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조선 중종 충북 단양군 단성면 두항(斗抗)마을이라는 곳의 어느집에서 예쁘장한 여아가 출생하였다.
다섯 살 되면서 아비를 잃고, 열 살 되던 해에 그 어미마저 사별하자 그녀의 빼어난 자태를 아까워한 한 퇴기(退妓)에 의하여 길러지면서 기적(妓籍)에 오르게 되었다.
몸매도 아름다웠거니와 거문고에 능하였으며 시문에도 능하였다. 또한 난(蘭)과 분매(盆梅-화분에 매화를 기름) 솜씨가 있었다.
그녀의 성명은 두향(杜香) 또는 두양(杜陽)이라고 알려져 오고 있고 그녀의 성씨는 안(安)씨라고 전해 오기도 한다. 안씨라는 성씨에 대하여 자세한 사연은 알 수 없으나, 매년 가을이면 안씨 문중 대표들이 10 여명씩 두향의 묘소를 참배하고 간다는 사실로 얼추 짐작한 것이다.
그녀의 이름도 옛 여인들이 이름을 자기가 태어난 지명을 붙여 짓는 풍습을 볼때 아마 태어난 지명을 이름으로 하였다고 짐작된다.
두향의 어미는 죽기 전에 화분 속에 매화 한 그루를 잘 길러 냈는데, 매년마다 그 분매에서 꽃이 피고 있었다. 두향은 그 어미가 죽자 기적에 오를 때까지 고이 잘 길러 냈다. 그래서 평소에도 매화에 대한 관심이 깊었다.
이후 그녀는 관기로 입적이 되어 있었는데 어느날 단양의 제 15대 군수로 퇴계 이황이 부임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두향은 퇴계라는 신임 군수가 어떤 인물인지 궁금하여 수소문하여 보았다. 일찍이 퇴계는 조정에서 근무하던 시기에 뜰에 핀 매화를 보고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읊은 적이 있었다. 퇴계가 단양군수로 부임하기 6년 전인 무인(1542)년에 지은 매화 시 첫 작품이다.
一樹庭梅雪滿枝(일수정매설만지) - 뜰앞에 매화나무 가지 가득 눈꽃 피니,
風塵湖海夢差池(풍진호해몽차지) - 풍진의 세상살이 꿈마저 어지럽네.
玉堂坐對春宵月(옥당좌대춘소월) - 옥당에 홀로 앉아 봄밤의 달을 보며,
鴻雁聲中有所思(홍안성중유소사) - 기러기 슬피 울 제 생각마다 산란하네.
두향은 퇴계가 매화를 두고 읊은 시를 발견하고 그 내용을 꼼꼼이 살펴보았다. 매화를 두고 읊은 시이기는 하나 나라의 어지러움을 개탄하는 우국지정이 어린 시임을 느꼈다. 비록 조정의 벼슬자리에 앉아 있으나, 바다같이 넓은 세상일이 좁은 연못 속에 뒤 엉겨 있는 듯, 어지럽고 산란함을 매화나무에 빗대어 읊은 시가 두고두고 음미할 만 하였다. 두향은 어느 사이 퇴계의 매화 시를 외우고 있었다.
무신 년 정월에 퇴계 이황은 48세로 단양군수로 부임하였다.
관기로서 두향은 신임 군수 퇴계 이황을 가까이 모시게 되였다. 두향은 사별하던 어미로부터 물려받아 그동안 애지중지 기르던 분매를 퇴계의 처소에 옮겨 놓았다. 때마침 퇴계가 단양으로 부임하던 시기는 이른봄이라 화분 속의 매화도 곱게 피어 은은한 향기를 내 뿜고 있었다. 처소에 든 퇴계는 환하게 피어난 매화를 보고 반기는 듯 하였으나, 이내 곧 매화 분을 가져온 사람에게 돌려 줄 것을 명하였다.
