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용 중에 인명 피해와 연관이 있는 단어들이 많으니 혐 주의 바랍니다.
1982년 경남 의령군 궁유면에서 발생한 우순경 총기난사사건을 알고 있나요?
주인공 이름은 우범곤.
그는 대한민국에서 사람을 가장 많이 죽인 대량살인마로 범행 당시 직업은 경찰관, 계급은 순경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그가 1982년에 저지른 대량살인 사건을 '우 순경 사건'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국내 최다 살인 기록인 56명을 연달아 살해한, 연쇄살인과는 다른 연속살인범이고요.
당시에는 해당 사건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기까지 했답니다.
하지만 이후 기네스에서 혹시나 이 기록을 경신한다면서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이 나올까 봐 범죄 관련 항목은 기록하지 않기로 했다는 후담이 있구요.
이후 이 기록은 2011년 노르웨이 연쇄 테러범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빅'이 경신했으나, 여전히 국내에선 우범곤이 가장 많은 살인을 저질렀네요.
경상남도 부산시 동구 초량동 245의 8번지에서 경찰관의 네 아들 중 셋째로 태어났는데 그의 어린 시절은 별다른 말썽 없이 평범하게 보냈으며, 경찰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장차 경찰관이 되어 아버지처럼 권총을 차고 일하겠다고 뽐내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중학교 진학 후부터 내성적이던 성격이 두드러지고 학업에도 흥미를 잃어 무단결석이 2년 동안 30일이나 되었으며 고교 시절에는 졸업 당시 65명 중 63등으로 열등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고교 재학 시절에는 분을 이기지 못해 유리창을 깨고 그 파편으로 배를 긋는 등의 자해를 한 적도 있다고 하네요.
특히 고교 3학년 때 아버지가 진급을 앞두고 대장암으로 병사하면서 가세가 기울자 우범곤은 성격 자체가 비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해병대에서 군복무를 했으며 특등사수로 뽑힐 정도로 사격 솜씨가 뛰어났다고 하구요.
제대 후 경찰관이 되었으며 초임지는 부산직할시 남부경찰서 감만3파출소였습니다.
이후 서울특별시 101 경비단에 선발되어 청와대 경호에 근무했으나 중도에 전출당하여 경상남도 의령군의 궁류 지서로 좌천되었습니다.
부산에서 근무할 당시부터 피의자들을 함부로 다루거나 윽박지르는 등 포악한 성격을 드러냈다고 하며, 당시 동료 순경에 따르면 평소 유순하다가도 술만 마시면 성격이 난폭해져 꼭 무슨 사고를 낼 사람 같았다고 합니다.
청와대 경호에서 제외된 것도 성격이 너무 거칠어 근무 부적격자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었으며, 전출된 후에도 술만 마시면 행패가 심해 미친 호랑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구요.
궁류지서로 전근 온 뒤 이듬해 2월 8일에 하숙을 하던 우범곤은 이웃집에 살던 전(田)양과 사귀게 되었고 3월 9일에 전 양의 집에서 동거 생활을 시작합니다.
동거에 들어가기 전에 전양의 부모는 결혼한 뒤 함께 살라며 만류했지만 우범곤이 결혼 비용이 없다며 가을로 식을 미루기로 하고 당장 혼인신고부터 하겠다고 고집했다네요.
가뜩이나 집안이 가난해 늘 열등의식에 젖어있던 우범곤은 식도 올리기 전에 여자 집에 얹혀살게 되면서 자신의 무능함에 심각한 콤플렉스를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1982년 4월 26일,
그날 우범곤은 저녁시간 근무를 위해 낮 12시경에 집으로 들어와 점심을 먹고는 낮잠을 자고 있었구요.
그가 잠든 와중에 동거녀가 그의 몸에 붙은 파리를 잡기 위해 손바닥으로 그의 가슴을 쳤고, 그 둘은 이를 계기로 크게 싸웠다고 합니다.
화를 미처 식히지 못한 채 우범곤은 오후 4시경 지서로 간 뒤, 저녁 7시 반경에 술에 취한 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만취한 상태에서 코피가 날 정도로 동거녀를 주먹으로 폭행했고, 같은 집에서 살고 있던 동거녀의 친척 언니가 뛰어 들어와 말리자 친척 언니의 뺨마저 닥치는 대로 때리며 난폭하게 굴었습니다.
