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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일기

비 오는 날, 선녀골에서 임도 넘어 노이리 느티나무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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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

 

곽재구

 

 

저물 무렵 

소나기를 만난 사람들은 

알지 

누군가가 고즈넉이 그리워하며 

미루나무 아래 앉아 다리쉼을 하다가 

그때 쏟아지는 소나기를 바라본 

사람들은 알지 

자신을 속인다는 것이 

얼마나 참기 힘든 걱정이라는 것을 

사랑하는 이를 속인다는 것이 

얼마나 참기 힘든 분노라는 것을 

그 소나기에 

가슴을 적신 사람이라면 알지 

자신을 속이고 사랑하는 사람을 속이는 것이 

또한 얼마나 쓸쓸한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곽재구 시인을 이제까지 대구사람으로 알고 있었는데 광주 태생이네요.

대구에 관한 책을 쓴걸로 기억하고 있는데 다른 분이었나 봅니다.

그의 시 '소나기'를 읊고 있으면 사랑을 숨기며 참고 산다는 것이 쓸쓸한 아름다움으로 남겨지는데 그걸 느끼는 절정의 타이밍은 소나기 내릴 때라는 것입니다.

 

토요일,

하마 그칠까 하던 비가 갑자기 소나기되어 퍼 붓기도 하고 보슬비로 변하기도 하고...

사랑에 대한 생각이 비에 맞추다보니 뒤죽박죽 되어 버렸어요.

차 키를 들고 가까운 곳 한바퀴 돌고 왔답니다.

달성군의 선녀골에서 출발하여 임도를 타고 노이리 거쳐 내려와 성주 성밖숲 왕버들 아래 빗물 맞고 있을 맥문동이나 보고 올까 하고.

그러다가 노이리 내려 오니 비가 딱 그치고 햇살이 반짝하면서 기분이 다시 뒤범벅이 되는 바람에 그냥 백 고홈 했답니다.

 

사랑에 관한 말 중에서 저는 이 말이 가장 맘에 든답니다.

 

"사랑해요. 이 말은 낡았지만 이보다 더 좋은 표현이 없는 걸."

 

 

올해 여름은 사자성어로 '우텁지근'입니다.ㅎ

잘못된 사자성어라구요?

그럼 제대로 된 사자성어로 된 올 여름 풀이입니다.

우기지절(雨期之節)

 

 

그냥 차를 타고 나왔답니다.

비는 오다가다 합니다.

갑자기 많이 내리기도 하구요.

지구만 비가 내리는게 아니라 화성도 금성도 비가 내린다고 하지요.

그곳에서도 누가 살고 있을려나?

 

 

기대 잔뜩 하고 찾아간 이름 선녀골.

선녀지라는 저수지 아래에 작은 동네가 있고 ..

세상과의 사이에는 저수지가 아닌 이무기 신천지가 가로 막고 있습니다.

작은 동네는 가려 졌네요.

 

 

몇 일 전 다녀 온 금계산과 동쪽 건너편의 대방산 사이에는 이름도 고운 선녀마을이 있답니다.

마을 이름의 유래는 이곳으로 흘러내리는 계곡이 선녀골(仙女谷)로 불리워져 그렇게 되었답니다.

오래전 옛날 이 계곡에는 세 집만 살고있는 산촌이었는데 계곡물이 너무 맑아 천상의 일곱 선녀가 해마다 내려와서 목욕을 하는 곳이라 하여 선녀골이란 이름이 되었구요.

 

계곡의 맑은 물은 삼탕 이천(三湯 二泉)으로 되어 있었는데 현재는 매몰되고 남아있는 두 개의 저수지 중 위의 저수지가 선녀약천(仙女藥泉)으로 불리워지고 있는데 오늘 지나면서 보니 잉어 건져 올리는 낚시터가 되어 버렸네요.

 

 

세월을 보내는 방법은 참 여러가지가 있네요.

낚시도, 등산도, 골프도, 독서도, 쇼핑도, 낮잠도.. 그니와의 달콤한 사랑도.

그리고 허공에 떠 다니는 사람도 있지요.

발 딛을 곳을 찾지 못하여.

 

 

걱정 한다고 해결되면 하루 종일 걱정 하겠다.

 

 

좁은 임도를 따라 올라서 어느 고개마루.

그곳 아래에는 앳딘 농막이 있었는데 주인의 마음은 여유로워 보입니다.

 

 

됫주전자에서 물이 한없이 흘러나와 자전차 물레를 돌립니다.

믓~쪄...

 

 

한없이 돌아가는 물레.

우리 인생에 빗대지만 우리는 한없이 돌아가지 못하지유.ㅠ

주전자 물 투입구를 조금 더 트릭스럽게 했더라면 멋졌을걸...

 

 

바로 앞에는 팔각도 아닌, 육각도 아닌..

보기 드믄 사각 정자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독수리삼형제 데리고 한번 와야겠네요.

 

 

노이리 마을.

시골 동네들이 너무 변하여 이전의 정취는 사라졌지만 그래도 이런 곳을 들리면 추억은 옛 고향으로 달려 간답니다.

올 가을에는 모든게 다 풍년 예감입니다.

