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미나문방구'란 영화를 봤습니다.
어른들 누구에게나 한두가지의 추억 열차를 타게 해 주는 문방구..
그리고 '외상 장부'란 시가 생각이 났네요.
아이들한테는 외상이란 단어가 생소하지만 그 시절에는 엄마와의 약조가 된 문방구에서는 허용이 되기도 하였지요.
그리고, 어른이 되어..
골목길 모퉁이에 있는 조그만 구멍가게에서
연탄 한장과 콩나물 한 웅큼을 외상으로 해야했던 시절이 있었지요.
그리고 쓰디쓴 소주 한병과 라면 몇 봉도 ..
세월 지나..
그것들 모두 장부에서 다 지우고 이만큼의 세월 강을 건너 오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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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상 장부
이종원
비포장도로 끝
세월의 발걸음 짚어놓은
녹슨 양철 지붕이 누워 있다
햇살이 깨진 유리창 쪽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선다
젊은 아낙은 노파로 바뀌었고
가판대는 듬성듬성 머리가 빠져
곧 문을 닫아야 할지 모른다
어딘가 낡은 부적으로 걸려 있을 지도를 찾는다
십여 개 암호를 차례로 호출하지만
일치하는 숫자는 겨우 서너 개
그도 두부 막걸리 소주 같은 일반 명사일 뿐
눈깔사탕, 라면땅 등은 고어(古語) 되어 묻힌 지 오래다
노인도 나도 멋쩍은 웃음으로
기억의 자물쇠를 겨우 푼다
공소시효 끝난 아득히 먼 날
어머니 이름을 팔아 달콤한 맛을 수없이 도적질했던
그 물목들이 비문으로 서 있다
상환하지 않아도 될 영의 숫자에
속죄의 눈물로 다 지우지 못할 낡은 수첩
먼 길 떠나며 원본까지 가져 가버려
흔적 또한 없다는 것
침묵에 잠든 어머니를 깨워 몇 배로 갚아주고 싶다
―시집『외상장부』(시와사람,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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