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넋두리

양심을 적는 지하철 종점역의 대출 장부

딸애가 아이 둘을 어린이집에 보낸 후 남는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뭔가를 배우러 다니는데 이날은 아침에 아이들이 조금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급하게 어린이집에 아이들을 맡기고 지하철을 타려 하는데 글쎄 지갑을 놔두고 나온 것입니다.


지갑뿐만 아니고 휴대폰 케이스에 늘 한 장 꽂아 두었던 교통카드 겸 신용카드도 그 전날 아이들이 만지면서 빼 둔 걸 챙기지 못하고 나와 버렸구요. 다시 집까지 되돌아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하여 진땀을 흘리며 고민하다가 혹시나 하여 역 창구에 갔답니다.


"저 아저씨, 죄송한데요.."


하면서 창구 직원분께 사정 이야기를 하면서 1,500원만 빌려 달라고 했더랍니다.

그러자 그분은 딸애를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더니 뭔 서류철을 하나 주면서 이름하고 금액을 적으라고 하더래요.

그곳에는 이름을 적는 칸과 금액을 적는 칸이 있고 위에는 다른 사람들의 이름들도 죽 적혀 있더랍니다.

즉, 대출 장부인 셈입니다. 이자 없이 급전을 빌려주는..


참고로 우리 집(딸과 한동네)이 있는 곳은 얼마 전까지 지하철 종점역이었습니다. 지금은 두 정거장이 더 늘어나 완전 종점은 아니지만... 

그러니까 사람들이 밤늦게 종점역에 내려 택시를 타야 하거나 딸애같이 지갑을 두고 나온 이들이 간혹 있는데 그 장부는 그분들을 위해 마련한 것입니다.


딸애는 동료한테 돈을 빌려 되돌아오면서 지하철역에 들려 그 돈을 갚고 장부의 이름에 줄을 그었답니다.

근데 정말 뜻밖인 것은 그 장부는 적는 곳이 딱 두 칸이랍니다.

이름과 금액을 적는 두 칸..

그것도 본인이 직접 적는 것입니다.


딸애가 저녁에 제집에 와서 이 이야기를 하는데 본인은 출근 때 너무 당황했는데 그 장부를 보고 너무 기분이 좋았답니다.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그냥 이름과 금액을 적어주면 돈을 빌려주는 종점의 지하철역.

지하철 창구에다 돈을 빌리러 가는 그 급박함과 민망함을 차분히 덮어주면서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양심만 담보하는 아름다움.


아무것도 확인하지 않고 이름과 금액만 적는 대출 장부.

이 세상이 이렇게만 변해 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봅니다.

양심이 신용이 되는 사회.

정말 기다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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