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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일기

유학산 능선에서 한국전쟁 당시의 총탄 자국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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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선거 날..

몇 일 전에 일찌감치 사전투표로 귀중한 주권행사는 마무리하였고..

안개가 심하게 끼여 있는 날씨, 

얼른 맑아질것 같지가 않아 가볍게 나선 근교산행으로 인근 칠곡에 있는 유학산으로 향하였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최후의 보루가 되었던 낙동강 전투에서도 가장 치열하게 교전을 벌였던 장소가 이곳 유학산인데 이곳을 포함하여 이곳 인근 다부동에서 벌어진 최후의 방어전투를 다부동 전투라고 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말미에 올려져 있습니다.


유학산(遊鶴山)은 정상부근의 바위 벼랑이 험하고 위험하여 사람은 살지 않고 학만 산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러나 막상 올라보면 거의 육산 형태로 정상 인근만 조금 위험한 경사로가 있을뿐 전체 등산로는 매우 안정적입니다.

등산로는 뚜렷하고 외길이라 길을 잃을 염려도 없습니다.

헤갈리는 곳에서는 리본을 따라가면 되구요.


대개의 산행은 팥재휴게소(유학산휴게소)에서 헬기장을 거쳐 정상에 오르고 다시 도봉사를 거쳐 내려오는 원점회귀를 많이 하는 편인데 이렇게 하면 산행이 너무 간단해져 저는 다부동전적기념관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능선을 타고 정상을 거쳐 도봉사로 하산을 하였습니다.


초입에 1시간정도 가파른 오르막이 이어진후부터는 유순한 흙길 능선이라 걷기에 아주 좋았습니다.

한국전쟁당시 격전의 현장이라 여러가지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장소인데 세월이 많이 흘러 그저께 최대적국이었던 미국과 북한의 지도자가 악수를 하는 장면을 보니 더욱 더 변하는 세상에 대한 생각들이 많이 들었습니다.


산행코스 : 

다부동전적기념관주차장 - 674고지 - 793고지 - 837고지 - 도봉사분기점  - 정상(유학정, 839고지) - 헬기장 - 도봉사 - 팥재휴게소(맘 좋은 휴게소 아저씨의 봉고차 편으로) - 다부동전적기념관

※ 다른 산과 달리 이곳 봉우리들은 모두 '고지'라는 군 용어를 사용합니다.


소요시간 : 약 4시간







산행코스 : 다부동전적기념관주차장 - 674고지 - 793고지 - 837고지 - 도봉사분기점  - 정상(유학정, 839고지) - 헬기장 - 도봉사 - 팥재휴게소(맘 좋은 휴게소 아저씨의 봉고차 편으로) - 다부동전적기념관





다부동전적기념관에 있는 한국전쟁 당시 사용된 탱크들



산행 들머리 안내

다부동전적기념관 애랫편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중앙고속도로 굴다리를 지나 도로를 횡단하여 우측 아래로 내려가서 위 사진에서 보이는 건물 좌측으로 올라가면 됩니다.



산딸기가 딱 제 철이라 온통 딸기밭입니다.

한웅큼 따서 입에 통채로 털어 넣으니 아주 맛나네요.



초입 산길은 그리 가파르지 않다가...



상당히 경사가 심한 오름길을 약 1시간 정도 오르면 능선에 다다르게 됩니다.



최초 봉우리인 674고지입니다.


(매일신문에서 옮겨온 글)
674고지는 동쪽에 다부원 협곡을 통하는 북편관문과 서쪽으로 왜관 방면 도로를 잇는 Y선의 감찰 방어고지다. 
인민군이 차지한 이 고지는 8부 능선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1대 3의 열세한 병력에다 학도병과 신병으로 이뤄진 아군은 산에서 내던지는 수류탄 공세로 번번이 물러서야 했다. 
10여 차례나 뺏고 빼앗기는 육탄전을 거듭하다가 산악전술상 개인장비를 가볍게 했다. 

기관총과 박격포의 지원사격 아래 특공대가 백병전을 감행해 비로소 완전 탈환했던 피로 얼룩진 고지다. 
674고지를 담당한 제12연대 제1대대는 8월 13일 오후 2시 무렵 사단 사령부로부터 고지 탈환을 명령받았다. 
같은 날 오후 5시 무렵 제12연대 제1대대는 다시 다부동으로 역행군해 674고지 맞은편의 516고지 밑에 포진했다. 