시끌벅적한 소리에 동네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사건의 전말을 들은 그들이 동거녀를 두둔하자 우범곤은 다시 집을 나갔습니다.
지서로 가서 그곳에 배속된 육군 방위병들과 소주를 퍼마시던 우범곤은 동거녀의 남동생이 와서 경찰이면 다냐고 소리를 질러대자 폭발, 카빈총을 장전했고 만류하는 방위병들을 총을 쏴 내쫓은 다음에 예비군 무기고에 보관되어 있던 M2 카빈 2자루, 실탄 144발, 수류탄 7개 등을 탈취했습니다.
밤 9시 40분 - 지서를 나온 우범곤은 마침 앞을 지나던, 대구에서 표구사를 하는 26세 남자에게 총을 쏜 것을 시작으로 궁류면 토곡리 재래시장으로 달려가 조준 사격하여 장을 보러 온 마을주민 3명을 살해했습니다.
밤 9시 45분 - 마을의 통신을 차단하기 위해 궁류우체국으로 가서 여성 교환원 2명과 숙직 중이던 집배원 1명을 살해했습니다.
그러나 교환원이 숨지기 직전, 그녀는 마을 이장 집의 행정전화와 의령우체국 간의 코드를 연결했던 덕분에 주민에 의해 신고(22시 34분)가 가능해서 그나마 더 큰 피해는 막을 수 있었고요.
밤 10시 - 그는 곧 압곡리 매실부락으로 가서 10여 분간 총기를 마구 난사하였고, 그곳 주민 4명과 인근 마을 2명을 살해했다.(이때 동거녀 전양도 우순경의 총에 맞았지만 생존했는데 그녀의 가족은 몰살. 이때 살아남은 동거녀 전양은 사건 발생 동기를 진술한 뒤 수술을 받았지만 결국 숨졌습니다.)
밤 10시 10분 - 그는 운계리 시장으로 달려가 주민 7명을 살해했습니다.
밤 10시 50분 - 그는 평촌리의 한 상갓집에 난입하여 “비상이 걸렸다”라고 말하고는 문상을 한다는 핑계로 부의금 3천 원(오늘날의 4만 원가량)을 내고 문상객들과 어울려 10여 분간 함께 술을 마셨는데, 여기서 문제의 난폭한 주사가 또 나왔는지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느닷없이 욕설을 퍼부었다고 합니다.
이를 보다 못한 문상객 하나가 상갓집에서 버릇없이 무슨 짓이냐고 꾸짖자 이에 격분해서 총기를 난사, 상주 일가족등 12명을 살해하였고 이후 그는 불이 켜진 집을 찾아다니며 총을 난사하여, 이곳에서만 무려 23명을 살해했습니다.
다음 날인 27일 새벽 5시 35분 - 그는 산속에 숨어 있다가 담날 새벽에 다시 평촌리 마을에 다시 나타나 알고 지내던 주민의 민가에 침입했습니다.
그는 일가족 5명을 깨운 뒤 갖고 있던 수류탄 2발을 한꺼번에 터뜨렸고, 그 자리에서 우범곤 본인을 포함해 4명이 폭사했네요.
우범곤의 범행 중 가장 악질적인 점은 어린이와 심지어 갓난아기까지 무차별로 살해한 것으로, 상갓집에서 20여 명을 사살하고 난 뒤 피바다가 된 현장을 떠나려다 뒤에서 갓난아기 울음소리가 들리자, "아직 안 죽은 게 있어?"라면서 되돌아가서는 그대로 아기를 사살해 버렸다고 합니다.
또한 우범곤이 총기를 난사하고 다니는 동안 한 택시 기사가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빨리 불 꺼요, 지금 불 안 끄면 다 죽어요"라며 위험을 알렸고, 택시 기사의 말대로 불을 끈 집들은 화를 면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택시 기사는 이후에 안타깝게도 우범곤에게 사살당한 시신으로 발견되었으며, 간발의 차로 미처 불을 끄지 못한 집들도 변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경찰의 한심한 대응이 이어졌는데,
근무지를 무단이탈해 온천접대 후 술을 마시고 돌아오던 궁류지서장 허창순 경사 일행은 밤 22시 50분경 길에서 만난 주민에게 신고를 받지만 무시하고 궁류지서로 들어옵니다.
