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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일기

왕의 어머니가 피난 와서 지낸 안동의 왕모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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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모산(王母山)은 양반 동네 안동 도산면에 있는 높이 648m의 평범한 산으로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산 이름에서 유추 되듯이 왕의 어머니와 연관이 있는 산입니다.

1361년 겨울, 중국 원나라가 쇠퇴하여 기울어갈때 생겨난 한족 반란군인 홍건적이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고려로 쳐 들어와 수도 개성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는데 이때가 고려 말기 공민왕 시절,

원나라에서 시집 와 공민왕을 지극히 사랑했던 노국공주와 알콩달콩 세기의 로맨스적인 사랑을 나누던 공민왕은 급기야 노국공주와 엄마(유식한 말로 모후)를 모시고 추위를 견디며 멀고 먼 후방 지역인 안동까지 피난(고급 용어로 몽진)을 가게 됩니다.

이 시기 공민왕 옴마가 피난을 와 있던 곳이라 하여 산 이름이 왕모산(王母山).

 

그때 공민왕의 어머니가 피난했던곳에 왕모당이란 이름의 성황당이 건립되어 있고 매년 정월 대보름에는 마을 주민들이 이곳에서 동신제를 지낸다고 합니다. 현재도 흔적이 남아있는 왕모산성은 그 시절 왕의 호위를 위하여 건립된 것이라 하구요. 

 

미세먼지 예보를 숙지한 덕분에 조망에 대한 미련은 떨쳤지만 낙동강의 수려한 W라인을 상큼하게 보지 못한건 많이 아쉬웠습니다. 꽃 피는 새 봄, 말끔한 날을 잡아 한번 더 다녀 올 생각입니다.

산행은 내살미마을 왕모산주차장에서 시작하여 1코스로 갈선대까지 오른 후 2코스로 선비길을 따라 한골 입구까지 간 다음 능선을 타고 정상에 올라 3코스 구간으로 월란정사쪽으로 내려와 원점회귀를 하였습니다.

 

※ 내살미마을 이름의 유래.

내살미마을은 천사미(川沙美)라고도 부릅니다.

이건 한문이고 내살미는 순 우리말입니다.

말 그대로 내(川)의 모래(沙)가 아름다운(美)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내(川)는 마을 앞을 흐르는 낙동강을 이야기 하구요.

중간의 모래 사(沙)자만 억양이 들어가서 살이라는 말로 변하여 '내살미'가 되었답니다.

 

등산로나 안내판, 주차장등 여러모로 지자체에서 신경을 많이 쓴 흔적이 역력하여 고마운 점이 많지만 2코스 구간에 있는 데크는 아무래도 돈을 그냥 쏫아 부은듯한 과신경성 세금 낭비 같네요.

 

 

산행지 : 왕모산

일 시 : 2022년 1월 27일

산행 코스 : 

왕모산 주차장 - 왕모당 - 갈선대 - 2구간갈림길에서 좌측 데크길로 - 한골 갈림길에서 우측 능선으로 - 정상 - 월란정사 갈림길에서 임도로 - 628봉 - 봉우리 여러개  - 월란정사 - 내살미마을 - 주차장(원점회귀)

소요 시간 : 4시간 30분

 

 

 

왕모산 정상에서 축융봉과 청량산으로 이어지는 능선길도 있습니다.

청량산에는 공민왕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전해 지지요.

 

 

왕모산 등산지도

위 지도에서 황색으로 칠해진 구간이 제가 다녀 온 코스입니다.

대개 갈선대에서 정상으로 바로 오르는데 이날은 시간도 여유가 있어 빙 둘러 올라 봤습니다.

 

산행 코스 : 

왕모산 주차장 - 왕모당 - 갈선대 - 2구간갈림길에서 좌측 데크길로 - 한골 갈림길에서 우측 능선으로 - 정상 - 월란정사 갈림길에서 임도로 - 628봉 - 봉우리 여러개  - 월란정사 - 내살미마을 - 주차장(원점회귀)

 

 

왕모산 주차장

주차장 크기만한 화장실이 있고 그 옆에는 안내소까지 있는데 그건 지금 역활을 하지 않고 있네요.

화장실에는 히터가 돌아가고 뜨거운 물이 콸콸 나오는데 이런 외진 곳에다 황공할 정도로 해 놓았습니다.

이날 왕모산 산행을 한 사람은 딱 나 혼자뿐.

 

 

등산로 입구에도 먼지털이 시설과 기피제, 날씨 안내까정..

 

 

등산로는 거의 흙길인데 매트를 깔아 둔 곳이 많습니다.

중간 중간 지도와 안내판이 세워져 있어 헷갈림 제로.

 

 

약간 깔딱 계단이 두어 곳 있습니다.

 

 

이 안내판은 양반 갓을 형상화 한것 같네요.

 

 

꽁꽁 얼어있는 낙동강이 내려다 보이기 시작 합니다.

 

 

왕모당이 보이네요.

 

 

왕모당 주위로는 빙 둘러 금(禁)줄이 쳐져 있고 문은 잠겨 있지 않습니다.