포진한 뒤 바로 진지 구축 작업을 실시했다. 
이 와중에도 북한군의 포격이 집중됐다. 8월 14일 오전 3시 무렵에는 국군 헌병 경찰대로 위장한 북한군과 근접 사격전이 벌어져 북한군 4명, 국군 2명이 전사했다. 
8월 14일 새벽 국군 1`3중대가 674고지 8부 능선까지 진출했으나 674고지에서 방어하는 북한군으로 인해 4, 5부 능선으로 후퇴하고, 209고지에 대대 관측소를 설치했다. 

8월 14일 오후 2시부터 674고지를 공격해 정상을 탈환했지만 출격한 미 공군기가 정상을 무차별 폭격하는 바람에 고지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8월 15일 국군은 오전 8시 3, 4부 능선에 배치된 박격포의 지원을 받고 다시 공격을 개시했다. 
가파른 지형으로 인해 박격포 사거리 측정이 어렵고 북한군은 1개 대대로 증강돼 있어 고지를 탈환하지 못했다. 
8월 15일 오후 학도병과 신병들로 구성된 제11연대 예하 대대(11연대 3대대, 15연대 2대대 배속)가 다부동에 배치되면서 사단의 전투 지형 선이 9㎞에서 8㎞로 되고, 제3대대가 제1대대를 대신해 674고지를 담당하게 됐다. 

제12연대 제1대대는 다부동 서쪽 2㎞에 위치한 학산리의 듬티로 이동했다. 이후 제11연대 제3대대는 10여 차례 674고지를 주고받는 치열한 전투 끝에 8월 22일 새벽 특공대를 투입, 고지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능선 주변에는 아직도 개인참호같은 웅덩이 형태가 많이 보여집니다.



분명히 총탄 자국같습니다.

바위에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습니다.



가까이서 찍은 바위의 총탄 자국.






멀리 하산지점인 팥재주차장이 보여 집니다.

안개가 걷히지 않아 조망은 아주 별로입니다.



아랫쪽으로 내려다 본 풍경



6월은 산에 싸리꽃이 제 철입니다.






묘한 나무입니다.

가랭이 사이로 지나가야 합니다..



한때는 최고의 격전지..

산행 내내 홀로인데 ...

하루에 거의 100명 이상이 전사한 장소라고 합니다.

학도병들도 막 입대한 병사들도 참 많았다고 하구요...



유학산 제 2봉인 837고지입니다.


(매일신문에서 옮겨 온 글)

한국전쟁 때 다부동 쪽은 국군이 막고, 낙동강 쪽은 미군이 맡아 경찰대와 주민들이 연합해 인민군 정예 3개 사단을 섬멸한 봉이다. 한국전쟁 초반 전세에 밀린 국군과 미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하고 북한군과 가장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유학산 ‘다부동 전투’의 중심이다. 


8, 9월의 폭염 아래 수십 차례나 계속된 피의 탈환전이 이곳 유학산 자락에서 펼쳐져 피아 간 수만을 헤아리는 젊고 고귀한 생명들의 희생을 가져왔다. 

1950년 8월 16일부터 23일까지 유학산 동편에서 국군 제12연대 제1대대와 북한군 사이에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전장인 것이다. 

유학산과 동쪽 줄기 837고지 일대는 높이 800m 이상의 분수령 능선이 동서로 4㎞나 뻗어 있는 고지다. 


고지의 북측 경사면은 경사가 완만해 정상에 오르기 쉬운 반면, 남쪽 경사면은 북쪽과 달리 가파르다. 

특히 등고선 700m 지점에서 정상까지는 50m 높이의 암벽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계곡의 시류점이 거미줄과 같이 엉켜 있다. 

유학산의 고지는 5번도로와 25번도로를 통해 대구로 들어갈 수 있는 가장 유리한 지점이다. 


따라서 837고지는 다부동전투에서 최고의 요지였다. 

국군 제12연대가 사단 일선 중앙의 숲데미산(수암산)에서 유학산 일대를 담당했다. 

8월 13일 아침 왼쪽으로부터 제2대대를 숲데미산에, 제3대대를 유학산 주봉인 839고지에 각각 배치해 놓고 제2봉인 837고지에는 제1대대를 배치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837고지는 국군 1대대 병력이 배치되기 전에 북한군이 먼저 점령해 있었다. 

