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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일기

서산여행 - 수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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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란 절을 생각하면서 수덕사 여승이란 노래가 떠 올랐습니다. 

 

이 수덕사의 여승이란 노래 덕분에 이곳에 비구니 사찰로 알려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아무튼 수덕사의 여승이란 노래로 인하여 수덕사는 전국구의 유명사찰이 된 건 사실입니다.

이 수덕사의 여승이란 노래는 그 사연이 좀 있는데요. 내용은 중앙일보 백승호 기자가 쓴 글로서 대신 합니다.

 

 

 

스캔들의 여주인공이 아니라 숨겨진 선객(禪客)이었다.

 주인공은 일엽(一葉·1896~1971) 스님. 최초의 한국 근대 여성 화가였던 나혜석과 함께 신여성의 대명사로 꼽히는 인물이다. 1910년대 일본 유학, 두 번의 결혼과 이혼, 시대상에 맞선 자유연애, 수덕사 만공 스님을 만난 후의 출가와 수행.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당대의 여걸이다.

 오죽하면 그를 모델로 ‘수덕사의 여승’이란 유행가까지 나왔을까. ‘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속세에 두고 온 님 잊을 길 없어/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 적에/아 수덕사의 쇠북이 운다.’ 이 노래 탓에 수덕사는 한동안 ‘비구니 사찰’로 오해를 받았다. 수덕사 사하촌에 ‘수덕사의 여승’ 노래비가 세워진 적도 있다. 사찰 앞에 어울리지 않다고 본 스님들이 없앴다고 한다.

 ‘일엽’은 늘 연예 뉴스의 초점이었다. 그 뒤에 숨겨진 ‘수도자 일엽’ ‘선객 일엽’은 제대로 조명된 적이 없다. 16일 서울 인사동에서 일엽 스님의 4대 손자뻘 제자 경완 스님을 만났다. 그는 지금껏 알려지지 않은 일화들을 하나씩 꺼냈다. 거기에는 날이 시퍼런 일엽의 구도심과 선(禪)적 안목이 깃들어 있었다. 경완 스님은 “수덕사 견성암에서 일엽 스님이 30년간 입승(선방의 반장)을 맡았다”고 말했다.

견성암은 국내 첫 비구니 선원이다. “일엽 스님은 앉아서 주무실 때가 많았다. 정확한 기간은 모르지만 꽤 오랫동안 장좌불와(長坐不臥·잘 때도 눕지 않고 좌선함)를 하셨다고 한다.”

 신여성 김일엽은 당대의 작가였다. 일본 유학 시절 만난 춘원 이광수가 그에게 ‘일엽(一葉)’이란 필명을 지어줬다. 그런 일엽도 출가 후에는 펜을 꺾었다. 거의 30년 만에 다시 글을 쓰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나로부터 시작되지만, 내가 남과도 연결돼 있다. 그 사람들과 생사고락을 같이 한다. 그래서 이치를 전하기 위해 다시 글을 쓴다.” 여기에는 나와 세상이 함께 숨을 내쉬고, 함께 들이마시는 불이(不二)의 안목이 녹아 있다.

 경완 스님은 숨은 일화를 또 꺼냈다. 해방 전, 북쪽에서 가장 유명한 선방이 금강산 마하연이었다. 일엽은 스승 만공 스님을 따라 그곳에 갔다. 만공은 근대의 대표적 선지식 경허의 맥을 잇는 선사다. 하루는 만공 스님이 일엽에게 농을 던졌다. “밤새 어느 방을 돌아다니다가 이렇게 늦었나?” 일엽 스님은 태연하게 침묵으로 답했다고 한다. 언뜻 들으면 성(性)적인 농담으로 들린다. 좀 더 들여다보면 상대의 공부를 가름하는 선문답이다. ‘어디서 헤매다가 이제야 자신을 찾아왔나?’라는 물음에 ‘헤매던 그 자리와 내가 선 이 자리가 둘이 아니다. 올 것도 없고, 갈 것도 없다’는 답을 침묵으로 던진 셈이다.

