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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별 가족의 글

서울 놈들은 모두 뺀질뺀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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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물을 끓이는데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납니다.

육중한 몸매를 자랑하는 콤바인이 논으로 천천히 조심스럽게 내려갑니다.

논 주인분은 논둑에서 팔짱을 끼고 콤바인 작업을 바라보고 계시더군요.

한 해의 수고를 걷어 들이는 작업을 바라보는 마음은 누구라도 흐뭇한 마음일 겁니다.

실제 농부님의 이야기를 들으니.. 올 해는 수확도 줄고 쌀 값 하락에 영농비는 오르고..

속이 답답하시다는 말씀이 가슴에 와닿습니다.

 

 

 

콤바인으로 수확한 벼를 곡물건조장까지 제 포터로 날라다 드리고, 건조한 벼를 창고까지 옮겨 드렸습니다.

저녁에 서울서 내려온 어르신의 큰 아들에게 전화가 왔습니다"아저씨! 옷 갈아입으시고 빵빵하면 나오세요~"

거절도 하기 전에 전화는 끊겼습니다... 서울서 내려온 큰 아들이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분 좋게 한 잔 하시고 나서.. 어르신 말씀.."어제저녁에는 잠을 제대로 못 잤어"

"예전 품앗이 풍습은 이미 오래전에 없어졌지만, 이젠 기계로 농사를 지어도 힘도 들고 손이 모자라" 

"이렇게 내 일처럼 도와주니 너무 고맙네~"..

하긴... 건조장에서 말린 벼를 포대에 담고 트럭에 싣고 이동을 해서 창고에 쌓는 일도 사람이 직접 해야 합니다.

한 두 포대도 아니고.. 무게도 꽤 무겁고.. 어르신 걱정을 조금이나마 이해를 할 수 있었습니다.

 

..

 

 

 

 

"대민 지원 나갈 병사는... "

소대장 말이 끝나기 전에 모두가 번쩍 손을 들고.. 저요! 저요!..

졸병은 아무리 잽싸게 손을 들어도 소용없습니다... 선임병들에게 우선순위가 내려집니다.

평소 책상만 지키던 선임 행정병(별명 뺀질이)의 미소가 그려집니다.

하긴 매일 짬밥만 먹다가 꿀맛 같은 사재 밥의 유혹을 그 누가 뿌리칠 수가 있을까요~ 

 

대민 봉사에 대한 아련한 추억이 있습니다.

대민 봉사 덕분에 새참을 가지고 온 어여쁜 처자인 병 기관님의 막내 처제와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주말이면 외출을 해서 데이트를 즐겼습니다.

절대 제가 먼저 유혹을 하거나 쪽지를 건네지는 않았습니다(강한 부정은 긍정이라고 하던데..)

 

어느 주말 누군가 면회를 왔다고 하길래 면회 신청자 이름을 물으니.. 전혀 모르는 여자분 이름이었습니다.

이상하다? 누구지.. 하면서 면회실에 나가 보니.. 모내기 지원 때 보았던 새참을 가지고 온 처자였습니다.

병기관님 심부름으로 몇 번 댁에 갔다가 물건을 건네주면서, 살짝 가슴이 콩닥 거렸던 기억도 납니다.

처음 그 녀의 인상은.. 참 하다 싶었는데.. 면회 올 용기를 내다니?

 

나중에 알고 보니 병 기관 님에게 저에 대하여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그 당시 명찰을 보고 이름을 외웠다는 사실에 약간의 감동도...

그 내용은 뭐.. 접고..  주말이면 그 녀와 문산 극장에 가서 영화도 보고.. 임진각에 놀러도 가고..

그 녀 덕분에 군 생활을 잘 마칠 수가 있었다고 지금도 생각합니다.

 

제대 후.. 그 녀와의 인연은 더 이상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이어 질 수가 없었습니다.

큰 형님 초청으로 미국에 간 사이에 제가 변심을 했다고 판단을 한 그 녀는 시집을 갔더군요.

미국으로 출발 전에 그렇게 상세하 게 설명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

 

2015 년 7월에 동문 운동회가 임진각 근처라 후배들과 함께 식당 예약 차 사전 답사를 갔습니다.

사람의 인연이란... 참.. 그 식당 주인 얼굴을 보니 영 낯선 얼굴이 아닙니다.

40 년이 지났는데도 전 그 녀를 알아보았고, 그 녀도 한동안 갸우뚱하더니 저를 알아 보더군요.

 

그날은 식당에서 그 녀의 남편과 셋이서 기분 좋게 취했습니다. 

그 녀의 말" 아버지가..' 거 봐라 서울 놈들은 모두 뺀질거리고 못 쓴다고 안 했냐'.."

아버지의 말씀에 솔깃해서 선을 봤는데 잘 생긴 남자라.. 후다닥 시집을 갔다고 하더군요.

뭐.. 저 보다 키도 크고 잘 생기긴 했더군요.. 시집가서 잘 사는 모습을 보니 고마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요즘도 매 년 가을이면, 직접 만든 장어즙을 한 박스 보내 줍니다.

미안한 마음에 보내지 말라고 몇 번을 부탁을 해도 그래도 꾸준하게 보내 줍니다.

저도 물론 답으로 사과를 보내기는 하지만...

 

 

늘 변함없는 일상에서..

제 젊은 시절 40 년 전의 아련한 추억을 늘어놓아 본다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의미에 의미를 더하여 사는 것도 무의미한 삶은 아니겠지요??  

 

가끔 이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가끔입니다(강조)

그때 내가 미국에 안 갔다면?

아마도 장어 식당에서 불판을 신나게 나르고 있겠지.. 음.. 미국 가기를 잘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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