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생필품 몇 가지가 필요하여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길을 나서는데..
올봄 텃밭에서 양파 캐시던 할머님을 오랜만에 뵙고 "할머님! 안녕하세요~" 인사를 드렸습니다.
귀가 잘 안 들리시는지 묵묵히 굽은 허리로 들깨만 정리를 하시고 계십니다.
생필품 구입 후 집으로 오는데 그때까지도 할머님은 일을 하시고 계십니다.
음료수 한 병 들고나가니 일을 끝내셨는지.. 유모차에 의지하고 귀가를 하시네요.
굽은 허리에 얹힌 세월의 무게를 덤덤하게 받아들이시는 할머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습니다.
..
가난했지만 넓은 어깨가 좋아서 그 청년을 따라 시집온 새댁
모질게 질긴 삶을 이어 가면서 자식을 키우고
모진 시집살이에 이리저리 치이면서 평생을 호미 들고 살다 보니
어느새 고랑처럼 깊은 굵은 주름만 남았네
한 평생 고랑에서 흘린 땀은 흔적도 없고, 향기 깊었던 꽃 같던 청춘은 기억에도 없고..
치성으로 키운 아들딸들은 무심히 구름처럼 오고 갈 뿐..
서러움마저 무뎌진 세월이라 그 누굴 원망하리..
잠시 저도 제 어머님 생각에 잠겨 봅니다.
큰 딸 첫돌잔치 후.. 냉면을 좋아하시는 어머니를 모시고 식당에 갔습니다.
냉면을 앞에 두시고 하시는 말씀이...
"내가 아범에게 냉면을 대접받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제가 얼마나 말썽을 피웠으면 저런 말씀을 하셨을까.. 죄송한 마음이었습니다.
그 후 어머니는 당신의 일생을 틈틈이 저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소련에서 음악 공부를 하셨고, 평양에서 제일 큰 여관집으로 시집을 가셨다고 합니다.
6.25 피난으로 가족과는 생이별하고, 피난 온 남한산성 근처에서 소나무 속껍질을 먹다가 몸이 퉁퉁 불었는데..
다행히 인정 많으신 아주머님 덕분에 살았다고 하시더군요.
어린 시절 저는 어머니를 가끔은 이해를 못 했습니다.
가난한 살림에도 딱한 사정이 있는 친척분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내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영화를 무척 좋아하셨고, 음악도 즐겨하셔서 늘 라디오를 틀어 놓고 계셨습니다.
늘 쪽 찐 머리에 단정한 한복만 입으셨습니다.
어린 저는 그런 어머니가 싫었습니다.
다른 친구들 어머님들은 이쁘게 화장도 하시고, 화사한 옷차림에 파마를 한 모습이 더 좋아 보였습니다.
언젠가.. 친구들과 남한산성에 놀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한 주점에서 친구들과 파전에 막걸리 한 잔 하는데 비가 억수로 내리더군요.
그때 갑자기 어머니 피난시절 남한산성 소나무 껍질 생각이 떠 올라서..
억수로 내리던 비를 맞으면서 잠시 어머니가 그리워 훌쩍거렸습니다.
이 나이에도 술 한 잔 하면, 어머님 생각에 눈물이 난다는 게 신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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