잠겨져 있지 않는 성황당 문이 완전 신기합니다.

공개와 비공개, 허(許)와 금(禁)..

비공개와 금지에 익숙해져 있는 이런 내밀한 장소가 뜻밖에 활짝 열 수 있게 되어 있다는게 고맙다는 생각이 드네요.

 

 

두 손을 모으고 잠시 고개를 숙인 다음 살며시 문을 열어 봅니다.

단 위에는 남여 모습의 목신상(木神像)이 나란히 서 있습니다.

뒷벽 중앙에 왕모산성 성황신위(王母山城 城隍神位)라는 지방이 붙어 있구요.

다시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입니다.

열려져 있는 문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하고...

 

 

다시 산길을 오릅니다.

 

 

갈선대 가는 방향으로 데크길이 조성되어 있는데 반대방향으로 '가지 마시오'라고 적혀 있네요.

그냥 아무것도 적어두지 않았으면 가지 않았을것인데 이렇게 적어 둔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것..

나처럼 호기심 많은 산꾼이 밟고 지나갔을 발자국을 따라 오르니..

 

 

절벽 끝..

경치는 정말 좋은데 살짝 위험한 절벽 구간입니다.

빙 둘러가는 데크길을 이쪽으로 만들고 안전 난간을 설치 했더라면 정말 멋진 풍경을 보며 지나는 구간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이 되네요.

 

 

폐교가 된 듯한 학교 건물을 당겨 봅니다.

나중에 보니 안동영화예술학교로 변신해져 있습니다.

 

 

절벽길을 따라 오르니 천곡봉이란 이름의 패찰이 걸린 봉우리를 넘게 되고 다시 안전한 길과 만나게 됩니다.

 

 

앞쪽으로 갈선대 절벽이 보이네요.

 

 

조망대 너머로는 후덜덜한 낭떠러지입니다.

 

 

 

 

 

왕모산의 하일라이트 갈선대.

 클릭하면 크게 보여 집니다. 

왕모산 최고의 조망을 자랑하는 곳입니다.

이곳 안동 출신의 시인 이육사가 일제치하 시기에 이곳 갈선대에 올라서 떠 올린 시상이 바로 그의 대표작인 절정(絶頂)이라는 詩

 

절정(絶頂)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꽁꽁 얼어있는 낙동강의 시린 풍경이 내려다 보이구요.

 

 

갈선대 오르는 길 옆에는 이육사의 시 '절정'을 적어 둔 팻말이 있는데 이것에 대한 안내글이 없이 내용을 모르는 이가 보면 생뚱맞다는 생각도 할 것 같습니다.

 

 

갈선대에서 조금 더 진행하면 양갈래로 길이 갈라지는데 정상으로 바로 오를려면 우측 산길로 가면 되고 선비길을 거쳐 한골까지 갔다가 정상으로 갈려면 좌측 데크길을 따라 가면 됩니다.

시간도 여유가 있고 하여 좌측길로 갔는데...

 

 

걷기좋은 오솔길로 만들어 두어도 충분할것 같은 산길을 모조리 데크로 만들어 놨습니다.

거리는 약 2.3km

사람들이 그리 많이 찾지 않는 곳에 이렇게 엄청난 비용을 들여서 왜 만들어 두었는지 참 난감할 정도로 이해되지 않습니다.

 

 

 

 

 

오르내림도 심하지 않는 데크길에는 걷는 이들이 거의 없으니 아랫쪽에는 푸른 이끼가 잔뜩 끼어 있는데 아무리 방부목이라고 하여도 수명이 오래갈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느 분의 산소인지 충분히 이해가 가네요.

산 속에 있는 묘는 풀이 무성하고 나무가 자라면 산소 입구를 찾지 못하는 곳이 있답니다.

 

중간에 잠시 데크가 끝나 그나마 다행이라 하면서...

 

 

근데 데크길이 금방 또 연결이 되네요.

왜 소박한 오솔길을 만들지 않고 이렇게 거창하게??

자기 돈 내서 만들라 하면 절대 만들지 않겠지요?

 

 

암든 짧지 않는 2.3km의 데크길을 걸으면서 우리나라 지자체 겉물 근성을 여실히 확인합니다.

 

 

데크길은 한골갈림길에 가서야 끝나는데,

근데 안내판에 정상으로 가는 길 표식이 없네요.

그 참...

리본 몇개가 다행히 길 안내를 하여 우측 표식길로 오릅니다.

 

 

이후 산길은 적당하게 가파른 능선길이 이어집니다.

한참을 오르니 민둥묘가 나타나네요.

벌초는 하지 않아도 될듯..

 

 

 

 

 

숲 사이로 낙동강이 내려다 보이고..

 

 

 

 

 

기이하게 생긴 암릉 구간입니다.

처음에는 암릉 위를 지나 갈 수 있겠구나 생각하고 올랐다가 끄터머리에 가니 절벽이라 다시 되돌아와서 정상 등로로 진행.

밑에서 올려다 본 암릉 구간입니다.

 

 

바람이 지나가는 능선인데도 낙엽이 엄청나게 쌓여 있습니다.

