

 

중흥관 담에는 한겨울인데도 아직 감나무의 붉은 감이 빨갛게 매달려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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