두향은 매화분에 관한 자초지종을 아뢰고, 6년 전의 퇴계가 읊은 매화 시를 외우면서, 매화는 고상하고 아담하여 속기(俗氣)가 없고, 추운 때에 더욱 아름다우며, 호젓한 향기가 뛰어나고, 격조가 높으며, 운치가 남다르며, 뼈대는 말랐지만 정신이 맑고, 찬바람과 눈보라에 시달리면서도, 곧은 마음을 고치지 않기 때문에 이 매화꽃과 함께 심신의 안정을 되찾고, 단양 고을을 잘 다스려 줄 것을 아뢰었다.
퇴계가 두향의 말을 듣고 생각을 해보니, 두향의 속마음이 진실 된 듯 한데, 고을 백성을 다스리려 내려온 스스로가 백성으로부터 재물이나, 금전을 뇌물로 받는 것은 자기 스스로 허락할 수 없다. 그러나 나무 한 그루 처소에 가져온 것을 참아 물리칠 수가 없었다.
그 이후 두향은 매화 한 그루를 또 구했는데 그 꽃 빛이 희다 못해 푸른빛이 나는 진귀한 매화였다. 그 청매를 퇴계에게 드리니 "나무야 못 받을 것 없지." 하고 그 나무를 아전으로 하여금 동헌 앞에 심도록 하고 즐겼다.
이 때에 퇴계는 첫 부인과 재취부인마저 사별하고, 아들도 이미 한 명이 유명을 달리한 때라, 인생의 깊은 고뇌와 함께 심신은 많이 쇠약하여 있었다.
이 때부터 두 사람은 시화(詩話)와 음률을 논하고, 산수를 거닐며 두향은 퇴계를 우러러 사모하고 퇴계는 두향을 아껴 보살피는 연모의 사이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퇴계가 단양 군수로 부임한지 10개월만에 단양 땅을 떠나야만 할 일이 생겼다. 그 해 10월에 퇴계의 친형인 대헌공이 직속상관인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해 오자, 형과 아우가 직속상하관계로 있으면 나라 일에 공평을 기 할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세인들로부터 오해를 받게될 것을 염려한 나머지 퇴계는 그 날로 사표를 제출했다,
청렴 결백한 그의 성품을 그대로 드러낸 사건이다.
그의 성품을 알아차린 조정에서는 그를 충청도가 아닌 경상도 풍기 군수로 임명하였다. 이렇게 되어 퇴계와 두향은 애달픈 이별을 하게 되었다. 그때 퇴계는 풍기 군수로 옮겨가면서 두향 으로부터 받은 청매 한 그루도 함께 가져가서 도산서원에 심었다.
한편 퇴계가 떠난 후 두향은 부유함과 호사스러움을 앞 새우는 시중잡배들과 어울리는 것이 단 10개월 동안이나마 모시던 그 어른의 인격에 대한 모독이라 생각하고 아예 기적에서 물러 날 것을 결심하고 새로 부임한 사또에게 그 사연을 말하고 허락을 요청하였다. 신임 사또의 허락을 받아 기적에서 면천되어 물러난 두향은 오로지 퇴계만을 생각하고 그리워하면서 함께 노닐던 강변을 혼자서 거닐기도 하고, 수많은 사연들을 추억하면서 외롭게 살아갔다.
두향의 마음이야 오매불망 퇴계를 잊을 수 없었으며, 당장이라도 찾아가고 싶었으나, 퇴계의 처지를 생각하면 참아 그렇지를 못하였다. 하는 수 없이 간접적으로 인편을 보내 문안을 여쭙곤 하였다.
헤어진지 어언 4년이 되는 봄날에 문안 여쭈러 보낸 인편에 퇴계는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두향에게 보내주었다.
黃卷中間對聖賢(황군중간대성현) - 누렇게 바랜 옛 책 속에서 성현을 대하며,
虛明一室坐超然(허명일실좌초연) - 비어 있는 방안에 초연히 앉았노라.
梅窓又見春消息(매창우견춘속식) - 매화 핀 창가에서 봄소식을 다시 보니
莫向瑤琴嘆絶絃(막햑요금탄절현) - 거문고 마주 앉아 줄 끊겼다 한탄을 말라.
