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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일기

지리산 빗점골에서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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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들이 떨어지는 이맘때까지 부러 기다렸다가 지리산 빗점골을 찾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남자 이현상을 만나려고, 

그리고, 이 산의 능선과 골에서 이리떼처럼 지냈던 파르티잔들의 발자국을 따라가 보고 싶었답니다.

이념이 지배하는 정신이 과연 어떠했길래 현실적인 처절함을 이겨내면서 이 산속에서 그토록 저항했을까?

그것도 한번 생각해보기로 했답니다.

 

남부군 총사령관이었던 이현상.

그가 마지막으로 머물며 저항했던 곳이 빗점골입니다.

흔히 빨치산이라고 하는 그들이 하룻밤새 이 능선을 오르고 또 내려 다른 능선을 거쳐 타고 다녔던 그 지리산은 이제 말없이 침묵하고 있네요.

 

빗점골에서 절골을 따라 주능선까지 오르고 연화천대피소 못 미쳐 좌측 명선봉으로 붙어서 하산은 명선남릉을 타고 내려왔습니다.

이곳은 모두 금줄지역입니다.

눈과 낙엽이 발걸음을 아주 힘들게 했답니다.

그때 그 젊은이들이 빨치산이란 이름으로 쫒기며 다닌 지리 능선과 골짜기에서 잠시나마 고통을 나눠 봤네요.

늦가을 이파리들이 하나씩 떨어지고 있었답니다.

 

 

산행지 : 지리산

일 시 : 2021년 11월 16일 (혼자)

산행 코스 : 삼정마을 - 빗점골 - 절골 - 명선봉 - 명선남릉 - 삼정마을(원점회귀)

소요 시간 : 7시간

개고생 강도 : ★★★★★(계절 탓)

 

 

※ 내용 중에는 이태의 자전적소설 남부군에서 인용한 내용이 많습니다.

그 외 다른 곳에서 인용하여 붙인 내용도 있구요.

 

 

2만여 명의 빨치산과 7천여 명의 군경이 죽고, 그리고 수없이, 이유 없이 학살되었던 불쌍한 양민들..

그 원혼들의 시대에 전해주는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불과 수십 년 전만 하여도 금기어였던 빨치산, 빨갱이.. 라는 말.

그 단어와 우리 역사는 참으로 기구하게 얽혀 있네요.

 

 

대구에서 새벽에 출발하여 화엄사 IC에서 내려 화개장터 방향으로 달리는데 섬진강의 안개로 전방 50m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조금 일찍 산에 오를려던 계획이 차질이 생기네요.

 

 

쌍계사 방향으로 좌회전을 하여 화개천변에 주욱 늘어선 밥집 중에서 일찍 문을 연 식당에 들려 재첩정식을 시켰습니다.

국물도 진하고 찬도 맛나서 주인 할머니께 칭찬을 드리니 아주 좋아 하셨네요.

벽에 아이 사진이 있길래 누구냐고 물으니 아들이 결혼하여 13년만에 얻은 손자라고 합니다.

이때부터 시작되는 할머니의 이야기..

30여분을 이야기 주고 받다가 아차.. 산행. 하면서 나왔네요.

이현상과 주고받을 막걸리 한병 얻어서...

 

 

쌍계사 지나고 만나는 의신마을은 추억이 많은 곳입니다.

그곳 연우펜션 주인장이 기억 많이 나네요.

 

 

 

 

 

의산마을에서 한참을 더 올라 만나는 하늘 아래 첫동네인 삼정마을.

그리고 금줄.

그곳으로 스며들어 갑니다.

 

 

임도를 따라 한참을 진행하면 우측으로 벽소령으로 오르는 작전도로와 갈라지고 조금 더 직진하면 절골과 산태골이 만나는 합수내입니다.

그곳에서 오른편 절골을 끝까지 따라 오르면 연화천대피소와 만나게 됩니다.

 

전라북도 금산에서 태어난 이현상은 18살 때부터 독립운동과 노동운동 학생운동으로 12년을 일제하의 감옥에서 보냈답니다. 그의 생애 마지막 5년은 빨치산으로 살았았구요.