그 때문에 837고지의 반격과 후퇴는 유학산 일원의 전투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였고, 국군의 피해도 컸다. 

1950년 8월 22일에 우측 다부동의 제11연대 제3대대는 674고지를 탈환한 후 위봉(威鳳) 골재까지 진출했다. 


8월 23일 오전 2시 무렵 제11연대 제1대대는 837고지를 탈환한 후 820고지를 넘어가 제3대대와 만나고, 북쪽 경사면 5, 6부 능선까지 진출해 북한군 패잔병을 제압했다. 

같은 날 오전 6시 무렵 좌측의 제3대대도 유학산 주봉을 탈환했다. 

이로써 국군이 유학산을 완전 장악한 것이다. 


다시 말해 유학산은 대구 진입로를 감찰, 방어하는 제1의 요지여서 인민군의 강공세에 방어선이 동명 지천까지 밀렸으나, UN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에 맞춰 한미 연합작전으로 다시 격퇴시켰다. 

유학산은 1950년 8월 1일부터 9월 24일까지 55일 동안 9회에 걸쳐 주인이 바뀌는 치열한 전투로 수만 명이 희생되는 참혹한 전투를 치른 곳이다.







정상 가까이에서 만나는 갈림길.

도봉사로 내려가는 길이 있는데 정상에서도 도봉사로 내려가는 길이 있습니다. 



유학산 정상

8각정자가 있고 그 앞에 정상석이 있습니다.

정자에 올라서면 구미시가지와 그 앞으로 천생산, 그리고 금오산이 보여야 하는데 안개로 캄캄입니다.

다음에 날씨 좋을때 한번 더 와 봐야겠네요.



유학산 정상은 839고지입니다.

이곳에서 잠시 내려가면 헬기장이 나오고 좌측으로 도봉산으로 하산하는 내리막길이 나옵니다.

조금 경사가 가파르고 돌길이라 조심하면서 내려가야 합니다.



도봉사



도봉사 뒷편의 쉰질바위

쉰질이란 경상도사투리로 사람 높이의 50배 정도 되는 바위라는 표현입니다.



상당히 위용있는 바위로서 유학산의 명물입니다.



사찰에 용왕단이 있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이곳에도 있네요.

내부는 샘터가 있습니다.



단아한 규모의 대웅전 법당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불이 호위하고 석가본존불이 중앙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오수중인 동자승



비탈진 언덕 한참 위에 산신각이 있길래 올라 가 봤습니다.



산신각에서 내려다 본 풍경



도봉사는 이런저런 야생화와 꽃들이 많은데 한참이나 머물며 감상하였습니다.

정말 하루종일 인기척 하나 없는 조용한 산행을 하게 되네요.











팥재 휴게소로 내려와 가게(맨 우측가게)아저씨한테 다부동을 어떻게 가야 하느냐고 물으니 걸어가면 한시간 이상 걸릴것이고 한참 아래 동네까지 내려가서 버스를 타야 되는데 하루에 두어대 다닌다고 합니다.

그 외 택시를 불러야 되는데 한 20,000원 정도 할거라네요.


딱 고민이 되는데...


그 아저씨가 차 키를 가지고 나오더니 승합차에 올라 저보고 타라고 합니다.

먼길 산행을 했는데 그곳까지 걸어갈 수도 없을 것이니 태워 드린다고 합니다.


다부동전적기념관 주차장에 와서 사례라도 좀 해야 하지 안냐며 돈을 건네니 도저히 안 받겠다는 걸 억지로 약간의 금액을 주머니에 넣어 드렸습니다.


너무나 고마운 분...



잠시 다부동 전적기념관 둘러 봤습니다.









유학산 안내도. 유학산 한국전쟁 당시 격전지 탐사 안내도






한국전쟁 당시의 다부동전투에 대하여..



1950년 8월 3일부터 29일까지 6.25 전쟁 도중 지금의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와 학산리(유학산)에서 대한민국 국군과 조선인민군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 낙동강 전선의 요충지인 다부동을 백선엽 등이 이끄는 국군이, 연합군이 도착할 때까지 큰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이곳을 지켜냈다. 그리고 이로 인해 남한은 북한의 적화통일을 막고 추후 반격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게 된다. 한마디로 당시 한국군의 사활이 걸린 전투였고 결국 수비에 성공했다. "동양의 베르됭 전투"라고도 불린다.

