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번국도 여행 - 금강산 건봉사

Posted by 두가 여행 일기 : 2014.08.18 23:02

명파해수욕장에서 하루 묵고 7번국도를 타고 내려 오다가 들린 곳이 건봉사입니다.신라 법흥왕 서기 520년에 창건되었다고 하니 절이 자랑하는 1500년 역사가 맞긴 하네요. 아주 오래된 고사찰이지만 6.25때 거의 소실되어 지금은 중창공사가 계속 진행되고 있는 곳입니다. 한때는 우리나라 4대사찰의 하나 였다고 하니 그 규모가 대단했던것 같습니다.

 

명파해수욕장에서 내려 오다가 이곳을 찾아 가는데는 군인들이 총을 들고 지키는 검문소를 두 군데나 통과해야 하는데 절을 찾아가면서 이런 경험은 처음입니다. 남과 북이 하나일때는 금강산의 일원으로 속한 곳이라고 여겨지는데 지금은 서로가 단절이 되어 버렸으니 금강산 건봉사란 이름이 너무 아쉽게 들려지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전에는 민간인 출입이 금지된 곳이었다가 1988년부터 해제가 되어 일반인들의 출입이 가능한 곳이라 합니다.

 

 

절의 이력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 인용하여 옮겨 놓습니다.


6·25전쟁 전까지는 31본산의 하나였으나,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神興寺)의 말사이다. 520년(법흥왕 7) 아도(阿道)가 창건하고 원각사라 하였으며, 533년(법흥왕 20) 부속암자인 보림암(普琳庵)과 반야암(般若庵)을 창건하였다. 758년(경덕왕 17) 발징(發徵)이 중건하고 정신(貞信)·양순(良順) 등과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10,000일 동안 염불을 계속하는 모임)를 베풀었는데, 이것이 우리 나라 만일회의 효시이다.

 

여기에 신도 1,820명이 참여하였는데, 그 중 120명은 의복을, 1,700명은 음식을 마련하여 염불인들을 봉양하였다. 782년 염불만일회에 참여했던 31명이 아미타불의 가피를 입어 극락왕생하였고, 그 뒤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이 차례로 왕생했다고 한다.

 

810년(헌덕왕 2) 승전(勝詮)이 당나라 현수(賢首)에게서 화엄학을 배우고 귀국하여 ≪화엄경≫을 강설하였고, 845년(문성왕 7) 백화암(白華庵)을 창건하였다.

 

신라 말에 도선(道詵)이 중수한 뒤 절의 서쪽에 봉형(鳳形)의 돌이 있다고 하여 서봉사(西鳳寺)라 하였으며, 1358년(공민왕 7) 나옹(懶翁)이 중건하고 건봉사라 하였다. 1464년(세조 10) 세조가 이 절로 행차하여 자신의 원당(願堂:소원을 빌기 위한 지정 사찰)으로 삼은 뒤 어실각(御室閣)을 짓게 하고 전답을 내렸으며, 친필로 동참문을 써서 하사하였다.

 

이 때부터 조선왕실의 원당이 되었는데, 성종은 효령대군(孝寧大君)·신숙주(申叔舟)·한명회(韓明澮)·조흥수(趙興洙) 등을 파견하여 노비와 소금을 하사하고 사방 10리 안을 모두 절의 재산으로 삼게 하였다.

 

1523년(중종 18) 보림(普琳)이 이 절과 보림암을 중수하였고, 1605년(선조 38) 유정(惟政)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오면서 불사리와 부처님 치아를 되찾아와서 이 절에 봉안한 뒤 1606년에 중건하였으며, 혜능은 안양암(安養庵)과 적명암(寂明庵)을 중건하였다.

 

1673년(현종 14) 수흡(修洽)과 도율(道律)이 1,200근의 범종을 주조하여 봉안했고, 1683년(숙종 9) 명성왕후(明聖王后)가 시주한 1,000금으로 불상을 개금(改金)하였다. 이 때 명성왕후는 불장(佛帳)과 탁의(卓衣)도 시주하였다.

 

1708년 능파교(凌波橋)의 비(碑)를 세우고 동대암(東大庵)을 창건하였으며, 1724년(경종 4) 주지 채보(彩寶)가 구층탑을 건립하고 부처님의 치아를 봉안하자 명성왕후가 천금을 내렸다.

 

1726년(영조 2) 석가치상탑비(釋迦齒相塔碑)를 세웠으며, 육송정석교(六松亭石橋)를 중건하고 비를 세웠다. 1754년 정성왕후(貞聖王后)가 상궁 이씨와 안씨를 보내어 석가상을 만들게 하고 팔상전을 세워 원당으로 정하였으며, 8월에는 영조가 숙종의 어제절함도(御製折檻圖)와 어필서(御筆書)를 내려 어실각에 봉안하도록 하였다.

