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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일기

디테일의 묘미, 도동서원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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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동서원을 둘러보고 있는데 아이 둘을 데리고 온 가족이 들어 왔습니다.
4,5학년쯤 되어 보이는 큰 아이는 카메라로 연신 이곳저곳을 찍고 작은 아이는 돌로 만든 장식물에 올라 놀이터마냥 놀고 있습니다. 엄마와 아빠는 곁에 그런 모습을 쳐다보고 있구요.
사진을 찍고 있는 큰 아이를 불러 중정당 석축아래 용머리를 가리키며 4개 중 진짜는 하나뿐이고 나머지는 짜가인데 진짜 하나를 찾아 보라고 하니 쉽사리 찾습니다. 그리곤 아주 신기해 합니다. 그 다음 다람쥐 두마리가 있는데 그것도 한번 찾아보라고 하였습니다. 잠시 후 아이의 환호성이 들립니다. 조금 있으니 온 가족이 모여서 흡사 보물찾기를 하듯히 이곳저곳을 관찰하며 재미있어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옛 문화재를 둘러보는 일은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대로 거슬러가서 그때 그곳에 살았던 주인공들을 만나는 일입니다.
그 시절의 사람과 만나 이야기도 나누고 그때 역사를 풀어보는 것은 참으로 재미있는 여행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행지를 찾기 전에 그곳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습취한 다음 찾아가는 것이 순리일 것입니다. 여행의 재미가 배가 되고 더욱 의미가 새로워 집니다. 이곳 도동서원에 대한 내용은 여러곳에 다양하게 나와 있지만 요즘 1박2일로 뜬(?) 전 문화재청장 유홍준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권을 추천합니다.

도동서원(道東書院)은 우리나라 도학(道學)의 대종(大宗)인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 선생을 모신 서원입니다. 김굉필에 대하여는 아래 본문에서도 자세히 소개되겠지만 평생 소학(小學)만을 학습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서원이 있는 이 지역은 이전에 현풍이란 지명을 사용하였는데 그의 증조부가 현풍곽씨와 결혼하여 처가가 있는 이곳으로 내려와 살면서 터를 잡은 곳입니다. 나이 36세때 벼슬길에 나가 이런저런 벼슬을 하다가 김종직의 무오사화로 평북 희천(熙川)으로 귀향을 갔다가 그뒤 연산군때 갑자사화가 일어 귀양지에서 51세의 나이로 사사당하였습니다.

이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 그는 그 뒤 중종때 과거의 원통한 일이 모두 해명되어 도승지로 증직받고 선조 8년에는 다시 영의정으로 문경공(文敬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가(수정내용: 문경공의 시호가 내려진 시기는 영의정 추증을 받고 2년 뒤인 1577년 선조 10년입니다. 영의정과 문경공 시호가 같이 내려진것처럼 표기되어 내용을 수정합니다.) 1610년 광해군때는 우리나라 가장 뛰어난 현인으로 지칭되는 동방오현(東方五賢)의 수현(首賢)으로 성균관 문묘(文廟)에 배향을 받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현재 김굉필선생의 묘소는 서원 뒷편으로 800m를 올라 대니산 중턱에 모셔져 있습니다.

조산 후기 대원군은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전국의 수백개의 서원을 화끈하게 철폐하였지만 그 중에서 주향지별로 하나씩 대표적인 서원 47곳만은 남겨 두었지요. 이때 살아남은 서원 중 우리나라 5대 대표서원이라고 일컷는 곳이 바로 병산서원, 옥산서원, 소수서원, 도산서원, 그리고 이곳 도동서원입니다. 현재 문화재청에서는 이곳 도동서원 외 9곳의 서원이 유네스코(UNESCO 세계유산의 잠정목록에 등재 확정됐다고 밝혔는데 잘하면 도동서원이 우리의 귀중한 문화재를 넘어 세계인의 보물이 될 예정입니다.

도동서원의 관람 뽀인트는 서원을 둘러보기 전 다람재에 먼저 올라 풍경을 즐기는 것으로 시작한 다음 내려와서 서원 이곳저곳에 자리한 디테일한 돌조각과 중정당 석축의 짜임새 있는 조화로움, 그리고 이곳에서 내려다 보이는 낙동강의 풍경, 마지막으로 환주문(喚主門) 아랫단에 있는 뒤늦게 증축한 수월루(水月樓)를 뽀개 없애야 되나 말아야 되나 하는 걸 나름대로 결정해 보는 것들입니다.
모두 둘러봐도 시간이 그리 많이 걸리지 않으므로 이곳과 함께 인근에 있는 달성보와 노을공원을 들려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도동서원 지도. 낙동강이 휘감아 도는곳에 위치하여 경관이 아주 좋습니다. 인근의 달성보와는 자동차로 약 20 여분 거리.