지금은 행정구역 명칭이 '다부동(洞)'이 아닌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里)'이지만 '다부동 전투'라 불리는 이유는 전투 당시의 명칭을 따랐기 때문으로, 경상북도에서는 1988년까지 읍면의 하위 행정구역 단위로 '동'을 쓰는 곳이 많았다.




워커 미 제8군사령관이 8월 1일 낙동간 방어전선을 구축하라는 명령에 따라 유엔군이 낙동강 남안으로 철수하여 방어선을 구축하려 하자 인민군은 유엔군에게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서 맹추격전을 전개하여 낙동강 북부 전선에서는 8월 5일을 경유하여 낙동강을 도하하게 되었다. 이때 낙동강 북부 전선을 담당한 인민군 제2군단은 서에서 동으로 7개 사단을 전개하여 영천을 탈취 후 부산을 점령하려 하였고 제 1군단은 남에서 북으로 4개 사단을 전개하여 마산을 탈취 후 부산을 점령하려 하였다. 일명 '8월 공세'가 시작된 것이다.

김일성은 직접 내려와 인민군 사단을 돌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광복절까지는 부산을 점령하라고 인민군을 독촉했다.


백선엽 준장이 지휘하는 제1보병사단은 성창에서 적과의 접촉을 끊고 8월 3일 오후 낙동리에서 고생고생하며 낙동강을 도하했다. 낙동강을 건넌 1사단은 제13연대를 인동에, 제11연대를 해평동에, 그리고 사단 도하를 엄호하고 철수한 제12연대를 낙동리에 배치했다. 이때 사단은 좌측의 미군 제1기병사단과 연결되어 있었으나 우측으로는 인민군이 1사단을 추격하여 인민군 제13사단이 낙동리로, 제15사단이 구미시로, 제3사단이 왜관으로 비집고 들어오고 있었다.


8월 3일 17:00에 인민군 1개 연대가 낙동리의 모래밭에 몰려들어 도하하기 시작했는데 국군은 김점곤 중령이 이끄는 12연대로 저지선을 펼쳐 시간을 벌었다. 

그러던 중 4일 사단에 좌인접한 제6보병사단과 전투지경선이 조정되면서 12연대는 사단 예비대로 임무변경되어 상림동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날 인민군 1개 연대가 12연대가 이동하는 틈을 타 낙정리로 도하하여 11연대를 공격하자 백선엽은 12연대 1대대를 증원하여 막아내고, 6일 궁기동 남쪽 225고지를 탈취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결국 도하에 성공한 인민군 13사단은 7일 밤 공격을 재개했다. 이 상황에서도 국군은 힘들게 해평동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백선엽은 여기에 12연대 3대대를 증원하고 같은 연대 2대대를 13연대 지역에 투입하였다. 이리하여 12연대는 견제력을 상실했다. 이날 22:00에 강정 나루터로 인민군 15사단 1개 대대가 도하했고, 그 결과 강 건너의 인민군은 급격히 증가했다. 


8일 1:00에 해평동이 인민군에게 점령되자 과림동으로 후퇴했던 12연대 1대대는 항공지원을 받으며 역습을 감행해 전투 2시간만에 해평동을 탈취한 후 그 북쪽으로 진출하였다. 그러나 인민군이 13연대의 정면인 남율동 부근에 4일부터 만든 수중가도로 2개 연대와 T-34 15대를 도하시켜 9일에는 낙동강 대안의 고지군(201고지, 369고지, 154고지) 등이 돌파되고 말았다.


그러던 와중에 다행스럽게도 14:00에 해평동에 이르는 제방을 따라 T-34 5대가 남하하다 국군의 대전차포 화망과 미군의 항공지원에 걸려 4대가 파괴되고 369고지 밑의 국민학교에 숨어있던 T-34 3대가 대전차 특공조의 활약에 파괴되어 인민군은 대부분의 전차를 상실하였다.


전차 전력을 상실한 인민군은 전술을 바꾸어 금곡리를 우회하여 1사단의 우측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때 국군 제2군단장 유재흥 준장이 12일 사단은 'Y'선으로 철수하여 방어하라는 명령을 내려 1사단은 20:00에 이탈하여 본 전투장이 될 다부동으로 이동했다.