신념과 이념에 의해 갈리워졌던 그와 우리는 아직도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네요.

그렇다고 꼭히 이념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세월을 되짚어보면 힘이 없어 생긴 일이구요.

주변의 강대국들에 끼어서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휩쓸리며 힘없이 당한 골육상쟁의 전쟁이 아니었을까요.

 

 

사람은 죽음에 직면하면 신을 찾는다고 한다. 인간이 너무나 무력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초인간적인 절대의 힘에 매달리고 싶어지는 것이리라. 그러나 내 앞에 현존하는 절대의 힘이란 총에 맞으면 죽는다는 인과의 법칙뿐이다.

나에게 신이 없기 때문일까? 신은 과연 초인간적인 존재인가? 분명한 것은 역사의 유일한 주인공은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역사를 창조하고 움직이는 동력도 인간이다. 그 과정에서 신은 인간에 의해 창조됐다. 신이 인간을 만든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든 것이다.

 

 

근간에 자주 내린 비로 산태골이나 절골 모두 물소리가 우렁차네요.

오늘은 절골을 따라 명선봉으로 오른 다음 명선남릉을 따라 하산 할 계획입니다.

등산로나 선등자의 기척은 애초에 포기하고 오직 나 자신의 "촉"만 믿고 올라갑니다.

 

1952년 1월 18일 새벽 지리산 대성골. 국군 수도사단의 대규모 토벌작전에 쫓겨 토끼몰이당한 지리산 유격대와 민간인 천여 명의 머리 위로 박격포탄이 비처럼 날아왔다. 비행기들이 골짜기 안으로 휘발유를 뿌려댔고 온몸에 기름을 뒤집어쓴 유격대원들 위로 헤아릴 수 없는 네이팜탄이 쏟아졌다. 대성골이 통째로 불타기 시작했다.

유격대원과 투쟁 인민으로 불렸던 민간인들, 수백 년 된 나무들과 산짐승들이 산채로 불탔다. 포탄 터지는 소리와 이리 쫓기고 저리 쫓기며 사람들이 내지르는 비명, 사방에서 날아오는 요란한 총성이 대성골을 찢어발겼다. 화염에 휩싸인 사람들이 산채로 타들어가는 냄새와 악취, 시커먼 연기로 골짜기는 아비규환의 생지옥으로 변했다. 대성골에 몰려있던 천여 명 가운데 참혹한 불바다에서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와 살아남은 유격대원은 백여 명 밖에 되지 않았다.

 

 

합수내에서 오른편 절골쪽으로 돌사태가 난것처럼 커다란 돌들이 잔뜩 흘러내린 너덜지대가 있는데 이곳이 이현상이 사망한 곳입니다. 합수내 옆에 흐른바위라고 불리고 바위에다 이현상바위라고 적혀있는 커다란 바위가 그가 사살된 장소.

사진을 몇 장 찍었는데 뭔 일인지 모두 흔들려서 올리질 못했네요.

 

"그 이현상이 빗점골 어디선가 사살됐다고 하던데요?"

" 예, 빗점골 합수내 근처의 절터골 어귀에서 맞아 죽었다더군요. 그 근처에 가면 지금도 귀신 우는 소리가 들린다해서 사람들이 잘 안가지요."

영감이 핀잔을 줬다.

"귀신은 무슨 귀신... 거기가 워낙 험한 곳이 돼서 자칫하면 길을 읽고 큰 고생을 하니까 사람들이 범접하지 않는 거지."

사실 빗점골에서 주능선인 토끼봉으로 오르는 루트는 지금도 등산로도 나 있지 않은 전인미답의 비경이다.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 총사령관이던 '공화국 영웅' 이현상은 그곳에서 그 전설적 생애를 마친 것이다.

 

 

흐른바위에서 절골은 시작 됩니다.

계곡옆을 자세히 보니 선등의 희미한 자국이 보이지만 그걸 찾아 밟아 오르기엔 무리입니다.