그곳에서 우범곤이 무기를 탈취해 총격을 벌이고 있다는 보고를 듣자 총격 현장에 자기가 없어서 다행이라는 말을 하며 도피했구요.
한편 마을에 살던 의령군 민방위과 공무원의 사건 전파를 받고 의령경찰서 경무과장 신현기와 보안과장 김영석 휘하 전투경찰 30명이 자정 무렵 현장에 도착했으나 우범곤의 소재를 파악하기는커녕 피격을 두려워하여 마을 초입 다리 밑 등 곳곳에 숨어있었다고 합니다.
후에 경찰은 이를 매복이었다고 변명했으나 여론에 기름을 붓는 결과가 되었구요.
왜냐하면 이 말은 주민 살상이 진행 중인데 경찰은 현장에 진입하지 않고 웅크려 있었다는 것이며 더구나 매복을 다리 밑에서 한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 것이네요.
당시 관할 책임자인 의령경찰서장 최재윤 경정(1982년 당시 57세)은 다음날 부산에서 서장회의가 있다는 핑계로 하루 일찍 부산으로 이동하여 근무지를 보고 없이 무단이탈한 상태였습니다.
보고를 받고 복귀하여 범행 지역에 이르는 다리에 도착한 것은 익일 새벽 1시 20분이나 되어서였습니다만 현장에 도착한 의령서장은 경찰들을 규합하여 범인 수색에 나서기는커녕, 곳곳의 사상자를 목격하고 두려움에 빠져 곧바로 궁류지서로 도망쳤습니다.
지서에 도착한 의령서장은 우범곤이 많은 실탄을 가져갔다는 보고를 받자 더욱 두려움에 빠져 지서 안에만 틀어 박혀있었습니다.
게다가 지서에서 마을 스피커로 경보를 발령하고 사이렌을 울리거나, 또는 예비군을 동원하거나 의령서 휘하 인근 지서에 경찰 지원을 지시하지도 않고 단지 내무부에 상황 보고만 하였을 뿐 아무 움직임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지서에 대기하고 있던 경무과장과 보안과장도 마찬가지로서, 만약 이들이 밤 22시 24분에 처음 신고를 접수한 즉시 경보 방송을 발령하였다면 적어도 희생자의 절반을 구했을 수도 있었다고 하네요.
새벽 2시에는 주민 2명이 목숨을 걸고 산을 넘어와 출동을 재촉하였으나 서장은 날이 어둡다며 이것도 거부하였다고 합니다.
새벽 4시가 다 되어서야 마산시·진주시의 기동대가 궁류에 도착하였으나 결국 사건은 우범곤의 자폭으로 종료되었으니 요약하면 경찰력의 개입이나 저지 없이 주민 살상이 진행되었고 속수무책으로 종료된 셈입니다.
게다가 위 타임라인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우범곤이 26일 23시경부터 다음날 자폭하는 새벽 5시경 사이에 무려 6시간가량 딱히 범행을 실행하지 않고 어딘가에서 조용히 있었는데, 만약 그가 쉬지 않고 계속 날뛰었다면 이때 경찰은 아무 역할도 하지 않고 틀어박혀 있었으니 피해가 몇 배로 훨씬 커졌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무려 62명의 주민들이 사망했고, 33명의 부상자도 발생했습니다.
6명의 희생자는 병원에 옮겨져 치료를 받다가 총상이 악화되어서 사망했구요.
우범곤이 의령군 일대의 네 개 마을을 거의 쓸다시피 하여 살인을 저지르다 보니, 시골사회 규모를 감안하면 심대한 피해를 남겼습니다.
조상 대대로 친척 일족이 모여 사는 산골마을의 특성상 일가족이 모조리 몰살당하거나, 가족들을 모두 잃고 일가 중 혼자만 살아남은 경우가 많았습니다.