퇴계는 이 시문 끝에 壬子 正月 二日 立春이라 쓴 것으로 보아 그의 나이 52세(1552)되는 해의 작품이다. 이 시문의 끝 구절에 "거문고 마주 앉아 줄 끊겼다 한탄 마라"는 분명히 두향의 마음을 위로하는 내용이다. 두향은 이 시 한편을 받고 평생을 거문고 가락에 실어 노래로 불렀다.
노년에 벼슬을 떠나 안동 도산서원에 머물던 퇴계는 서원 입구에 '절우사'라는 정자를 짓고 소나무, 대나무, 국화 등과 함께 매화를 심고 즐겼다. 사랑하는 여인 "두향"을 단양에 홀로 남겨두고 떠나 이곳 도산서원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그녀를 잊지 못하다가 두향이 인편으로 보낸 난초를 보고 함게 단양에서 기르던 것임을 즉시 알아보고는 밤새 잠 못 이루다가 새벽에 일어나 도산서원 마당에 있는 열정이라는 이름지어진 우물물을 손수 길어 두향에게 보낸다. 이 열정의 우물물을 받은 두향은 차마 물을 마시지 못하고 새벽마다 일어나서 님.. 퇴계의 건강을 비는 정한수로 소중히 다루었다.
열정
세월이 흘러 두향과 헤어진지 대략 20 여 년이 지난 1570년 12월 8일 유시 추운 겨울날...
저녁 5시 경에 자리을 정돈하라고 다시 이르며 부축하여 일으켜 앉히니 마지막으로 퇴계는 방안의 매분을 가리키며 "매형(梅兄)에게 물 잘 주라"는 말을 남기고 조용하고 편안하게 임종하였다.
그날 여느날과 마찬가지로 사모하는 퇴계의 건강을 빌고 있는데 이 정한수가 갑자기 피빛으로 변하였다. 이에 퇴계가 돌아간줄을 간파한 두향은 소복차림으로 단양에서 머나먼 도산서원을 찾아 간다. 첩첩산중의 소백산맥을 홀로 넘어 찾아간 도산서원에서 차마 신분을 밝히지는 못하고 곡하며 세번 절하고 돌아 와서 스스로 곡기를 끊고 자진하였다.
두향묘
그 옛날 두향이가 퇴계와 이별할 당시 선물한 매화는 풍기군수 시절에 동헌앞에 심어 기르다가 이후 관직을 버리고 도산서원으로 오면서 그 매화를 다시 가져와 도산서원 광명실앞에 옮겨 심었는데 이것이 도산매다.
하지만 안타깝게 도산매는 1986년에 죽었다.
후계목도 없어 그 모습을 영원히 찾아볼 수 없게 됐다. 현재 남아있는 매화는 1970년, 서원을 보수할 때 심은 것들이라고 한다. 서원 내에 약 15그루가 심어져 있다. 이중 가장 오래된 것은 약 60년 된 것이라고 한다. 1000원권 새 지폐에 보면 퇴계와 함께 그가 가장 사랑한 매화 20여개가 그려져 있다.
1000원의의 매화와 퇴계
다음은 퇴계가 풍기군수로 떠나기전 단양에서 헤어질때의 장면을 재구성한 것이다.
"나으리, 나으리에게 묻겠나이다. 나으리께오서는 상원사의 동종을 아시나이까?"
"알고 있다"
"상원사의 동종이 죽령고개를 넘을 때의 고사를 알고 계시나이까?"
"들은 바가 있다"
"하오면 나으리"
두향이가 무릎을 꿇고 앉은 채 낮은 목소리로 물어 말하였다.
상원사의 동종이 죽령고개를 넘을 때 산기슭에서 꼼짝도 하지않았다는 이야기를 알고 계시나이까?"
"알고 있다"
"자그마치 닷새 동안이나 5백 명이나 되는 장정들과 말 백 필이 끌어 당겨도 제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으시나이까?"
"들은 적이 있다고 내 말하지 않았더냐"
"하오면 나으리, 제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자 운종도감이 처음에는 고개를 넘느라 힘이 빠져서 그렇겠지 하고 생각하였으나 닷새가 지나도 움직이지 않자 묘책을 강구했다 하더이다. 그 이야기에 대해서도 알고 계시나이까?