차라리 계곡을 따라 치고 오르는게 훨씬 편하고 힘이 덜 듭니다.

 

53년 9월 3일, 경찰 2연대 매복조는 구례군 토지면 섬진강가에서 5지구당 기요과 부과장인 안과의사 이형린을 생포하고 그로부터 이현상의 소재를 어렴풋이 알아냈으며 9월 6일에는 이현상의 호위병이었던 금은석, 김진영, 두 명의 빨치산을 생포하여 보다 확실한 이현상의 은신처를 파악했다.

더구나 이현상이 박영발 등에 의해 무장해제되고 지위를 박탈당한 채, 감금중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환성을 올렸다.이현상 포촉 작전명령이 즉각 발동돼 1만8천명의 군경부대가 지리산 빗점골을 2중, 3중으로 에워쌌다.

 

 

절골을 조금 오르다보면 좌측으로 이런 너덜지대를 만나는데 이곳으로 올라 우측 산길을 조금 더 들어가면 이현상의 아지트가 나옵니다.

일단 절골로 올라서 나중에 명선남릉으로 내려올때 들리기로 하고 우선 계곡을 치고 올라갑니다.

 

죽은 호위대원의 넝마 같은 의복 위로 하얀 이가 줄줄이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텁수룩한 수염 사이를. 쑥대 같은 머리 속에서도 금새 싸래기를 뒤집어 쓴 것처럼 이들이 수물거리며 기어 나왔다.

 

 

이현상이 이곳 빗점골에서 죽을 때 나이는 48세.

남부군 소설에서는 51세로 표기가 되어 있습니다.

남부군 총사령관이었던 그는 전라도 도당위원장들과는 처음부터 조금 어긋나고 있었는데 결국 방준표 전북도당위원장( 대구여중 교사 출신)과 박영발 전남도당위원장(철도노동자 출신)등의 무리에 의하여 평당원으로 강등되고 이후 이곳 빗점골로 내려오다가 군경에 의해 사살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일부 내부 총질에 의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견도 있습니다.

1953년 9월 18일, 이현상이 이곳 빗점골에서 시체로 발견될 때 그의 목에는 8발의 총알 자국이 있었다고 합니다.

칼이 없어 총알로 목을 자르려다 만 것으로 보이구요.

 

이현상의 시신은 방부처리돼 서울로 옮겨져 창경원과 성북경찰서 앞 도로변에 ‘전시’됐다. 이현상의 시신은 금산에 있는 집안 식구들에게 인계하려고 했지만 막내 숙부가 끝내 시신 인수를 거부해 서전사 2 연대장 차일혁은 시신을 끌고 지리산으로 돌아왔다.

그 뒤 이현상의 시신은 10월 8일 화개장터 인근 섬진강 백사장에서 화장됐다. 칠불암에 있던 스님이 독경을 하는 가운데 이현상이 지니고 있던 염주도 함께 태웠다. 이현상의 뼈는 차일혁이 자신의 철모에 담아 엠원 소총으로 빻은 뒤 섬진강에 뿌렸다. 차일혁은 망자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허공에 권총 세 발을 쏘았다.

 

 

계곡은 수십개의, 수백개의 폭포와 소로 이뤄져 있습니다.

커다란 바위들이 있어 간혹 타고 오르기가 만만찮은곳이 있지만 계곡을 비켜나서 숲을 따라 오르는게 더 힘이 듭니다.

장애물이 너무 많네요.

 

대열은 삼점골의 어느 나지막한 산모퉁이를 돌아 빗점골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미 완전히 굶은 지가 8일째였으며 눈을 붙여보지 못한 지도 사흘이 되었다. 모두가 기진맥진한 상태였으나 그런 대로 4보 간격을 유지하며 묵묵히 기계처럼 걷고 있었다. 

 

 

여름같으면 정말 멋지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계곡은 한없이 끝없이 이어지구요.