 만공 스님은 그런 일엽의 공부를 인가했다. 그리고 ‘도엽(道葉)’이란 법호를 내렸다. ‘세존의 견명성(見明星) 오도(悟道) 소식에’라는 일엽 스님의 게송이 있다. ‘예 이제 같은 별이 새삼스레 밝았으랴/밥상의 밥을 보고 밥인 줄 뉘 모르랴/다만 별빛의 꿈 돌려서 처음의 빛 얻음이라.’ 일엽 스님은 꿈 속의 밥, 꿈 속의 별을 허물었더니 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고 빛나는 밥과 별이 있더라고 노래했다. 비구니가 아니라 비구였다면 그의 선사적 면모가 이토록 오래 숨겨져 있었을까.

 말년에 건강이 악화됐다. 수덕사의 환희대란 암자에서 요양하다가 “나는 갈 때 대중처소에서 가고 싶다”며 평생 수행했던 견성암으로 옮겼다. ‘일엽 스님이 위독하다’는 소문에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들을 보며 스님은 “그럴 시간이 어디 있느냐. 가서 정진하라”고 타일렀다고 한다. 일엽 스님이 출가 후 30년 만에 썼던 책 『어느 수도인의 회상』(1960년)은 당시 베스트셀러였다. 최근 미국 하와이대 출판부에서 영문판으로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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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에 대한 설명글은 부산일보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수덕사는 번거로운 도회지 생활에서 벗어나 늘 찾아가 보고 싶던 곳이었다.' 1989년 작고한 고암 이응노 화백은 어느 날 이렇게 고백했다. 수덕사는 그에게 정신적 고향이었다. 그는 홍성 출신이다.

 

수덕사는 정확한 창건 연대가 남아있지 않다. 그저 백제 위덕왕 시절로 짐작된다. 고려 공민왕 때 나옹화상이 중수했고 만공선사가 중창했다는 사실만 확실할 뿐이다.

수덕사의 백미는 대웅전이다. 1937년 해체 작업 중 1308년 세웠다는 묵서명이 발견됐다. 고려시대 목조건물인 셈. 그 무렵, 옛 백제 땅을 중심으로 백제문화운동이 일었고 대웅전은 고려시대 것임에도 백제 것의 우아함이 담겼단다. 문화해설사 송애순 씨 설명이다. 우선 'ㅅ'자 맞배지붕은 단정하고 간결하고 힘차다. 허리 살짝 부푼 배흘림기둥과 곡선이 살아있는 공포는 아름답다. 문득 떠오른 한 건축가의 말. '건축 부재는 아름다움이 목적이 아니라 쓰임새의 결과로 아름다울 뿐이다.' 대웅전 측면과 후면은 정면과 사뭇 다른 분위기다. 뭐랄까, 정면이 옷 여민 엄숙함이라면, 측면과 후면은 단추 푼 편안함이랄까. 기둥과 들보가 이음과 맞춤으로 서로에게 의지해 완전한 면분할을 선사한다. 목탁소리 들으며 한참을 붙들렸다.

 

수덕사는 옛모습을 많이 잃었다. 중창불사가 과해서라 했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망가졌다' 했다. 그런데도 수덕사를 무한대로 사랑한다 했다. '으리으리한 사찰로, 화려의 극을 달리고 돈 냄새 물씬 풍겨 슬프지만 아무리 망가져도 거기에 대웅전 건물이 건재해서'다.

 

수덕사는 중창주 만공선사의 절이라 해도 과하지 않다. 수덕사 품은 덕숭산 중턱부터는 아예 '만공숲'이다. 수덕사 말사 정혜사, 산내 암자 견성암 모두가 그의 공 아닌 게 없다. 한 전각에 걸린 편액 '세계일화'는 그의 글씨다. 해방 소식 듣고 무궁화꽃에 먹을 묻혀 썼다. 세상은 한 송이 꽃. 너와 네가 둘이 아니다.

