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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

나무뿌리로 만든 중국 홍이스님의 조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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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이(弘一)스님은 세속의 본명이 리슈통(李叔同,1880-1942)으로서 중국의 유명한 불교 스님입니다.

법명이 홍이(弘一)이구요.

중국 불교에서는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다방면에 재능이 출중하여 서화가이자, 문학가, 음악가등의 토탈 엔터테이먼트로 활동한 분이네요.

 

이 대단한 스님의 생전 모습을 나무 뿌리로 조각을 한 이가 있는데요.

1986년 중국 구이린(계림,桂林) 출신의 판 쿠이(潘伊夫)입니다.

이 작품은 2015년에 제작되었다고 하는데 작가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나와있지 않네요.

 

 

 

 

 

 

 

 

 

 

 

 

 

 

다음은 홍이법사에 대한 내용을 우리나라 불교신문에 소개한 내용입니다.

 

홍이스님(弘一. 1880~1942)

 

여러 인연으로 출가를 한다.

어떤이는 멋모르고 일을 치기도 하고, 어떤이는 삶의 절실함 때문에 큰 결심을 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출가 인연이 출가자의 삶을 온통 결정하지는 않는다.

 

얕게 시작해서 깊어지고, 가볍다가 무거워지기도 한다. 물론 그 반대 경우도 있다. 저마다 사연을 갖지만 그것만으론 살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런 사연들이 발갛게 타들어가서 투명해지면 그제서야 다른 인연이 되어 있다.

이 정도는 돼야 한다. 사연에 붙잡히지 말아야 한다. 중국근대에도 많은 출가자들이 있었다. 그 숱한 사람들 가운데 단지 그의 출가 자체만으로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인물이 있었다.

리슈통(李叔同)이자 훗날의 홍이스님이다.

예술가로서 리슈통의 삶과 남산 율사 홍이스님의 삶은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리슈통은 1880년 텐진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쉰살에 진사가 되어서 잠시 관리 생활을 했지만 오래지 않아 퇴직했다.

이후 소금판매업을 했는데 상당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그는 양명학과 참선에 심취해 있었다. 부친은 본처 외에도 첩을 두고 있었는데 그들에게서 아들 둘을 보았지만 첫 아들은 일찍 잃었고 둘째 아들은 병약했다. 후사를 걱정해서 다시 첩을 드렸다. 예순 여덟에 아들을 보았는데 그가 리슈통이다.

그때 모친의 나이는 겨우 스무살이었다.

 

리슈통이 다섯 살 되던 해에 부친은 절세했다. 리슈통은 일곱 살 때부터 사서나 삼경 등의 전통 고전을 배우기 시작했다. 열 서너살 때 벌써 전서(篆書)를 쓰기 시작했고 전각이나 서예를 전문적으로 익혔다.

문인들의 교양 수준을 훨씬 뛰어넘었다. 취미가 아니라 예술의 경지에 치닫고 있었다.

 

1898년 모친의 명을 따라서 혼례를 올렸다.

그해 무술정변이 있었고 변법유신의 주인공들인 캉유웨이(康有爲)와 량치차오(梁啓超)는 망명하고 탄스통(譚嗣同)은 처형됐다. 텐진은 당시 보수세력의 군사적 버팀목이었던 북양해군의 주둔지였다. 리슈통은 이런 어수선함을 뒤로 하고 모친과 함께 상하이로 이사했다.

 

상하이는 텐진과 사뭇 달랐다.

그곳은 중국 남방의 문화가 지식이 집중된 곳이었다. 리슈통의 문학적 감수성이나 예술적 정취를 한껏 펼칠 수 있었다. 그는 상하이에서 오목산승(烏目山僧) 쫑양(宗仰) 스님과 함께 ‘상하이 서화회(書畵會)’를 조직해서 서화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신문을 매주 펴내기도 했다. 상하이 최초의 서화 관련 신문이었다.

 

1905년 4월 모친이 사망했다. 시신을 텐진의 본가로 모셨는데 분란이 발생했다. 형은 리슈통의 모친이 객지에서 사망했기 때문에 집안으로 들일 수 없다고 맞섰다. 모친의 죽음이 슬프기도 했지만 관습을 들먹이면서 영구(靈柩)의 출입을 거부하는 형의 처사에 분노했다. 친구의 중재로 리슈통이 출생했던 구택으로 영구를 모셨다. 텐진이 싫어졌다.

 

장사를 치른 리슈통은 일본유학을 결심했다.

1905년 가을 일본에 도착했고 일본어를 배우는 한편 ‘음악 소잡지’를 편집했다. 그는 원고를 중국에 보내 그곳에서 출간하게 했다. 음악에 대한 그의 조예는 출가이후 찬불가 보급에서 나타나기도 했다. 이듬해인 1906년 9월에 도쿄 미술학교에 입학했다.

리슈통은 그곳에서 아직 중국에선 생소한 서양 유화(油畵)를 배웠다. 아울러 음악학교에서 피아노와 작곡이론을 공부했다. 그리고 당시 유명한 연극배우들에게서 연기기술을 배웠다.

그는 중국인 유학생과 함께 연극 동아리를 만들어 직접 연출하고 배우로 출연하기도 했다. 아마도 서양적 연극기법으로 중국인이 공연한 최초 연극일 것이다.