 

이현상은 보성전문(현 고려대학교) 법과 재학 중 결혼하여 1남 1녀를 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뒤 지리산에서 빨치산 활동을 할 때 곁에서 간호병 역할을 하던 하수복이 산중처가 되어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이현상이 비행기가 뿌리는 자수 권유 삐라를 건네며 너는 살아야 된다며 하산을 시켰다고 합니다.

 

 

절벽같은 계곡을 만나면 잠시 비켜서 계곡 옆 산길을 타고 올라가기도 하는데 낙엽과 잡목이 너무 많습니다.

 

 

바위 그늘에 대원 한 사람이 비스듬히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작은 몸집으로 보아 여자대원이 분명한데 아랫도리가 피범벅이 돼 있었다. 지난 늦여름 거림골 환자 트에서 알게 됐던 순천이 고향이라는 김희숙이었다. 입이 건 그녀는 그 당시 대대장급의 간부로 있었다.

김희숙은 게슴츠레한 눈을 뜨며 알아보겠다는 듯이 입가에 약간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신 차려, 희숙 동무! 일어나봐!"

출혈이 심해 창백해진 얼굴로 그녀는 남의 말 하듯 말했다.

"틀렸구만이라, 다리가 없어져 뿌렸지라.어찌까이. 동무도 피가..."

그녀는 내 피 묻은 머리띠를 향해 더듬듯이 한 쪽 손을 내밀었다. 여전히 예쁜 목소리였고, 여전히 금단추 부로치 두 개가 피 묻은 가슴께에서 빛나고 있었다, 잡아준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럼 안 돼, 엄니를 만나야지... 정신차려! 난 괜찮아.."

"그랴, 엄니를 만나야제라. 압지도. 오빠도.... 오사육실할..."

 

 

사진으로 크기가 가늠이 되지 않는 수많은 폭포들.

그래서..

 

 

이날 홀로 산행에서 고릴라 삼각대 놓고 이 한장의 사진만 남겼네요.

 

 

이 예쁜 열매는 무엇일까?

 

빨치산들은 박쥐와 같은 야행성 생태를 갖게 된다. 밝은 낮에는 적정이 있던 없던 노상 형용키 어려운 불안감에 쌓여 있지만 일단 해가 떨어지면 내 세상 만난 듯 용기가 되살아 난다.어둠이라는 장막은 강철의 방패처럼 믿음직스럽고 '밝음의 두려움'을 씻어내 주었다.

 

 

조그만 생수 한병과 1L 보온병에 끓는 물을 가득 채워 왔는데 천연 생수가 온 계곡에 가득하다는걸 미처 잊었네요.

 

 

계곡을 오르다가 커다란 바위를 성큼 넘어가는데 이 예쁜 총각을 만났답니다.

사람 구경 처음 하는듯한 표정.

나도 가만히.. 지도 가만히..

한참이나 둘이서 그대로 쳐다보고 있기.

 

 

계곡 물소리가 조금씩 잦아드는 걸 보니 능선과 하늘이 가까워진듯 합니다.

 

 

이 높은 곳에 이렇게 아지트를 만든 이는 누구일까?

둥글게 담을 쌓아 방어호를 만든것은 분명 추격대일것입니다.

하루에도 수십km를 도망 다니고 쫒겨 다니던 그들에겐 이런 여유가 없었을테니까요.

 

용변 후에 뒤지로, 여름에는 갈잎을, 겨울에는 모두 이 삐라조각을 썼는데 실은 빨치산 생활에서 용변문제는 의외로 큰 골칫거리였다. 대열은 일정간격을 유지하고 쏜살같이 내닫는데 내 뒤를 보고 있다가는 낙오될 것은 물론 자칫하면 목숨까지 잃는다. 깊은 눈 속을 한 줄로 뚫고 갈 때는 뒤를 보기 위해 열 밖으로 비껴 설 도리도 없었다. 눈이 허리까지 차면 우선 웅크리고 앉기도 쉽지 않았다.

 

 

계곡의 막바지 상류.

이제 계곡을 벗어 납니다.

곧장 올라 연하천대피소로 갈까 했는데 그곳에서 만나는 직원들한테 거짓말을 할 용기가 없네요.