 

수덕사 일주문 왼쪽 숲에 터 잡은 수덕여관은 지어진 시기가 불분명하다. 그러나 고암의 본부인 박귀희 여사에겐 전부였음은 분명하다. 고암이 1944년 여관 사들인 후 박 여사 두고 프랑스로 떠났을 때도, 고암이 1967년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동백림사건)으로 옥고를 치를 때도, 고암이 옥살이 후 요양할 때도 박 여사는 여관과 고암을 돌봤다. 박 여사의 곡진한 챙김에도 고암은 다시 파리로 떠났다. 짧았던 봄날 붙들고 여관 지킨 박 여사는 2001년 눈을 감았다. 고암이 수덕여관 요양 시절 앞뜰에 암각화를 남겼다. 한글 자모 뒤엉킨 듯한 추상화였다. 고암은 "이게 사람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했단다. 하긴 엉키지 않은 삶이 어디 흔한가. 그래서 산다는 건 흔들리면서 살아간다는 것이 아닐는지. 참, 수덕여관은 경매에 붙여져 지금은 수덕사 문화 전시공간으로 쓰인다.

 

 

 

수덕사를 찾아 가면서 지난 덕산

네거리에 있는 명동다방이 눈에 확 들어 봅니다.

 

 

 

 

수덕사는 생각보다 찾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은 절입니다.

사찰 아래쪽에는 커다란 상가지역이 형성되어 음식도 팔고 기념품도 팔고 하고 잇네요.

담이 고무신 하나 살려다가 말았네요..^^

 

 

 

수덕사 일주문입니다.

엄청나게 큰 나무기둥인데 수입목으로서 인도네시아산이라네요.

요즘 이름은 일주문이지만 보조기둥을 세우거나 사주문인 곳이 많은데 이건 딱 일주문입니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가장 굵은 나무로 된 일주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일주문에서 수덕사 올라가는 길 옆에는 꽃무릇이 피어 있네요.

빨강색 꽃무릇이 아니고 분홍색이라 색다릅니다.

 

 

 

다시 작은 일주문도 지나고..

이 문 외도 본당 안으로 들어 가려면 두개의 문을 더 지나야 됩니다.

 

 

 

동방제일선원이라고 적혀 있는 문도 지나고...

 

 

 

본 절과 암자들을 모두 둘러 보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듯 하네요.

생각보다는 사찰 규모가 아주 큰 절입니다.

 

 

경향신문의 설명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수덕사를 소개 합니다.

 

수덕사는 5대 총림의 하나일 뿐 아니라 근세 불교의 선맥을 다시 이은 경허스님과 그 제자 만공스님이 주석했던 ‘선지종찰(禪之宗刹)’로 우리나라 근세 선불교의 고향과 같은 곳이다. 경허의 선풍(禪風)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우리의 불교가 다시 명맥을 이을 수 있었을까. 그래서 수덕사 위쪽에 있는 암자인 금선대는 경허스님과 세 달로 불리는 제자인 만공·수월·혜월 스님의 진영(眞影)을 모시고 있다. 전국 어느 사찰보다 활달하고 걸림없는 가풍을 지닌 덕숭총림 수덕사는 경허와 만공의 법맥을 잇는 덕숭문중을 이루며 범어문중과 함께 우리나라 불교의 양대 맥을 형성하고 있는 당당한 선의 종가이다.

 

 

 

 

하안거 대중결계 포살법회를 위하여 많은 스님들이 모였습니다.

큰 스님께 그늘을 만들어 주는 젊은 스님의 모습이 눈에 뜨입니다.

 

 

 

법회장면

 

 

 

 

 

 

 

수덕사 대웅전

 

수덕사 홈페이지에 수덕사 보수에 관한 내용이 있어 옮겨 봅니다.