 

다람재.
왼편에는 다람재라고 쓴 돌간판이 있고 중앙에는 조망을 즐길 수 있는 정자, 그리고 오른편에는 김굉필의 詩 노방송(路傍松)을 새긴 시비가 있습니다.

 


一老蒼髥任路塵 (일로창염임로진)   늙은 소나무 하나 푸르게 길가에 서있어
勞勞迎送往來賓 (노로영송왕래빈)   오가는 길손을 수고로이 맞고 보내네
歲寒與汝同心事 (세한여여동심사)   찬 겨울에도 너와 같이 변하지 않는 마음
經過人中見幾人 (경과인중견기인)   지나가는 사람중에 몇이나 보았느냐

 

여름철이나 가을에 와서보면 더욱 경치가 좋을것 같네요.
도동서원과 낙동강이 그림처럼 내려다 보입니다.

 



 



 

낙동강 수변공원을 조성하고 있어 이전의 호젓한 풍경이 인위적으로 바뀌져 버렸습니다.
이점을 안타까워 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도동서원에 들어가기 전 주차장 옆에 서 있는 거대한 은행나무.
김굉필나무라고도 하는데 수령이 400년 정도 되었다네요. 연세가 꽤 되어 시멘트로 된 지팡이를 여럿 집고 있습니다.
가을에 은행나무 잎이 떨어질무렵 꼭 한번 더 와 봐야 할 것 같네요.

 

외삼문으로 입구역활을 하는 수월루(水月樓). 2층 누마루로 되어 있으며 서원과는 담장으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지금 자리에 서원을 지은 연대가 1604년이고, 이 수월루는 그 뒤 철종 6년(1855)에 증축한 것입니다.
낙동강의 경치를 보며 풍류를 즐기는 역활은 한 듯하지만 전체적인 구도로 봐서는 어울리지 않는 건물로 대다수 평가하고 있습니다.
(아래 사진 중 중정당에서 내려다 본 사진 참고)

수월루 지나 돌계단을 오르면 만나는 환주문(喚主門)입니다.
머리를 숙이지 않으면 갓쓴이는 갓이 망가질 정도로 살짝 낮게 되어 있는데 모두가 겸손과 오만을 가르치는 조상님들의 지혜입니다.
이 환주문 양켠으로는 수막새 기와로 별무늬를 넣은 아름다운 담장이 쳐져 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유일한 보물로 지정된 담장입니다.

 

 



 

환주문의 지붕은 눈여겨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는데 사모지붕에 진흙으로 구운 절병통(節甁桶)이 얹혀져 있습니다.
이것이 있다고 하여 다시 눈여겨보면 아주 특색있게 보여집니다.

 

바닥에는 문지방이 없고 꽃봉오리 모양으로 만든 돌부리가 있는 것도 특징입니다. 

 

문이 낮아 머리까지 숙여야 하는데 문지방에 있어 발까지 들고 넘어가야 한다면 너무 엉거주춤한 모양새가 될까요?
이걸 방지하기 위하여 문지방을 없애고 저렇게 예쁜 돌부리를 박아 둔 것일까요?

 

강당인 중정당(中正堂)입니다.
이곳과 마당 양편에 있는 사당건물 2채, 그리고 위에 설명한 담장이 모두 같이 보물(보물 제380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기둥에는 흰 한지를 둘렀는데 이는 동방 5현인 김굉필선생을 모신 곳임을 널리 알리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무심결에 발에 밟히지만 그냥 모르고 지날 갈 거북이 머리.
환주문에서 중앙 돌길을 따라 중정당으로 가는 길에 낮은 단을 만나는데 이곳 가운데 장식되어 있습니다.

 

중정당 측면의 석축.
이런돌 저런돌 각각의 크기와 모양을 제대로 살려 이를 딱딱 맞춰 쌓아 둔 모양에서 아..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옵니다.
이 감탄사는 앞마당에서 보는 중정당 석축에서 더욱 더하게 되지요.