이제부터 촉을 더욱 예민하게 하여 하늘만 보고 방향을 정하고 약간 좌틀하여 명선봉으로 곧장 올라갑니다.

완전 막힌 산길이라 진행이 더딥니다.

 

 

아랫동네 비가 내릴때 눈이 왔나 봅니다.

 

걸으면서 잠을 잤다.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고향 집의 따스한 온돌방과 김이 무럭무럭 나는 떡국상을 둘러싼 식구들의 웃는 얼굴이 보인다. 명동 청탑다방에서 혜영이와 같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난로가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 향긋한 커피의 향기.... 아아 '한잔의 커피' 그 망상은 얼마나 잔인하게 나를 괴롭혔는가?

잠을 깨면 천둥소리 같은 눈보라의 울부짖음과, 어둠과, 허기와, 뼈를 찌르는 추위가 몸을 휘감아 왔다. 어느 것이 꿈이고 어느 것이 현실인가?

 

 

연리근이 연리목으로 바꿔져 있네요.

 

 

앞이 가로막혀 명선봉 정상쪽이 가늠이 잘 되지 않습니다.

다시 연하천 방향으로 돌릴까 하다가 일단 오르막을 계속 오르면 어느 봉우리든지 정상이 나오겠지 하는 생각으로..

 

이윽고 겨울이 오면 지리산은 그 면모를 일변하여 공포의 산으로 바뀐다. 변덕스러운 날씨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돌변하며, 눈은 내리는대로 쌓이기만 하여 지형에 따라서는 2머터가 넘는 적설을 이루어 이듬해 5월에 들어서야 녹는다.

기온은 표고 2백 미터에 1도씩 낮아지기 때문에 주능선 일대는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추위가 겨우내 계속된다. 북면의 골짜기들은 언제나 10~20미터의 설한풍이 내리쳐 인간의 침입을 거부한다. 그러한 속을 빨치산들은 부실한 장비를 가지고 불도 못 피우며 때로는 10여 일을 먹지 않고 자지 않고 이 골짜기, 저 산마루를 이동하면서, 그래도 대부분 살아 남는다. 아마도 그것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고통의 극한일 것이다.

 

 

명선봉 못미쳐 능선자락에 도착.

지리 주능이 들어 옵니다.

 

 

저 너머가 연하천대피소.

 

 

눈이 제법 푹푹 빠집니다.

잡목과 넝쿨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요리조리 구멍을 찾아 헤쳐 갑니다.

 

 

명선봉 도착.

지리산 주능에서는 명선봉을 거치지 않습니다.

이곳은 비탐지역이구요.

보온통에 담아 온 따스한 물에 차를 태워 한잔 마시며 턱에 앉아 지리산 이야기를 듣습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파르티잔이란 이름으로 이 골에서 저 골로 숨어 다녔던 그 역사..

 

 

벽소령 지나 멀리 이어지는 능선.

천왕봉이 솟아 보입니다.

 

 

당겨서 본 천왕봉과 중봉.

천왕봉 우측으로 장터목이 보이네요.

 

 

반대편 방향의 능선.

멀리 우뚝 솟은 반야봉과 중간 토끼봉, 그리고 날라리봉이라고 하는 삼도봉이 조망 됩니다.

 

입석은 산청읍이 그리 멀지않은 야지마을이었는데 워낙 대병력으로 부푼 연합부대는 그곳에서 유유히 며칠을 묵으며 영양과 휴식을 취하고 8.15날에는 기념식을 가졌다. 8월 16일. 연합부대는 마을 뒷산을 넘어 다시 서쪽으로 길을 떴다. 이날 오후. 서퍼런 강줄기가 내려다보이는 어느 산모퉁이를 돌아섰을 때였다. 앞서 가던 문춘참모가 걸음을 멈추고 한참 정면을 바라보고 있더니 뒤를 돌아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동무들! 저기가 달뜨기요. 이제 우리는 지리산에 당도한 것이요!"