 

수덕사 대웅전은 고려 충열왕 34년에 지어진 수덕사 본전 건물이다. 일제감정기 말 해체 복원하면서 명문이 발견되었다. 그 결과로 정확한 건축연대를 알 수 있었고, 봉정사 극락전, 부량수전과 더불어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측면 3칸, 정면 4칸의 주심포 양식으로 비록 일제에 의해서지만 최초로 수리보고서가 발간될 정도로 중요한 역사성을 가지고 있는 목조건축물이 몇몇 언론에 의해 부실공사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일제감정기 말 조선총독부는 이 수덕사 대웅전을 해체 복원하고자 했다. 이 공사는 일본인 목수 지전에게 맡겨졌는데 당시 수덕사의 만공스님은 '조선의 건축물을 왜놈에게 맡길 수는 없다'며, 인근 갑사에서 일을 하던 조선인 최고의 사찰목수 김덕희에게 공사를 맡긴다. 이 과정에서 총독부와 숱한 마찰을 겪기도 했다.

결국 '그렇다면 지전하고 김덕희 하고 누구의 실력이 좋은지 겨뤄보자'는 데까지 논의가 진행되었다. 송판 두 장을 대패질해서 노끈으로 칭칭 감아 우물에 던져놓고 하루를 재운 후 꺼내 더 오래 붙어 있는 쪽이 도편수(공사의 총 책임 목수)가 되고 다른 사람은 부편수가 되는 방식이었다. 그 대결에서 김덕희 목수가 승리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소중한 문화재를 우리 민족의 손으로 해체하고 복원할 수 있었다.

 

 

 

현존하는 유일한 백제사찰인 수덕사.

그 수덕사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대웅전.

 

안동 봉정사의 극락전과 부석사의 무량수전 다음으로 오래된 목조 건물이라고 합니다.

별도의 단청을 하지 않는 외벽의 기둥들이 참으로 매력적입니다.

 

 

 

 

 

 

 

 

 

 

 

편액의 양켠에 있는 용두가 서로 채색이 다르네요.

느낌엔 좌측의 암의 용, 우는 수의 용이 아닐까 생각을 하여 보면서..

 

 

 

 

 

 

 

제철인 배롱나무의 꽃과 함께 대웅전 외벽의 모습이 더욱 수수하면서도 단아하여 보입니다.

 

 

 

 

 

 

 

 

 

 

 

대웅전 정면 책대 앞으로는 드나들지 못하게 막아 두어 멋진 문살의 모습을 측면서 봐야 하네요.

이곳 대웅전도 부석사 무량수전과 마찬가지로 배흘림기둥이구요.

 

 

 

 

 

 

 

천년을 휠씬 넘긴 대웅전의 기둥.

나이의 흔적을 더듬는 손끝이 떨려 옵니다.

기껏 100년도 견디지 못하는 인간의 짧은 세상살이가 가엽어지기도 하구요.

 

 

 

 

 

 

 

 

 

 

 

 

 

 

 

절마당 한켠에는 가지가 연결된 커다란 나무가 있는데 사진으로는 연결 부위가 신비롭게 보이지 않는군요.

 

 

 

본 절 아래 비켜 있는 환희대

원통보전이 있습니다.

 

 

 

 

 

 

 

 

 

 

 

요즘 원두막들이 이런 형태를 벤치마킹 많이 하는데 이건 정말 멋지네요.

 

 

 

 

 

 

 

수덕사 바로 아래 왼편에 있는 수덕여관

차라리 안 봤으면 좋은 느낌으로나마 남아 있을 ..

뭔 복원이라고 하였는데 너무 졸스럽습니다.

가장 아쉬운 대목...

 

 

 

 

 

 

 

미술계의 세계적 거장 고암 이응로 선생과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인 나혜석이 머물렀던 곳...

이전에는 길손이 머물며 숙식도 가능했던 곳인데 새로 복원하여 지금은 전시용이 된 듯 합니다.

복원의 품격이 좀 졸(卒)하다는 생각을 지울수 없네요.

 

 

 

이응로 화백의 작품인 추상화 암각

 

 

 

수덕사를 들리고 내려오는 길에 만난 돌 조각품들

 

 

 

 

 

 

 

다시 커다란 일주문을 되돌아 나옵니다.

서산 여행도 이걸로 마무리 하구요.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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