 

리슈통은 1910년 도쿄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했다. 텐진의 고등공업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912년 상하이에서 창간된 ‘태평양보’의 자매지인 ‘태평양화보’의 주편을 맡았다. 1914년 항저우(杭州) 절강제일사범학교의 미술과 음악 교원으로 선임됐고 이듬해에는 난징의 고등사범 미술 담당 교수가 되었다.

이때부터 사찰에 보존된 금석문 등을 연구했고 전통 예술의 정리와 보존에 힘썼다. 항저우와 난징 등지에서 근무하면서 점점 불교에 심취하게 됐다. 특히 중국근대 이학대사(理學大師) 칭송됐던 마이푸(馬一浮. 1882~1967)와 교류를 통해서 불교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 마이푸는 불학에도 조예가 있었고 거사로 자처한 인물이다.

 

그는 틈나는대로 리슈통에게 불교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고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불전들을 건네서 읽게 했다. 그때 친구 샤미엔준(夏尊. 1886~1946)이 단식수행을 리슈통에게 소개했다. 리슈통은 단식수행에 대한 호기심으로 1916년 여름 휴가를 이용해서 항저우의 서호(西湖) 근처에 있던 정혜사(定慧寺)에서 단식을 실시했다. 17일 간의 단식을 통해서 리슈통은 전혀 새로운 경험을 했다. 아울러 절간에서 있는 동안 출가 생활에 대한 호감을 갖게 됐다.

 

단식수행 이후 삶은 완전히 바뀌었다.

육식을 끊고 틈만 나면 불경을 읽었고 불상도 모셨다.

이듬해인 1917년부터는 자주 정혜사에 들러 법문을 듣고 스님들과 참선을 했다. 1918년 여름 출가를 결심했다.

평생 모았던 예술작품과 서적들을 친구들과 학생들에게 나눠주었다. 음력 7월13일 친구들에게 인사하고 간단한 짐을 꾸려서 정혜사에 도착했다. 곧 랴오우(了悟)스님을 은사로 삭발 출가했다. 일대를 풍미했던 예술 귀재 리슈통이 옌인(演音) 사미가 되는 순간이었다. 서른 아홉의 나이였다. 그해 가을에 구족계를 받았다. 그는 출가 전에 벌써 은사 랴오우스님에게 옌인이란 법명과 홍이(弘一)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이후 사람들은 홍이스님의 출가를 두고 여러 가지 말들을 했다.

사실 리슈통의 사연을 우리가 어떻게 다 알겠는가. 알 수 없다. 단지 짐작일 뿐이다. 속세의 삶에서 추구했던 아름다움. 단식을 통해서 깨달은 심신의 탈각. 리슈통은 아름다움 자체의 무상성을 깨달았다. 아름다움을 부퉁켜 안으려 했던 자신의 무상성 또한 깨달았다. 이런 무상성의 깨달았다고 해서 그가 주저 앉은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런 무상성에서 그는 아름다움을 찾고야 말았다.

이후 그는 청량가(淸凉歌)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맑은 달, 저 달 하늘과 마음에 닿으니 달빛은 희고 깨끗하여라. 이제 맑은 노래 부르니 마음 속 밝은 빛은 한번 크게 웃음 짓네. 맑은 바람, 서늘한 바람은 더운 기운을 푸니 그 기운 자취 없네. 지금 맑은 노래 부르니, 번뇌는 모두 가시고 만물은 다가드네.”

홍이스님은 그제서야 만물을 만날 수 있었다.

아름다움을 발견한 것이다.

 

홍이스님의 불교사상을 이야기할 때 보통 “화엄을 경(境)으로 하고, 사분율을 행(行)으로 하고 정토를 과(果)한다.”고 말한다. 화엄학을 연구했고, 율행을 수지했으며, 정토법문을 신앙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홍이 스님의 업적은 남산율종의 문헌들을 정리하고 이론화한 데 있었다. 남산율종은 당나라 도선율사(道宣律師. 596~667)에 의해 개창되었고 사분율(四分律)을 소의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대이후 대부분의 주석서들이 중국 대륙에서 사라졌다.

 

남산율종에 대한 연구는 진전이 없었다. 홍이스님은 1931년 2월에 남산율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겠다고 서원을 세웠다. 그리고 1933년에는 츄안저우(泉州) 개원사(開元寺)에 남산율학원을 설립했다. 이후 홍이스님은 일본으로부터 남산율종의 일실된 주석서를 구해서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했다. 그는 이런 작업을 통해서 매우 정교한 율학의 이론화를 꾀했다.

특히 사분율비구계본의 조목들을 계법, 계체, 계상, 계행으로 구성하고 또한 미세한 지범(持犯)을 하나씩 가려내어서 〈사분율비구계상표기(四分律比丘戒相表記)〉를 지었다. 그는 직접 해서(楷書)로 그 내용을 써서 간행했다. 율종 학설의 핵심은 계체론(戒體論)이다. 위에서 말한 사과(四科) 가운데 계법은 계율이고, 계체는 자심이다. 계행은 법에 걸맞는 행위이고 계상은 외형적인 행위규범이다. 홍이 스님은 〈유부율〉의 ‘색법계체론’에 상대해서 제기된 남산율종의 ‘심법계체론’ 전통을 복원하고자 했다.

 

홍이스님은 특별히 주석하는 절이 없었다. 강의요청을 받으면 한 동안 머물다가 다시 행각을 했다. 고이지 않고 계속 흐를 수 있는 자신을 만들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계행을 지킬 수 있었다. 1942년 10월13일 츄안저우(泉州)에서 입적했다. 세수 63세였고 승납은 25년이었다.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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