당시 군단 작전명령에 명시된 'Y'선이란 1사단의 좌 1선 13연대가 고수하고 있는 왜관 북쪽 6.5Km를 기점으로 하여 11, 12연대를 5내지 10Km 가량 후퇴시켜 좌로부터 369고지-수약산-족계산-신주막을 잇는 작전 지역을 말한다. 이 선은 백선엽이 지형 정찰 후 결정한 최후 방어선이었다.

이 구간은 전투정면이 20Km에 달하여 매우 넓은 방어 정면이었으나 적을 감시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고 또한 1사단과 인접해 있는 6사단, 미군 1기병사단과 연결되어 방어에 유리했다.


13일 백선엽은 좌익에 15연대(13연대가 개칭됐다), 중앙에 12연대, 우익에 11연대를 각각 배치했다. 이때 1사단은 개전 이래 처음으로 편제상의 90~100%, 병력은 70%나 추가되었고, 뿐만 아니라 T-34 격파가 가능한 3.5인치 로켓포까지 지급되어 사기가 더 올라갔다.


이러던 와중에 뜻하지 않은 사태가 벌어졌는데 12연대가 재정비를 하고 있을 동안 인민군 13사단이 12연대의 꼬리를 물고 침투하여 수암산과 유학산을 먼저 점령한 것이다. 이는 2군단장 유재흥의 삽질(...)로 2군단이 쓸데없이 철수경로를 통제하려 하고 백선엽까지 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바람에 두 고지에 배치할 병력이 부족해져 버린 탓이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12연대는 13일 공격을 실시해 수암산을 탈취했으나 유학산을 탈취하는데는 실패했다. 유학산은 지역에서 가장 높은 고지로 중요한 요충지라 1사단은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곳을 탈취해야 했다.


14일 새벽 인민군 3사단 1개 연대가 328고지를 공격하는 시각에 국군 12연대는 유학산을 공격했다. 15연대는 328고지를 빼앗겼다가 고전 끝에 탈환에 성공하는 등 혈투를 벌였지만 12연대는 유학산 탈취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때 좌익 11연대를 공격한 인민군 13사단이 야간을 이용하여 진목동까지 침투하여 사단 주저항선이 돌파되고 말았다.


이에 백선엽은 진목동 방면으로 나가 혼란속에 후퇴하고 있는 11연대 1대대를 수습하여 673고지로 역습하는 한편 좌측에 있던 12연대 1대대를 인민군 전차가 돌파한 진목정으로 급파하여 적의 돌파구를 봉쇄하는데 성공했다.


인민군이 대구(당시 대구에 대한민국 정부의 모든 기능이 집중되어 있었다)만이라도 점령하라는 김일성의 독전으로 광복절에 다부동으로 총공세를 감행하여 사단 좌익 15연대는 328고지를 빼앗긴 채 고전했고 진목정에서는 진전없는 격전이 계속되었다.

사단 좌익에 인접한 미군 1기병사단에서는 왜관 북쪽 2Km의 303고지가 피탈되고, 사단 우익 인접 국군 6사단은 4Km나 물러나 대구의 운명은 촌각을 다투었다.


다부동으로 쏟아지는 공세가 심상치 않음을 판단한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는 다부동에 융단 폭격을 명령했다. 16일 오키나와 기지에서 출격한 B-29 98대는 960톤의 폭탄을 목표에 투하하였으나 인민군의 포격이 다소 줄어든 것 이외에는 별 성과가 없었다(다만 백선엽 장군의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포로를 심문한 결과 이날의 융단폭격을 기점으로 적들의 기세가 결정적으로 꺾였다 증언했다고 전한다). 어쨌던 19일 실시 예정이었던 2차 폭격은 취소되었다.


한편 백선엽은 중과부적으로 현 진지의 방어가 힘들 것으로 판단하여 사단 고문관 메이 중위를 미 8군 사령부에 보내 증원을 건의하게 하였다. 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중장은 백선엽의 요청에 경산에 있던 미군 27연대, 37야포대대, 8야포대대를 진목정으로, 23연대를 두모동으로 투입하여 종심을 강화하였다.


17일 국군 11, 12연대는 유학산을 공격하여 적 1,500명을 사살했으나 11연대 11중대가 지키고 있던 673고지가 기습을 받아 뚫려 버리는 바람에 유학산 탈환에 또다시 실패하고 말았다.