 

1천4백의 눈동자가 일시에 그 시퍼런 연봉을 응시하며 "아아!" 하는 탄성이 조용히 일었다. 여순 이래의 구대원들이 마치 고향을 그리워하듯 입버릇처럼 되되이던 달뜨기....

이현상이 '지리산에 가면 살 길이 열린다'고 했던 빨치산의 메카, 대 지리산에 우리는 마침내 당도한 것이다.

 

 

아래로 산태골이 보입니다.

왼편 앞의 능선이 명선남릉이고 그 너머가 올라왔던 절골.

멀리 좌측에서 우측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세석에서 삼신봉으로 이어지는 남부능선 마루금.

 

 

멀리 천왕봉과 왼편 명선남릉, 가운데 산태골을 비록 우측의 반야봉 토끼봉 삼도봉이 조망되는 명선봉의 파노라마 

 클릭하면 크게 보여 집니다. 

 

 

명선봉을 뒤로 하고 하산.

 

우리가 명선봉 부근에 올라섰을 때는 어둠이 깔려오고 있었다. 겨울 숨을 돌리고 있는데 정찰기 한대가 날아오더니 우리 위를 몇 번 선회하며 기초소사를 가하고 사라졌다. 능선에는 눈이 깊었으나 이미 어둑어둑했고 솔밭 사이였기 때문에 우리가 노출되지 않았을텐데 지상연락 때문인지 탄착이 매우 정확하여 머리 위를 솔가지사 부스러져 우수수 떨어진다.

 

 

낙엽과 눈으로 그나마 희미한 발자국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뒤떨어진 낙오자나 후속부대를 위해 부대가 이동한 방향을 알리는 신호가 있었다. 가령 나뭇가지를 두세 곳에 꺽어 놓던가, 땅바닥에 자연스럽게 떨어뜨려 놓는 것이다. 이 두세 개의 표지를 연결한 선이 화살표가 되는 것이다. 

 

 

그들이 숨어 지냈을법한 트(아지트)를 기웃거리며 하산 합니다.

 

 

하산길은 절골 올라올때보다 휠씬 더 힘듭니다.

선등자 발자국을 겨우 따라 내려가나 싶으면 어느새 길이 막히고 앞이 절벽.

온 산이 낙엽으로 덮여서 길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길인듯하여 내려가다가 절벽을 만나 되돌아 올라가기 수차례..

 

 

동상보다도 더 다급한 문제는 식량보급이었다. 누구나 없이 적어도 10일 이상은 고스란히 굶으며 불면불휴의 격동을 해 왔다. 거림골에 집결한 거의 전원이 빈사의 중환자 같은 모습들이었다.

 

 

짧은 해가 나무 그림자를 길게 만들고 있네요.

 

의신에서 대성골을 거쳐 거림골로 넘어가는 일행은 어느 나지막한 언덕길에서 초소 교대를 가는 듯한 전투경찰대 10여명과 마주쳤다. 우리는 언덕위를 가고 있었고 경찰대는 언덕 의 임도를 오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를 발견하지 못했다. 일행은 숨을 죽이고 엎드려서 참모장의 지시를 기다렸다.

 

 

어디선가 반가운 반달곰이라도 만나지 않을까 기대를 했는데 약간 아쉬움이..

아마 내가 내는 소음에 뭔가 하고 멀리서 지켜보기는 했겠지요?

 

온종일 눈 속에서 행군을 하다가 모닥불에 발을 말리고 물에 젖은 발싸개를 바짝 말려 다시 감고 나면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개운했다. 그러나 이것도 12월의 대 토벌작전을 만나기 전까지의 얘기다. 군작전이 시작되면 불을 피울 수도 없거니와 노상 눈이 무릅을 넘는 고지나 북변 골짜기에서 행동하게 되기 때문에 골을 팔 도리도 없고 돌으ㅜㄹ 구할 방법도 없으며 ...