"글쎄 그 이야기는 들은 것 같기도 하다만 하도 옛 기억이라 가물가물하니 네 입으로 말해보도록 하여라."
"나으리"
무릎을 꿇고 앉은 두향이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갖가지 묘책을 찾았으나 방안이 없어 초조해하던 중 마을의 촌로 하나가 찾아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하나이다. '백살을 못 사는 사람도 생이별을 서러워하거늘 하물며 8백살이 넘어 숱한 애환을 지닌 범종이 이 죽령을 넘으면 다시는 못 볼 고향이 아쉬워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퇴계는 묵묵히 두향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제자리에서 꼼작하지 않은 것은 이처럼 상원사의 동종뿐이 아니나이다. 나으리, 나으리께오서는 송도기생 황진이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으시나이까?"
"들은 바 있다"
"나으리, 황진이는 15세 무렵에 동네 머슴이 연모하여 상사병으로 죽자 그 길로 기계에 투신하였다고 하나이다. 그런데 황진이 집앞을 지나는데 상여는 그 자리에 멈춰 꼼짝도 하지 않았다고 하더이다. 마치 죽령고개에 닷새간이나 멎어 꼼짝하지 않았던 동종처럼 옴짝달싹하지 않았다고 하더이다.그 상여가 어찌하여 움직였는지 그 소문은 알고 계시나이까?"
퇴계는 묵묵부답이었다.
"소첩이 대신 말씀드리겠나이다. 황진이가 자신이 입던 속치마와 저고리를 벗어 관을 덮자 비로소 상여가 움직이기 시작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황진이의 속곳이 머슴의 넋을 달래주었기 때문이나이다."
두향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백년도 못 사는 인생에서 생이별을 슬퍼하는 머슴의 넋을 달래기 위해서 황진이가 입고 있던 속곳을 벗어 관을 덮어주어 상여를 움직이게 하였다면 8백살이 된 범종은 어떻게 하여 움직였는지 그 이야기를 알고 계시나이까?"
퇴계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역시 소첩이 대신하여 말씀드리겠나이다. 동종에 있는 젖꼭지 하나를 잘라내었다 하더이다."
상원사 동종은 36개의 유듀가 있어 소리울림이 독특하고 청아하였다. 그런데 이 36개의 유두 중 하나를 잘라낸 것이다.
"젖꼭지 하나를 잘라낸 운종도감은 이를 종이 있었던 안동 도호부의 남문루 밑에 파묻고 정성껏 제를 올렸다고 하더이다.
그러고 나서 다시 죽령에 돌아와서 범종에게 이렇게 말을 하였다고 하더이다.
'이제는 미련을 버리시고 먼 길을 떠나시지요'"
두향은 일단 말을 끊었다.
"그러자....."
두향이가 긴 침묵 끝에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자 동종이 다시 움직였다 하더이다. 나으리, 이로써 동종은 죽령을 넘어 제천, 원주, 진부령을 거쳐 오대산에 안치되었다고 하더이다. 나으리."
두향의 눈에서 맑은 이슬이 굴러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나으리께오서는 날이 밝으면 단양을 떠나시나이다. 단양을 떠나시면 상원사의 동종처럼 죽령고개를 넘으실 것이나이다.
나으리께오서는 지척지간이라 마음만 먹으면 불원간 또 다시 만날 수 있다 기약하셨사오나 소첩이 보기에는 이제 한 번 가오시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임을 잘 알고 있나이다.
나으리, 죽령고개가 아무리 높다 하여도 나으리를 향항 소첩의 그리움은 구름이 되어 단숨에 뛰어오를 수 있고, 동종의 무게가 3천3백 근이나 되어 무겁다고는 하지만 나으리를 향한 소첩의 마음에 비하면 한갓 검불에 불과 하나이다.
장정 5백 명과 말 백 필이 끈다 하면 상원사릐 동종을 움직일 수 있사오나 소첩의 마음은 절대 끌지 못할 것이나이다.
나으리, 나으리를 향한 내 단심은 그 무엇으로도 끌 수도, 당길 수도, 밀 수도 없는 요지부동이나이다.