게다가 위에도 언급되었듯 나이 어린 희생자들도 상당수였는데, 20세 이하의 희생자가 무려 16명에 달했으며 그중 생후 1개월 된 갓난아기를 포함해 10세 이하의 희생자는 6명이었습니다.
우체국에서 숙직하다 참변을 당한 집배원의 경우, 그의 부인마저 집에서 우범곤에게 살해되는 바람에 슬하의 세 남매는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는 비극을 맞이했습니다.
사고가 발생한 이날은 반상회를 하느라 마을 주민들이 곳곳에 모여 있었고 밤늦게까지 불을 켠 집이 많았다고 합니다.
또 기강 해이로 인해 경찰의 근무지 무단이탈이 만연했는데, 궁류지서의 다른 경찰관 3명도 반상회에 참석하려고 근무지를 무단이탈한 상태였으며, 지서장 역시 마을 유지의 온천 접대를 받으러 지서를 무단이탈한 상태였습니다.
지서는 다른 근무자 없이 텅 비어 있는 상태였으며 이에 우범곤은 무기고에서 다량의 화기를 용이하게 탈취할 수 있었고요.
우범곤의 직업이 경찰이라 사건 당시에도 근무복을 착용하고 있었던 것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 때문에 주민들은 총을 가지고 있어도 아무런 의심 없이 우범곤을 맞이했으며 문을 열어주었다고 합니다.
더구나 당시는 무장공비가 심심치 않게 출몰하던 시대였으므로 주민들은 총소리를 무장공비가 나온 것으로 생각했고 경찰인 우범곤이 소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했어도 공비소탕 작전을 수행 중인 것으로 인식했다고 하네요.
국민을 지켜야 할 경찰이 전대미문의 흉악범죄를 저질렀다는 충격성과, 사건 진행 당시 진압을 위해 출동한 경찰들의 비열함과 무능함에 피해가 커졌다는 점 때문에 전국적으로 여론이 폭발하여 전두환 정부는 내각 사퇴 압력에 직면했습니다.
한편 정부합동조사반은 이 사건이 상부에 보고도 늦고 출동도 늦은 데다 진압마저 미온적이었기 때문에 궁류지서장 허창순, 의령서장 최재윤을 파면·구속 기소하고 관계자 수 명을 직위해제시켰습니다.
내무부 장관이던 서정화는 책임을 지고 문책성으로 사임하였고 후임으로 체육부 장관이었던 노태우가 임명되었구요.
그리고 국회 내무위에선 야당 의원들은 이 사건이 단순한 치안 문제가 아니라 보고 체계와 무기 관리 등 당국의 치안 정책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며 내각 총사퇴까지 요구했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지역 주민들의 민심 이반을 막기 위해 전두환 대통령이 직접 의령군을 찾아 주민들에게 사과와 보상을 약속하는 한편, 국가 차원의 대책위원회를 열어 대대적인 보상을 실시했습니다.
사건이 일어난 의령군 등 서부 경상남도 지역은 대구경북과 함께 대한민국 제5공화국과 민주정의당의 핵심 지지 기반이었으므로 전두환으로서는 아무리 간선제를 한다 해도 눈치를 안 볼래야 안 볼 수가 없었던 곳이라 유족들에게는 대학등록금 및 의료비 지원 방안이 이루어졌고 궁류면에 대한 인프라 구축 사업 역시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으며 시작되었습니다.
우 순경은 단시간 최다 살인으로 기네스북에도 올랐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발생 일주일 뒤 사실상 언론보도에서 사라졌답니다.
당시 전두환 군사정권 하에서 보도 통제가 된 것이 이유였는데 이후 40년이 넘도록 희생자를 이야기하는 것은 의령군 내에서도 사실상 금기시 되었다고 합니다.
이게 유족들이 평생 한이 맺힌 이유이구요.
그후 42년이 지난 2024년 4월 26일, 의령군 궁류면 공설운동장 인근에 조성된 추모공원에서 처음으로 위령제가 열렸습니다.
그 다음해 추모식에서 경남경찰청장이 참석하여 공식적으로 사과를 하였구요.
이 공원의 이름은 '의령 4.26 추모공원'입니다.
(이 내용은 나무위키에서 인용하여 읽기 쉽게 일부 수정하여 재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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