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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일기

가장 아름다운 절 부석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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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 홀로 종주를 계획하고 나섰다가 갑자기 쏫아져 내리는 비로 인하여 포기하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인 부석사를 둘러 보는 것으로 하루를 보냈다. 이곳은 아주 오래 전 아이들이 어릴때 몇 번 데리고 와서 재미있는 선묘낭자의 설화를 들려주며 둘러본 곳 이었고 그 뒤 간혹 산행길 말미의 여유시간에 들려지는 곳이다.
혹 이번 방학때 아이들을 데리고 고적 답사를 계획 하셨다면 반드시 이곳 부석사를 들려 보시길 권하고 싶다.

 

아래 글은 아이들을 데리고 부석사를 둘러 볼때 재미있게 느껴지도록 쉬운 내용으로 엮어 보았다.

때는 지금부터 1300여년 전인 서기 650년. 여기는 신라..

후세에 의상대사라 하였던 출가승 의상의 나이는 26살이고 원효의 나이는 34살이었다.
둘이는 나이가 8살이나 차이가 나지만 친구 사이였다.

 

둘이서 중국 당나라 고승에게 불교 학술인 유식학(唯識學)을 배우기 위하여 유학을 가기로 작정하고 압록강을 건너 요동지방, 지금으로 치면 심양을 중심으로 한 압록강 건너 지방에 도달하여 당나라로 들어 갈려는 찰나 고구려 국경 수비대에게 잡혔다..
한마디로 스파이로 오인 받았던 것이다. 이들은 수십 일간 온갖 고초를 당하고야 겨우 스파이의 누명에서 풀려나 돌아오게 되었다.


이리하여 첫번째 당나라 유학은 실패하고 두번째 유학을 도모한것이 그로부터 11년뒤 661년, 나이도 훌쩍 더 먹은 뒤였다.
첫번째 육로길에서 잡혀서 고생한 것을 경험으로 이번에는 뱃편을 이용하기로 둘이서 계획하고 원효와 함께 배를 타기 위해 당주계,지금의 경기도 남양으로 출발하였다.

 

가는길 중간의 어떤 산중에서 갑자기 큰 비를 만나 조그만 움막에서 자게 되었는데 원효가 잠결에 목이 말라 머릿맡의 어떤 바가지에 들어 있는 물을 맛있게 마시고 다시 곤하게 자고 나서 이튿날 보니 그것이 해골에 담긴 물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잔 곳이 움막이었다고 생각하였는데 깨어나서 보니 그곳은 무덤 옆이었다.

 

비는 계속 내려 다음날도 출발을 못하고 다시 어느 빈집에 들었는데 원효는 귀신이 나올것만 같아서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전날 밤은 해골에 담긴 물을 먹고서도 단잠을 잤는데 이밤은 왜 이런 것일까?' 라는 것에 고민하다가 갑자기 원효는 무릅을 쳤다.

모든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유심(唯心)의 이치를 깨닿았던 것이다.


의상을 불러 나는 도(道) 다 텃고 당나라까지 가서 배울것이 없어니 혼자 다녀오라고 이러고 그 길로 원효는 돌아 와 버렸다.
이후 원효는 신라로 돌아와 일반 서민들에게 불법을 설파하고 이후 과부였던 요석공주와 연애를 하여 설총을 낳았다. 뒤에 설총은 한자의 음과 훈을 표기하여 만든 글자인 이두를 만든 이다.


다시 이야기를 의상으로 맞춰 나가면,

원효와 헤어진 의상은 모진 고생끝에 배를 타고 양주,즉 지금의 강소성 양주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양주(揚州)의 경찰서장(州將) 집에 머물게 되었다. 그 집에는 선묘(善妙)라는 딸이 있었는데 이 아가씨가 의상의 뛰어난 용모에 한눈에 뿅 반해 버린 것이다. 여기서 부터 신묘의 애틋한 러브스토리는 바다 건너 부석사까지 이어지게 된다.
한편 의상은 결심한 공부를 하기 위하여 선묘낭자의 애절한 구애를 뿌리치고 종남산에 있는 지엄스님을 찾아가 이때 부터 그 유명한 화엄경을 배우게 된다.

 

그 뒤 스승 지엄이 죽고 다시 몇년 뒤 670년 공부를 마친 의상은 급하게 귀국을 하게 되었는데 돌아오기 전에 신세를 졌던 양주의 경찰서장 집에 들리니 그때까지 의상을 못잊어 사모하고 있었던 선묘낭자는 그를 그다리고 있었다.