산에는 도토리 지천이고, 들판에는 오곡이 제대로 영그네요.

 

 

돌담.

어릴적 아버지가 돌담을 쌓을때 진흙에 마른 벼 지푸라기를 작두로 썰어 넣어 중간재를 만들고 바닥에는 큰 돌로 널찍하게 자리하여 차근차근 흙을 치대면서 쌓아 올렸지요.

울 위에는 사진처럼 봉선화가 피어서,

이웃집 동네 처녀가 몰래 따 가서 손톱에 물을 들였답니다.

 

그 처녀가 한날 미쳐서 옷을 홀라당 벗고 온 동네를 뛰어 다녔는데 ..

생각해보니 그 처녀는 아무 잘못이 없네요.

 

 

거울은 먼저 웃지 않는다.

 

 

 

 

아주 오래 전, 먹고 살만한 직장에 다니고 있다가 경산에 공장을 하나 짓게 되었답니다.

제 공장은 아니지만 앞으로 그 공장을 맡는다는 조건으로..

일년 정도 그곳 현장에서 공사장 인부들과 담당 소장과 같이 공장을 올리면서 거의 지내다시피 했는데 일주일에 두어번 정도는 스레트 지붕 조각을 엎어서 삼겹살을 구워먹곤 했답니다.

폐자재를 불쏘시개로 하여 벌겋게 불을 피워 그 위에 스레트 판을 놓고 고기를 구우면 골을 따라 기름이 빠져나가 고기가 얼마나 맛나게 굽히는지 모른답니다.

 

그렇게 맛나게 삼겹살 구워 먹던 스레트 지붕 조각이 발암 물질이라고??

 

 

하고 싶은 사람은 방법을 찾아 내고 하기 싫은 사람은 핑계를 찾아 낸다.

 

 

노이리 부덕불(蘆耳里婦德佛)은 함안 조씨 안의 집안 며느리의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돌비석입니다.

불상이 아닌데도 주민들은 불자를넣어서 불상처럼  생각하고 모시는 것입니다.

앞자리의 부덕(婦德)이란 말은 여자가 지켜야 할 도리를 뜻하는 것이구요.

 

부덕불에 대한 설명글입니다.

 

200여 년 전 노이리에는 함안 조씨들이 많이 살았는데 마을 이름을 갈실이라 하였다. 조씨 댁에 행동이 바르고 용모 단정한 며느리가 살았는데, 어느 해 돌림병이 돌아 시부모와 남편을 모두 여의고 말았다.

이 지방에 가뭄이 들었을 때 며느리는 가보로 가지고 있던 은거울을 내어놓고 성주 목사에게 청하여 지금의 노홍지(蘆鴻池,일명 갈실못)를 파게 했다.

 

못을 거의 다 파갈 무렵 밑바닥에서 큰 돌이 나왔고, 그 돌을 들어내고 못을 더 파 내려가려 하자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기고 있을 때 며느리가 죽었다는 기별이 왔다. 폭우는 며칠 동안이나 쏟아져 못에 물이 가득 찼고 그 해에 큰 풍년이 들었다. 이후 동네 사람들은 이 못 덕택에 가뭄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 이에 조씨 며느리의 은공을 기려 그 돌로 조씨네 며느리의 모습을 새겨 부덕불이라 하였다 한다,

 

크기는 현고 97㎝, 폭 66㎝, 두고(頭高) 34㎝, 두폭(頭幅) 25.5㎝"라 하였다. 노이리 부덕불은 1998년 5월 26일 도난당하여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달성군에서는 군 개청 100주년을 맞아 2013년 달성군을 빛낸 역사적 인물 27명 중의 한 명으로 함안 조씨 며느리를 선정하고, 부덕불을 다시 제작하여 노홍지 상류 쪽인 갈실 마을 입구에 세웠다.

2015년 복원된 노이리 부덕불은 자연석 대석 위에 화강석 한돌로 조각되어 있다. 석상은 경북 대학교 출신의 조각가 오채현이 제작하였는데, 화강석을 가지고 130% 크기로 복원하였다.

 

 

노홍지

 

 

 

 

 

오늘 이곳 노이리를 들린 목적 중 가장 우선이었던 게 이 노목 느티나무를 만나는 거였는데 생각보다 더 우람하네요.

고려조 말엽 남평 문씨 8세대가 살면서 심었다고 전해오고 있는데 봄에 잎이 활짝 피면 그 해는 풍년이 들고 드문드문 피면 흉년이 든다고 합니다.

 

수령 400년, 수고 19m, 둘레 5.7m로서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 있습니다.

 

 

어느 사진에 보니 이 위에 올라가서 사진을 찍곤 했던데 그러면 안되겠지요.

나무의 크기가 가늠이 되지 않는데 매우 큰 느티나무입니다.

중간 가지 사이에 홈이 파여져 있는데 디딤발을 하여 살짝 들여다보니..

 

 

이렇게 작은 연못이 만들어져 있네요.

 

 

앞의 가지는 태풍으로 부러졌다고 합니다.

수술을 해 두었네요.

 

 

인간은 패했을때 끝나는게 아니고 포기 했을때 끝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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