한편 15연대는 융단폭격의 영향으로 인민군이 침묵하고 있는 사이 공격을 재개하여 적을 낙동강 서안으로 몰아내고 328고지를 탈환하였다. 그러나 사단 우측에 벌어진 간격으로 인민군이 침투하여 가산성을 점령했고 이로 인해 동쪽이 노출된 틈을 타서 18일 적의 특공대가 사단 사령부를 기습했으나 다행히 백선엽 및 사단 주요인물들을 사살하는 데는 실패했다.


20일을 전후하여 전선이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면서 2군단장 유재흥은 19일 'Y'선을 견고하게 하기 휘해 제8보병사단 10연대를 1사단에 배속시켰다. 인민군은 반면에 유학산을 방어하고 있던 15사단을 20일 영천으로 돌렸다.


21일 백선엽은 증원병력을 받자 'Y'선 회복을 결심하고 12연대와 10연대로 하여금 수암산 및 유학산을 공격하게 하는 한편 11연대로 신주막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번 공격도 수약산과 유학산을 점령하는데 그치고 11연대는 공격 초반부터 반격에 부딪혀 점차 후퇴하고 있었다. 이에 격분한 백선엽은 직접 권총을 들고 선두지휘하여 힘겹게 원위치를 확보하였다. 또한 이 날 북한군 포병대대장 정봉욱 중좌가 휘하 병력을 이끌고 국군에 투항하여 적 포병대 배치를 알려주어 반격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한편 증원된 미군 27연대는 인민군의 전차 접근로인 진목정 북쪽에 배치되어 18일에는 남하하는 T-34 2대와 SU-76 자주포를 파괴하고 10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고 21일에는 야간침투를 시도하는 전차 7대와 자주포 3대, 기타 차량들을 모든 화포를 총동원한 끝에 격파하여 5시간만에 격퇴시켰다. 특히 미군의 화력지원이 강력했는데, 이 날 제8포병대대는 약 1,600발의 포탄을 사격했고 이외에도 약 2,500발의 박격포탄 사격이 실시되었다.

이날의 야간전투를 참전자들은 불덩어리들이 마치 볼링장을 연상시킨다 하여 '볼링장 전투'로 불렀다.


낙동강 방어선의 이점을 살리려면 Y선으로 지정된 유학산과 수암산을 확보해야만 했다. 위에 언급되었지만 낙동강 방어선은 초기 방어선인 'X'선과 최후의 방어선인 'Y'선으로 이루어지고, 이 Y선을 확보하는데 성공할 때 혼란스러운 낙동강 방어선의 진정을 기대할 수 있었다.


이곳의 중요성은 북한 인민군 역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넘어오려고 하였다. 때문에 자연스레 전선이 혼란스러워졌고, 전투 양상도 굉장히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참전 용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백병전은 기본이었고, 소총을 쏘기도 어려워 상호간에 수류탄을 주고 받는 수류탄전도 치러졌다. 나중엔 대인수류탄이 모자라서 대전차용까지 던져댔다. 이러니 당연히 병력 손실이 많았다.

전투가 끝난후 피해상황 집계결과, 국군 전사자 2,300명, 북한군 전사자는 5,690명이었다. 얼마나 시체가 많았는지 국군 1사단이 미군에 다부동지역을 인계하고 이동하게 되었을 때 미군 병사들이 "저 위에 있는 시체들을 모두 파묻기 전엔 지역을 인수하지 않겠다."고 했을 정도.

이 어려운 상황을 1사단은 잘 버텨내고 최종적으로 미군의 증원을 받아 Y선 탈취에 성공하면서 추후 반격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 전투에서 북한군의 공세를 막아냄에 따라 북한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실패하였고, 그 결과 한국군과 미군은 북한군의 공격 의도를 좌절시키는데 성공한다. 북한군은 이 전투에서 전력을 상당히 소진했고, 이는 이후 전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리고 반대로 국군에겐 계속 밀리던 낙동강 방어선을 고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부여해준 결정적인 전투가 된다. 또한 최초로 한국군과 미군이 연합하여 작전을 실시한 것도 중요한 점인데, 이 전투에서 승리하게 됨에 따라 연합작전이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고, 한미간 상호신뢰감도 형성될 수 있었다. 

(나무위키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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