 

석축의 머릿돌 아래에는 4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물고있는 돌조각이 박혀 있는데 못된 넘들이 탐을내는 바람에 한개만 진짜배기를 박아 두었고 나머지는 복제품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요거이가 진짜. 나머지는 복제품. 나머지 진짜배기 3개는 박물관에 따로 보관되어 있다고 하네요.
모양과 색깔이 약간 달라 쉽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석축 양켠에는 세호(細虎)라고 이름 붙여진 다람쥐 모양의 조각이 새겨져 있습니다. 한마리는 위로.. 한마리는 아래로..
왜 세호라고 이름을 붙였을까요?
모든 자료에는 모두 다람쥐라 표현하고 있는데 제가 생각할때는 말 그대로 세호(細虎)가 아닐까 합니다. 다람쥐가 아니고 새끼 호랭이...
다람쥐가 새겨져 있으면 이해가 잘 안되지만 호랑이가 새겨져 있으면 뭔가 이야기가 되는듯 하네요.

 

조각보 공예품을 연상시킵니다.
색상도 다르고 규격과 크기도 다른 돌을 다듬어 딱 제자리에 맞췄습니다.

이 석축의 모양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주역 계사전(繫辭傳)의 내용을 인용하면,
'한 번은 음(陰)이 되고 한 번은 양(陽)이 되는 것이 도(道)라고 한다. 도(道)는 음양의 2기가 잘 어울려서 변화하는 법칙을 말한다. 음양이 서로 잇고 짝하며 서로 맞대고  맞물려서 조화를 이루어서 만물을 낳고 끝없이 변화하는 원리이다. 한 번은 음이되고 한 번은 양이 되어 음양이 서로 반대하고 대립하면서도, 서로 옮기고 바뀌면서 하나로 합하고 있다. 위와 아래(上下), 해와 달(日月), 추위와 더위(寒暑) 그리고 밝음과 어둠(明暗) 등 서로 반대하는 성질이 모여서 긴밀하게 조금의 틈도 없이 화합을 이루는 것이 조화이다.'
참으로 우리 조상님들의 지혜로움을 다시 한번 새기게 됩니다.


 

중정당 올라가는 계단도 같은 아름다움이 느껴지구요.

 

중정당 대청마루앞에는 네모로 장식한 정요대(庭燎臺)라고 하는 조명시설.
제사때 이곳 관솔불을 피워 조명을 밝히는 시설물입니다.

 



 

중정당 앞 마당에는 좌우로 학생들의 기숙사 역활을 한 동재(東齋)와 서재(書齋)가 있습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중정당 내부에 걸려있는 선조가 직접 이름을 지어 하사한 도동서원 현판.
이 현판을 하사받고 나서 동네이름도 도동으로 바꿨습니다.  

 

서원의 학칙인 원규(院規)가 적혀 있는 현판. 요즘으로 치면 교칙.

 

중정당 마루에 올라 내려다 본 픙경.

 

맨 앞의 수월루 건물이 있는 것이 좋을까 없는 것이 좋을까 하는건 보는 사람의 판단이지만 제 생각에는 헐어버리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입니다.

 

중정당 오른편인 서편마당에 있는 생단(牲壇)이라는 이름의 네모난 판석.
제사용 고기의 신선함등을 판단하여 적합한지 아닌지를 테스트했던 곳입니다.

뒷칸으로 돌아가면 후원이 나타납니다.
수령이 제법 된 목백일홍이 몇 그루 있고 예쁜 화단이 잘 꾸며져 있는데 봄이되면 아주 아름다울것 같네요.
이곳에는 흡사 하늘로 올라가는듯한 멋진 자태의 돌계단이 있습니다.
다양한 각도로 층을 두어고 양가로 마감을 한 이 돌계단의 모양은 도동서원의 숨은 보물이 아닐까 합니다.
돌계단을 올라가면 나타나는 내삼문. 그리고 그것을 열면 사당이 나타납니다. 이곳은 문은 닫혀있고 일반인들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사당입구에 도달하려면 이 요상한 돌 조각품을 만나게 되는데 뭣인지는 모르지만 코꾸녕이 뻥 뚫려 정면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 돼지형태와 유사합니다.

 

자세히 보니 이런 꽃무늬도 조각되어 있구요.
그야말로 디테일 백화점입니다.

 

사당 내부는 문뜸사이로 빼꼼히 들여다 보는 것으로 만족.

 

사당에서 내려다보는 지붕선이 참 아름답습니다.

 

둘러보면서 발견한 것인데 중정당 뒷편 기둥 하나와 환주문의 일주문 하나가 통나무가 아닌 두개의 나무를 포개서 기둥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온전한 기둥 하나를 짤라내고 남겨진 자투리 반토막기둥을 재활용 한것이 아닐까 추리하여 봅니다.