인사를 하고 그 집을 나와 고국에 가는 배를 타고 떠나고 있는데 뒤늦게 의상이 떠난 줄을 안 선묘낭자가 황급히 보따리를 싸서 의상을 따라가고자 하였으나 이미 배는 떠난 뒤였고...

 

선묘는 그리는 님의 무사 귀환을 돕게 해 달라며 용이 되기를 원하면서 바다에 몸을 던졌다.
이후 의상이 돌아 오는 배가 풍랑을 만나 위험해질 때마다 선묘낭자의 용이 배 밑전을 부축하여 무사히 도착하였다 한다.

이때 부랴부랴 의상이 귀국하게 된 동기는 당고종이 신라 침공을 계획하고 내려오고 잇었기 때문이다. 이에 귀국 후 바로 문무왕을 찾아 당나라 침공을 알리고 나서 그 뒤 그는 적극적인 교화 활동을 펼치며 우리나라 제 1의 관음 성지인 낙산사를 창건하였다.


그 뒤 의상은 천하의 불사를 도모할 명당 자리를 찾아 전국을 헤매던 중 지금의 부석사가 있는 봉황산에 도달하였으나 이때 이 산에는 도적이 500명이나 들끌고 있었는데 의상은 이것이 마음에 걸려 절을 짓기를 포기하려는데 언제나 의상을 따라 다니며 돌보던 선묘낭자의 용이 하늘에서 보고 커다란 바위로 변신하여 도적들 위에서 떨어지는 시늉을 하였다. 이에 놀란 도적들이 혼비백산 달아나자 의상대사는 고마움을 표시하며 '용이 바위로 변하여서 절을 지을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해서 절 이름을 부석사(浮石寺)라 하였다. 이 바위는 지금도 부석사 좌측 뒷편에 자리하고 있다.


이렇게 한국 화엄종(華嚴宗)의 근본도량(根本道場)인 부석사를 의상이 창건한 것은 서기 676년(신라 문무왕 16)이었고 이후 340년 뒤 1016년 고려 현종때 원융국사가 무량수전을 지은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목조건물(봉정사의 극락전이 더 오래된 것으로 얼마전에 판명되었지만 아직도 우리는 이렇게 부른다)이다.

부석사 경내에는 무량수전(국보 18)·조사당(국보 19)·소조여래좌상(塑造如來坐像:국보 45)·조사당 벽화(국보 46)·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17) 등의 국보와 3층석탑·석조여래좌상·당간지주(幢竿支柱) 등의 보물, 원융국사비·불사리탑 등의 지방문화재를 비롯하여 삼성각(三聖閣)·취현암(醉玄庵)·범종루(梵鐘樓)·안양문(安養門)·응향각(凝香閣) 등 많은 문화재가 있으며 또 신라 때부터 쌓은 것으로 믿어지는 대석단(大石壇)이 있다.


대개의 절에는 입구에 가장 먼저 일주문이 있고 그 다음 천왕문이 있다. 여기엔 4대 천왕이 두눈을 부릅뜨고 지키고 있다.
절내 모든것과 절을 찾는 이를 수호하는 신이다.
부석사 천왕문에서 시작하여 맨 위에 있는 무량수전까지 오를려면 총 108개의 계단을 올라야 한다.
108이라는 숫자는 중생들이 가지는 번뇌의 갯수를 뜻하는 것이자 절에서는 마음을 비우는 수행 108가지를 뜻하기도 한다.

부석사를 이야기 할때 꼭 등장하는 단어가 9품만다라(九品曼茶羅)이다.
9품만다라는 것은 관무량수경에 나오는 극락 세계에 이르는 방법으로 하품하생(下品下生)에서 중품중생(中品中生) 상품상생(上品上生)에 이르기까지 아홉 가지 단계를 행실과 공력으로 지극하게 수행하면 극락세계에 환생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이 9품만다라를 형상화시켜 만든 절이 부석사이다.
부석사 천왕문 입구에서 무량수전까지는 총 9곳의 계단이 있는데 이를 다시 3곳씩 묶어서 상,중,하로 나눈다. 즉 천왕문에서 요사채 마당까지를 하품단,이곳에서 범종루까지를 중품단, 그리고 마지막 안양루밑에까지를 상품단으로 나눈것이다.