 

1799년 강원도 순찰사 남공철(南公轍)이 유정의 기적비(紀績碑)를 세웠고, 1802년(순조 2) 용허(聳虛)가 제2회 염불만일회를 열었으며, 1804년 왕비 김씨가 금 1,000금과 오동향로·오동화준(梧桐花樽)·양산 등을 내려 순조의 성수를 축하했다. 1805년 왕비 김씨는 나라를 위한 재(齋)를 올리고 병풍과 ≪화엄경≫ 1부를 하사하였으며, 1828년 유정의 영각(影閣)을 지었다.

 

1851년 유총(侑聰)이 제3회 염불만일회를 열었고, 1865년(고종 2) 화은(華隱)을 청하여 강원(講院)을 개설하였는데, 이 때부터 대표적인 강원의 하나로서 많은 강사들을 배출하였다.

 

1878년 4월 3일 산불이 일어나서 건물 3,183칸이 전소되었는데, 이 때 학림(鶴林)이 불 속에 뛰어들어 팔상전의 삼존불상과 오동향로·절감도 등을 꺼내었다. 1879년 개운사·중흥사(重興寺)·봉은사·봉선사(奉先寺)·용주사 등의 도움을 얻어 대웅전·어실각·사성전·명부전·범종각·향로전·보안원·낙서암·백화암·청련암을 중건하였다.

 

1881년 관준(寬俊)이 제4회 염불만일회를 설하였고, 1885년 운파(雲坡)가 모연금으로 대웅전·관음전·명부전·사성전의 문을 개조하고 대웅전 후면을 돌로 쌓았으며, 1886년 명례궁(明禮宮)의 토지를 매입하였다. 1888년 청련암과 대원암이 불탔으며, 1889년 인파(仁坡)·관준 등이 팔상전·진영각·노전·극락전을 중건하였다.

 

1891년 신정왕후(神貞王后)의 소상재를 올렸고, 범운(梵雲)이 부처님 치아를 천안 광덕사에서 받아 와 팔상전에 봉안하였으며, 1894년 관준이 선원(禪院)을 만들었다. 1906년 사적비를 세웠고, 어산청범음계(魚山廳梵音契)에서 석가영아탑봉안비(釋迦靈牙塔奉安碑)를 세웠으며, 봉명학교(鳳鳴學校)도 설립하였다. 1908년 제4회 만일염불회를 회향한 뒤 의중(宜重)이 제5회 염불만일회를 열었다.

 

1911년 조선사찰령에 따라 31본산의 하나가 되었으며, 9개 말사를 관장하게 되었다. 또한 상해에서 신간 대장경 일부를 구입하여 봉안했으며, 1914년 소신대(燒身臺)에 31명의 부도를 세우는 한편 간성군에 포교소를 세웠다.

 

1917년 팔상전과 낙서암을 중수하였고, 1918년 능허(凌虛)와 경해(景海)가 극락전을 중수하였으며, 운파는 중종(中鐘) 5좌(坐)와 불기(佛器) 30좌를 비치하였다.

1919년 능허가 1,000원을 시주하여 불이문(不二門)과 영빈관·별실·문수교를 새로 세우고 산영교(山映橋)를 고쳤다. 1920년 인천 포교당과 봉림학교(鳳林學校)를 세웠으며, 한암(漢巖)을 청하여 무차선회(無遮禪會)를 베풀었다.

 

1924년 사무소를 중수하고 극락전과 만일회의 부속건물 등을 중건하였으며, 1926년 불교전문강원을 설치하고 공비생(公費生) 30명을 양성하였으며, 불상 7위(位)를 개금하고 장구사(葬具舍)를 세웠으며, 덕성(德性)의 주재로 제5회 만일염불회를 계승하였다.

 

6·25전쟁 때 이 절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는데, 당시까지 현존하였던 당우로는 대웅전·관음전·사성전·명부전·독성각·산신각·단하각·진영각·범종각·봉청루·보제루·대지전·동지전·서지전·어실각·어향각·동고·낙서암·극락전·만일원·보안원·선원·원적암·사무소·불이문·여관·장의고·성황당·수침실(水砧室) 등 총 642칸에 이르렀다.

 

중요 문화재로는 도금원불(鍍金願佛)·오동향로·철장(鐵杖)·대종·절감도·차거다반(硨磲茶盤) 등과 불사리탑 등 탑 8기, 부도 48기, 비 31기, 고승 영정 44점 등이 있었다.