상원사의 동종이 8백 년이나 되었다고는 하지만 나으리를 향한 내 상사는 전생으로부터 이어진 천겁의 업이오며, 하늘과 땅이 갈라지기 전부터 맺어온 숙연이나이다.
하오니 나으리, 이제 정히 가시겠다면 나으리께오서 소첩의 젖꼭지 하나를 칼로 베어내고 떠나시오소서."
두향의 얼굴은 흘러내린 눈물로 젖어 있었다.
두향은 천천히 저고리를 벗기 시작하였다. 고름을 풀어 내리고 가슴을 헤쳤다.
"나으리, 젖꼭지 하나를 베어내소서. 그래야만 나으리를 향한 소첩의 미련이 끊어질 것이나이다. 하늘과 땅이 갈라지기 전부터 이어진 나으리와의 천겁의 인연이 끊어질 것이나이다."
천천히 저고리를 다 벗은 두향이 은장도 하나를 꺼내어 방바닥 뒤에 놓았다.
달빛이 두향의 가녀린 어깨를 감싸고 있었고, 풀어헤친 긴 머리카락 사이로 두향의 젖가슴이 흔들리고 있었다.
"정녕 가슴 하나를 베어달라는 것이냐?"
침묵을 지키던 퇴계가 마침내 입을 열어 물었다.
"베어주소서."
결연한 목소리로 두향이 대답하였다.
퇴계는 칼을 들어 곁에 벗어둔 두향의 저고리를 펼쳤다. 퇴계는 망설임 없이 저고리의 깃을 잘라내었다.
당시 양반사회에서는 이혼이 금지되어 있었으나, 저고리의 옷섶을 잘라 아내에게 줌으로써 아내는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퇴계가 은장도로 저고리의 깃을 베어낸 것은 두 사람의 연분을 끊어내는 것이었다.
"이로써...."
퇴계가 나비모양으로 베어진 세모꼴의 저고리 깃을 두향에게 주며 말하였다.
"상원사의 동종이 죽령의 고개를 넘어가듯 내 몸도 죽령을 무사히 넘을 수 있겠느냐?"
말없이 울고 있던 두향이가 퇴계가 내민 세모꼴의 저고리 깃을 두 손으로 받으며 말하였다.
"나으리께오서 저고리의 깃을 자르시니 이것으로 인연이 다 된 것을 알겠나이다. 상원사의 동종에서 잘라낸 젖꼭지를 남문루에 파묻고 제사를 지냈듯 소첩이 이 저고리를 나으리와 함께 지내던 강선대 바위 밑에 파묻으오리다. 그리하여 마침내 다북쑥 우거진 무덤에 함께 묻히겠나이다. 나으리"
퇴계는 두향이가 입던 치마폭에 정표로 다음과 같은 시를 한 수 적어주었다고 한다.
"죽어 이별은 소리조차 나오지 않고(死別己呑聲)
살아 이별은 슬프기 그지 없네.(生別常惻測)"
'글과 그림' 카테고리의 다른 글
크리스챤 아서(Christian Asuh) - 소녀에게 먼저 오는 봄 (2) | 2008.03.11 |
---|---|
티벳의 전설 - Wang Yi Guang(王沂光)의 티벳 야크와 양 그림 (1) | 2008.03.05 |
Amy Pang의 수채화 같은 아름다운 풍경들 - 물의 도시 중국 양저우(揚州 Jiangsu) (0) | 2008.03.04 |
하늘을 깨물었더니 - 정현종 (0) | 2008.03.02 |
이 문디 자슥아 - 황무룡 (0) | 2008.02.21 |
개한테 배우다 - 복효근 (0) | 2008.02.13 |
지 살자고 하는 짓 - 하종오 (0) | 2007.12.29 |
겨울바다 - 김남조 (0) | 2007.12.13 |
사진 보다 더 사진 같은 그림 - 극사실주의 화가 작품 시리즈 로베르토 베르나르디(Roberto Bernardi) (0) | 2007.12.04 |
사진 보다 더 사진 같은 그림 - 극사실주의 화가 작품 시리즈 라파엘라 스펜스(Raphaella Spence) (0) | 2007.1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