 

담너머로 잔가지를 숱하게 키워 내다보고 있는 목백일홍(배롱나무).
꽃이피면 정말 예쁠 것 같네요.



아래글은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선생의 일대에 관한 내용입니다.
제 글 본문에서 한훤당(寒喧堂)에 관한 내용이 미흡한 것 같아 도움이 될 내용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 내용은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이자 詩人인  이하석님의 글로서 영남일보에 기고된 글입니다.


소학을 평생 삶의 지침서로 삼다.

총명하게 생긴 청년이 왔다.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있을 때였다. 그 청년은 자신을 김굉필이라 소개했다. 스물 한 살의 아주 활달하고 강직한 느낌을 주는 청년이었다. 김종직은 김굉필의 절을 받고 나서 물었다.

“그래, 공부는 언제부터 했는가?”
“어릴 적부터 책을 읽었습니다.”
“어떤 책을 즐겨 읽었는가?”
“창려집(昌黎集)이 좋아 자주 읽곤 했습니다.”

중당(中唐)의 문호 한유(韓兪)의 문집을 말하자, 김종직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렇군. 어쩐지 젊은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여겼더니, 역시 그렇군.”

김종직은 혼자 말처럼 중얼거렸다. 한유는 자가 퇴지이며, 호가 창려로 당나라 때의 문호이자 사상가다. 당시 유행하던 변려문체에 반대하여 고문(古文)을 주장, 새로운 문체의 물꼬를 튼 이였다. 특히 도를 숭상하여 그 자세가 삼엄한 바가 있었다.
김종직이 물었다.

“창려집에 ‘귀한이건 착한이건 어른이건 아이건 구분 없이 도가 있는 곳이 스승이 있는 곳이다’라고 했다. 자네도 그 말을 신봉하는가?”
“그 말을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실천이라. 그래, 실천이 특히 중요한 일이지.”

김종직은 다시 한 번 젊은이를 찬찬히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자네에게 줄 책이 있네.”
“?”

김종직은 책장에서 책을 한 권 꺼내어서 김굉필에게 건넸다. ‘소학(小學)’이었다. 뜻밖이었다. 천하의 김종직 선생이 준다기에 근사한 책이겠지 하고 기대했는데, 기껏 어린애들이 읽는 ‘소학’이라니 말이다.

“물론 ‘소학’은 다 읽었겠지?”
“…”

스승의 의도를 몰라 김굉필은 말없이 책을 바라보기만 했다. 김종직은 웃음을 띠며 말했다.

“자네가 진실로 학문에 뜻을 둔다면, 마땅히 ‘소학’부터 다시 읽어야 하지 않겠나? 자네도 알겠지만, 소학은 수준이 낮지 않네. 주희 선생이 제자 유자징에게 지시하여 뭇 고전의 내용 중 핵심을 뽑아 엮은 것이니, 주희 사상의 핵심이며, 유교의 기반이 되는 것이지. 다시 찬찬히 읽고 생각하게.”

김굉필은 김종직의 간곡한 뜻을 바로 알아들었다. 고마움의 표시로 절을 하고 물러나오면서 가슴에다 ‘소학’을 꼭꼭 품었다. 비로소 공부의 눈이 뜨이는 느낌이었다. 공부란 기이한 것을 탐구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아주 가까이 있는 것을 살피고 실천하는 것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이후 ‘소학’은 김굉필의 필독서로 공부하는 틈틈이 읽고 또 읽었다. 그 뜻을 살피고, 실천하는 일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마침내 ‘소학’이야말로 그의 사고의 밑바탕을 이루었고 행동의 지침서가 되었다. 함께 공부하는 학우들은 그런 김굉필을 이상하게 여기는 눈치였다. ‘대학’을 뗀 지도 한참을 지난 땐데, 뒤늦게 ‘소학’에 열중하다니 라는 표정이었다. 김굉필은 그런 학우들에게 “여보게, 나는 ‘소학동자(小學童子)’라네”라며 당당하게 ‘소학’을 꺼내들어 보였다.