눈길만큼 피곤하네요.

 

 

정상 도착.

바로 아래 멋진 소나무 두 그루와 함께 조망처가 열려 있습니다.

정상에서 낙동강으로 내려다보는 구간에는 잡목을 베어서 탁 트이게 만들었네요.

이건 정말 잘 했습니다.

 

 

휘돌아가는 물굽이, W라인의 멋진 낙동강.

건너편으로 조망이 탁 트이면 정말 멋질것 같네요.

소백라인이 희미하게 보이긴한데 아쉽습니다.

좌측에 희미하게 솟아 있는 봉우리는 학가산으로 여겨 집니다.

 

 

여름이면 이 소나무 그늘 아래에서 조망을 즐기면 멋지겠네요.

 

 

정상에는 헬기장이 마련되어 있고 정상석은 아담하게 보기 좋습니다.

 

 

하산하면서 뒤돌아 본 정상과 쉼터 자리의 멋진 소나무 두 그루

 클릭하면 크게 보여 집니다. 

 

 

조금 내려와 만나는 이정표 갈림길에서 좌측 방향으로 내려 갑니다.

경사진 비탈길을 내려오면 좌측으로 임도와 나란히 걷다가 조금 후 임도와 만나게 되네요.

 

 

임도에서 우측 계곡길로 곧바로 하산을 해도 되는데 오늘 산행은 조금 둘러서 내려 갑니다.

임도를 따라 약 5분 정도 진행을 하면 우측으로 산길을 안내하는 이정표가 서 있고 이곳부터 다시 산길입니다.

 

 

미세먼지가 만드는 작품

 

 

 

 

 

 

 

 

하산 내내 조망은 거의 트이지 않지만 잡목 사이로 보이는 건너편 능선이 특이 합니다.

 

 

멀리 청량산 축융봉이 살짝 보이구요.

 

 

등산로는 여러개의 봉우리를 오르내립니다.

갑자기 소나무들이 많다고 했더니..

 

 

송이밭 감시초소가 두어개 나타납니다.

 

 

 

넘어진 소나무를 칭칭 감고 있는 흑구렁이 발견

 

 

월란정사 바로 뒷편인데 이곳부터는 흙빛이 모두 보라색입니다.

 

 

 

 

 

월란정사(月瀾精舍)

퇴계가 수많은 제자 중 한 사람인 만취당(晩翠堂) 김사원(金士元)에게 이곳 터를 주었다고 합니다. 그 뒤 김사원이 10년여간 기거하면서 공부한 '월란암'(月瀾庵)이란 암자터에 그의 후손들이 월란정사를 지었다고 하네요.

건물은 많이 낡고 담장은 일부 무너져 있습니다.

이곳도 역시 자물통이 없이 개방되어 있어 방안에도 조심스레 들어가 봤는데 편액 몇개가 걸려있고 건물의 내역을 적어 둔 개축기등이 적혀 있네요.

 

 

월란정사 앞쪽은 조망이 탁 트여 낙동강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명당입니다.

 

 

얼음구멍으로 괴기를 건져 올리고 있네요.

 

 

하산을 마치고 들길을 따라 이동하여 주차장으로 돌아 갑니다.

제법 한참 걸립니다.

 

 

 

 

 

좌측이 주차장이고 그 뒤가 왕모산, 하산은 우측 능선으로 내려 왔습니다.

 클릭하면 크게 보여 집니다. 

 

 

되돌아오면서 강 건너로 보이는 갈선대(가운데 솟은 바위)

 

 

안동에는 유명인들의 고택들이 많습니다.

시간이 없어 잠시 잠시 구경한 옛 고택들

원촌마을에 있는 독립운동가이자 목회자였던 이원영목사의 생가입니다.

이 건물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었던 사은 이귀운의 집으로서 그의 호를 따 사은구장(仕隱舊庄)이라고 합니다.

 

 

사은구장 바로 옆에는 조선 후기 문신 이만유 선생의 목재고택입니다.

이육사 시비와 생가터도 가까이 있습니다.

 

 

도산면 토계리에 있는 퇴계 이황의 종택입니다.

원래 있던 건물은 왜넘들의 방화로 소실되었고 이 건물들은 13대손 하정공(霞汀公) 이충호(李忠鎬)가 1926∼1929년에 지은 것이라 합니다.

근대에 지은 집이지만 안동 양반 대종가의 집으로서 품위가 느껴지네요.

 

 

집 안으로 들어가는데 갑자기 이넘이 튀어 나와 놀랐네요.

지가 더 놀랐겠지유...ㅎ

 

 

퇴계선생고택이란 현판이 달린 문으로 들어가면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이란 정자를 만나게 되는데 특이하게 고택과 어울리지 않는 유리창으로 되어 있습니다.

안에 들어갈수도 있습니다.

 

 

앞쪽 냇가에는 오래전 퇴계가 아이들을 가르키던 서당 건물이 복원되어 있습니다.

이름은 계상서당(溪上書堂).

퇴계가 은퇴하여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입소문으로 아이들이 넘쳐 후에는 도산서당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학구열은 옛이나 지금이나 꼭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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