 

 

 

 

 

대열이 주능선을 넘어 빗점골로 향한 험한 길을 기백미터 내려 갔을 때, 우리는 실로 끔찍한 광경을 보게 됐다. 일행 중 누구도 알지 못하는 환자 트가 발견 되었는데 트 입구에 시체 3구가 나뒹굴어 있었다. 눈이 덮힌 꼴로 봐서는 사살된지 꽤 여러 날이 된 모양인데 눈 속에 묻혀 있던 관계로 금새 죽음 사람처럼 조금도 상하지 않고 그대로였다.

식사 중에 급습을 당한 모양으로 셋이 다 입에 밥을 물고 있고 밥이 담긴 냄비가 근처에 뒹굴고 있었다. 밥도 얼기는 했으나 상한것 같지는 않았다. 대원 한 사람이 그 밥을 손으로 움켜 입에 넣자 일제히 벌때처럼 달려들어 눈 속에 흩어진 밥알까지 하나도 남기지 않고 순식간에 먹어버렸다. 그 다음에는 시체의 입술에 묻은 밥알까지 말끔히 거둬 먹어버렸다. 

 

 

이곳이 이현상이 최후로 머물렀던 트(아지트)입니다.

가지고 간 막걸리를 한잔 붓습니다.

그 앞에 앉아 그와 이야기를 나누어 봅니다.

 

사령관 이현상이 눈시울이 벌겋게 하고 눈밭 속으로 사라져 가는 야습대의 뒷모습을 보고 잇다가 억지 웃음을 지으며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중얼거렸다.

"어째 '승리의 노래'가 용장히질 못하고 비장하군. 이제 봄이 머잖았어. 해동이 되고 잎이 피면 야산에 내려가 초모사업을 해서 재기할 수 있게 된다. 그땐 동무들 흰쌀밥에 소도 잡아서 실컷 먹게 하구 푹 쉬도록 할 테다. 약을 구해다 동상도 말끔히 치료하구 말야. 눈은 오지만 봄은 머잖다...."

 

 

생수병을 따서 술잔으로 하고 일부러 하나 남긴 샌드위치를 그와 나눠 먹습니다.

그가 마신 막걸리 한잔을 빼고는 나머지는 내가 마십니다.

빈 속에 들어간 막걸리가 늦은 단풍마냥 온 몸을 데우고 있네요.

 

이현상은 결국 김일성에 의하여 완전한 적으로 간주됬다.

적의 적은 우군이라는 등식이 인정한다면 이때의 이현상의 위상은 어찌되는 것일까?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는 적의 적도 또한 적이었던 것이다.

 

 

 

 

 

다시 빗점골 입구 합수내로 내려 왔습니다.

너덜에는 이곳에서 죽은 수 많은 빨치산들의 넋을 달래는 돌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누가 세웠을까?

 

 

나도 하나 세워 놓고 내려 갑니다.

 

 

 

 

 

빨치산 문화지도원이었던 최순희의 수목장입니다.

 

문화지도원 최문희는 동작이 활달하고 격정적인 인상의 20대 여인이었다. 평양에서는 오페라 칼멘의 칼멘역을 맡았던 유명한 오페라 가수이며 '공훈배우'였다고 한다. 그녀는 등사판으로 '50곡집' '20곡집' 등 가사집을 만들어 대원들에게 배부하고 틈틈이 노래 공부를 시키고 있었다.

 

 

북한에서 공훈배우로 활동했던 최문희는 1952년 국군에 생포되어 본명인 최순희로 살았습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때 빨치산의 조건은 남과 북 그 어느 협정문에도 없었답니다.

포로교환도 하고 전쟁도 끝났지만 남쪽의 어느 산기슭에서 북을 믿고 기대고 있던 그들은 버림을 받고 고립이 된 것입니다. 북으로 돌아가 영웅 대접을 받는다는 희망은 사라지고 모든 건 바람 앞에 등불이 되어 최후만 남겨졌습니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 왔네요.

 

 

 

 

 

남은 해가 산마루를 비추고 있습니다.

70년 전..

그때 이곳을 헤매이던 그들도,

이런 아름다운 모습에 잠시 멈추어 가을이라는 단어를 되뇌어 봤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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