때로 사람들이 나라 일에 대해 물으면 “소학을 읽는 이가 어찌 대의를 알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먼저 닦는 게 우선이라는 걸 그런 말을 통해 넌지시 일깨우는 것이었다. 그는 서른이 넘어서야 비로소 다른 책을 읽기에도 열심이었지만, 여전히 소학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는 ‘소학을 읽으며(讀小學)’라는 시에서, “글공부를 해도 천기를 알지 못하더니, 소학에서 어제까지의 잘못을 깨달았구나”라고 했다. 김종직은 이 시를 읽고는 “이는 성인이 될 바탕을 드러낸 것이다”라고 극찬했다.

김굉필의 ‘소학’에 대한 재평가는 이후 학문하는 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조선 사회에 소학을 실천윤리의 기본교재로 삼고자했던 유학 풍조를 정착시키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이다. 그래서 퇴계 이황은 “지금까지 도학을 공부한 이들이 있었지만, 그 결과는 경서강독이나 문장을 짓는데 그쳤다. 오로지 몸을 닦는 것을 일삼아 참다운 실천으로 공부한 사람은 오직 한훤당(김굉필의 호)뿐이었다”고 했다. “한훤당의 학문이 깊어져 덕이 성취되고 행실이 우뚝하게 높아서 한 시대의 종사(宗師)가 된 것도 모두 소학으로 표준을 삼았기 때문”(김원행)이라는 평가를 듣기도 한다.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참수되다

김굉필은 어릴 적부터 의리를 좇는 기상이 남달랐다. 그가 즐겨 읽은 한유의 글 가운데 서사문의 걸작으로 꼽히는 ‘장중승전후서(張中承傳後敍)’에서 장순이 남제운을 부르면서 “남팔(南八)아, 남아가 죽을지언정 불의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라는 대목에 이를 적마다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읽으면서 매번 눈물을 흘렸다. 그런 사람이라 그 기상이 언제나 올곧을 수밖에 없었다.

남명 조식이 남긴 김굉필의 일화가 있다.
김굉필이 친구들과 같이 거처하면서 공부할 때다.

“우리 닭이 울면 함께 앉아서 각자 숨 쉬는 걸 세어보는 게 어떤가?”
“그거야 쉽지.”

그리하여 모두 닭이 울 때 함께 둘러앉았다. 각자 자기의 숨을 세기 시작했다. 밥 한 솥을 지을 시간이 지나자 모두들 지치기 시작, 세는 걸 잊어버렸다. 다만 김굉필만이 날이 새도록 숨 쉬는 걸 세는 걸 놓치지 않았다.
이를 두고 그의 마음공부가 참으로 한 수준에 올랐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그의 분명하고도 실천력 있으며, 의리를 지키는 태도를 보여주는 예가 ‘한빙계(寒氷戒)’다. 자신에게 공부를 가르쳐 달라고 찾아온 반우형에게 준 글이다. ‘한빙’은 “얼음은 물에서 나왔지만, 물보다 차갑다”는 의미다. 그 내용에 “갓을 바로 쓰고 꿇어앉아라. 옛 버릇을 철저하게 없애라. 욕심을 막고 분함을 참아라. 가난에 만족하며 분수를 지켜라. 사치를 버리고 검소함을 따르라. 날마다 새로워지는 공부를 하라.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 마음을 한결같이 하여 두 갈래로 하지 마라. 마지막을 시작할 때처럼 조심하라” 등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지침은 스스로를 경계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실천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이런 그의 태도는 죽음 앞에서도 당당했다. 1504년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에 연루된 사실은 유명하다.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김일손에 의해 사초에 올려지자 이를 훈구대신들이 악의적으로 해석하여 김종직을 대역죄로 몰아갔다.

이 사건은 김종직이 부관참시되고, 이어서 그 문하들을 연루시켜 참담한 옥고와 유배를 치르게 하는 일로 확대됐다. 당연히 김굉필도 연루됐다. 평안도 회천으로 귀양을 갔다. 그곳에는 평안도 어천의 찰방(지금의 역장)으로 있는 아버지를 따라온 조광조가 있었다. 17세의 조광조는 인근에 있는 회천으로 김굉필을 찾아와 제자가 된다. 2년간의 가르침은 조광조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어서 순천으로 귀양지를 옮겼는데, 이후 참수하라는 어명을 받았다. 죽음의 통지를 받은 김굉필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태연하게 목욕을 했다. 의관을 바로 하고 뜰에 내려섰다. 문득 신이 벗겨졌다. 그는 천천히 신을 다시 고쳐 신었다. 칼로 목을 치려하자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 어버이에게 받은 몸이니 함께 상함을 받을 수 없다”면서 수염을 쓰다듬어 입에 물고는 죽음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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