이 모든 계단을 다 지나 맨 마지막에 도착하는 곳이 바로 무량수전인데 이곳은 화엄종의 도량임에도 불구하고 본전인 무량수전에는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셨고, 무량수전 앞에 안양문(安養門)을 세웠으니 안양(安養)은 곧 극락(極樂)을 일컬음이니 부석사는 바로 땅 위에 극락세계를 옮겨 놓았다는 말이다.

그러니 기나긴 계단을 밟으며 오른다는 것은 극락정토에 다가간다는 말이니 오르면서 스스로를 수행하고 깨닳음을 얻어 고행의 계단을 다 오르면 바로 아미타부처가 있는 도화가 만발한 무량수전 즉 극락인것이다.


아이들한테 두가는 다음과 같이 재미있게 풀이하여 주었다.

계단은 누구나 올라가기 힘드는 곳인데 저기 맨 위가 아무 고생도 없이 편히 살수 있는 천국이고 부모 말씀 잘 듣고 착하게 잘 커서 휼륭한 어른이 되어 다음에 죽어면 저기 위의 상품단에서 부터 오르게 하여 극락에 쉽게 갈수 있게 하여 주고, 그 보다 조금 못하게 살다 죽어면 중품단에 떨어뜨려 약간의 고생을 시키고, 나머지 나쁜일은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크게 착한 일도 많이 하지 않은 사람은 하품단에서 고생을 많이 하며 계단을 오르게 한다.

그 외 나쁜 일 하고 죄 짓고 살다 죽어면 천국에 들어 갈려고 여기를 와도 앞쪽의 천왕문에서 천왕들이 눈을 부릅뜨고 지키고서 내어 쫒아 모두 지옥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비가 부슬 부슬 내려 무량수전 위의 삼층석탑에서 내려다 보는 장쾌한 소백산맥(유홍준 교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는 이 부분이 자꾸 태백산맥으로 나오는데 분명히 소백산맥이다. 물론 지금은 일제가 만든 산맥의 개념을 없애고 있지만..)의 자락은 구경할수 없었지만 천년 세월을 이겨내어 온 배흘림기둥에 나도 기대어서 최순우교수의 표현을 빌려 사무치는 고마움, 그보다 사무치는 그리움 같은 것을 손바닥에 묻혀 부러 기둥을 툭툭 쳐 보고 돌아서 내려 왔다...... 

 


소백산 초암사 입구에는 순흥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묵밥으로 유명한 곳이다 .
깔끔하게 한상 차려서 5000원.. 시원한 막걸리 한사발과 하면 정말 맛있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에도 포함된 부석사 입구로 올라가는 길의 사과 나무들..
풋사과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

부석사 일주문. 소백산 자락의 부석사가 분명한데도 태백산이라 한것은 소백자락이 태백에서
흘러 나왔고 장엄한 화엄의 도리가 태백을 닮았다 하여 붙여 놓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천왕문, 여기서 부터 경내가 되는 것이다. 4대 천왕이 눈을 부릅뜨고 지키는 곳.



천왕문을 지나 높은 계단을 오르면 정면에 보이는 누각이 범종각이다.



탑 뒤로 보이는 이층 누각이 범종루이고 그 뒤가 안양루, 맨 위로 지붕이 보이는 것이 무량수전이다.

범종각의 편액 봉황산 부석사라고 되어 있다. 봉황산은 이곳 부석사에서
한시간 조금 더 오르면 정상에 도달할수 있다.



범종각 왼편에 자리한 종각이다. 현판은 범종각으로 되어 있다.

범종각의 아래층 기둥들..



정토극락의 입구인 안양루, 부석사란 현판이 걸려 있다... 뒤로 보이는 것이 무량수전.

안양루 1층 누각밑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오르면 국보17호인 석등이 먼저 맞는다.

국보18호 무량수전



부석사란 이름의 출처이자 선묘낭자의 설화가 있는 부석바위

무량수전의 아미타 부처



선묘낭자의 위패를 모신 선묘각과 아래는 선묘낭자의 초상





무량수전 뒷편의 모습, 배흘림 기둥의 자태가 유난히 돋보인다.







석등 사이로 무량수전의 편액이 희미하게 보인다. 고려 공민왕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휴일이라 아이들을 데리고 온 가족들이 많았다. 다정하게 사진을 찍고 있는 여느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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