또 부속 암자로는 보림암·백화암·봉암암·극락암·백련암·반야암·청련암·대성암·적명암·보리암·보문암·대원암·일출암·안양암·동대암·망해암 등이 있었다.

 

현재 고성 건봉사지는 강원도 기념물 제51호로 지정되었고, 6·25전쟁 때 유일하게 불타지 않은 불이문은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5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밖에도 능파교와 십바라밀을 상징하는 조각이 새겨진 두 개의 돌기둥, ‘대방광불화엄경’이라고 새겨진 돌기둥 등이 있다.

 

 

 

 

 

 

 

 

 

 

 

요즘 여행에서 가장 눈에 뜨이는 꽃이 목백일홍입니다.

 

 

 

 

 

 

 

불이문..

6.25때 유일하게 불에 타지 않은 건물이라합니다.

머리 깍고 이곳으로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다는 不二門

 

 

범종각 뜰에도 목백일홍이 아름답게 피어 있네요.

 

 

 

사진을 찍고 있는 이의 앞쪽에 있는 다리가 능파교로서 보물로 지정이 되어 있습니다.

건너편으로는 대웅전을 비롯한 본절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도랑을 경계로 절은 두 권역으로 나눠지는데 이쪽은 적멸보궁이고 건너편은 대웅전권역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적멸보궁 올라가는 길

 

 

 

조그만 연못에 홍연과 어리연이 가득 합니다.

 

 

 

 

 

 

 

적멸보궁

 

 

 

 

 

 

 

 

 

 

 

보궁의 계단

이곳에는 신라의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 온 진신치아사리가 모셔져 있다고 합니다.

 

 

 

 

 

 

 

 

 

 

 

 

이곳저곳에 이상한 무늬를 새긴 석주들이 많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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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8.19 05:56 신고 에디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혹 여기 건봉사 들르셨다 <산북 막국수>라고 국숫집 못 보셨는지요?
    아마 전세계에서 검문소에 민쯩 보여주고 들어가 먹는 식당은 여기뿐이 없을겁니다.
    또 사람들이 건봉사는 몰라도 이 막국숫집 찿아왔다 건봉사를 들르곤 하지요. 참말로 ....ㅜㅜ
    다른 건봉사에 관한 에피소드를 얘기하자면,
    이동네에는 마트나 편의점이 없는데 딱! 하나 조그만 구멍가게가 있는곳이
    바로 건봉사 경내입니다.
    전에 스님들과 <설레임>을 같이 쭉! 쭉~ 빨아 먹었던적 있는 건봉사입니다.ㅎ

    • Favicon of http://duga.tistory.com BlogIcon 두가 2014.08.19 21: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북쪽에서 내려 오면서 화진포 지나 내륙으로 들어가서 찾은 건봉사라 음식점을 별로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저희가 찾아 들어간 길로는 군부대만 잔뜩 있고 민가는 거의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건봉사에 들리니 사람들이 많이 찾아 와 있던데 아마도 남쪽 고성쪽에서 올라 온 듯 합니다.
      암튼 군부대 검문을 받아 가며 찾아 간 건봉사는 특이한 절집이었습니다..^^

  2. 2014.08.20 08:22 신고 하마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건봉사...적멸보궁이 있는 사찰이군요.
    검문을 통과해야 볼수있어서 그런지 방문객이 많지 않아 보입니다.
    능파교를 건너고 양쪽으로 나뉜 연못 그리고 석주들이 보통 절과는 다른면을 보이는것같습니다.
    늘 보면서 감탄하지만 두가님의 사진한장 한장은 예사로운게 없습니다. ^^*

    예전에 건봉사 경내에서 스님들과 설레임을 함께 공양하시던 에디님의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ㅋㅋㅋ^^

    • Favicon of http://duga.tistory.com BlogIcon 두가 2014.08.20 21: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리저리 우리나라 절집들을 둘러보면 근간에 갑자기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이 너무나 많아졌다고 느껴집니다.
      과장하면 없는 곳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조금 식상한 면도 잇지만 이곳 건봉사의 적멸보궁은 그 지역적인 위치로 인하여 특이하게도 와 닿는 절집 같습니다.
      군인들의 검문을 두번이나 받고 들어가는 점도 생경스러웠구요.
      두개의 석주가 나란히 서 있는 곳에는 기둥에 이상한 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미처 공부를 하지 못하였지만 예사롭지가 않았습니다.
      저도 진작에 알았더라면 스님께 설레임공양이나 하나 할 걸 하고 생각하여 봤습니다..ㅎㅎ

  3. 2015.12.01 13:22 신고 euroasia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수년전 주지 스님이 제친구 무의스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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