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고향 인근 마을에 귀향하여 살고 있는 친구가 있다.
몸이 많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풍문으로 듣고는 있었는데 차일피일 하다가 며칠 전 시골 들린 김에 그 친구를 찾아갔다.
수십 년 만에 보는 얼굴.
알아는 보겠는데 그도 많이 변해 있었다.
그의 여자도 같이 내려와 있었다.
그가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시골 고향에 데리고 와서 온 동네 자랑삼아 소개한 그 여자가 맞다.
그 친구는 형제가 무려 11명이었는데 그 시절의 형편으론 그 많은 아이들 공부를 제대로 시키는 건 어려웠다.
그도 국민학교만 졸업하고 부산에 돈 벌러 갔는데..
고교 방학 때 시골 들리니 이 친구가 부산 큰 회사의 고주파실에 근무한다고 해서 출세했나 하고 반가움에 면회를 갔었다.
그는 국제화학에서 왕자표 고무신을 만들고 있었다.
그가 사 주는 짜장면을 얻어먹고 되돌아오는 길, 왜 그리 가슴 쏴 하던지...
그 뒤 이런저런 직업을 전전하면서 돈도 제법 벌었다는 이야기도 듣긴 했는데 이번에 시골 귀향하면서 땅 사고 집 짓는다고 모두 써 버렸다고 한다.
"뭐 먹고 살려고?" 하니 부산에 아파트가 두채 있다고 한다.
자격지심이 강한 그의 성격으로 미뤄 반 정도만 믿는다.
어린 시설 코 묻은 추억 이야기를 나누고,
담에 보자며 돌아왔는데..
그저께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여자 목소리다.
내 이름을 찾으면서 묻는다.
ㄷ현 씨 맞아요?
맞는데, 누구세요?
야, 맞네. ㄷ현아 내 인순이다.
인순?
"그래 내 송인순이다. OO가 네 전화번호를 알려 주더라."
그 친구가 번호를 알려준 모양이다.
"옴마야, 정말 오랜만이에요. 잘 있지요?
말 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어... 잘 있어요. 어디 살고 있는데.."
나도 덩달아 꼬리가 올라가다가 다시 내려왔다.
"시골.. 서울 살다가 아이들 다 커고 혼자된 이후로 시골 와 있어."
그녀가 살고 있던 동네는 우리 고향마을과 이웃하고 있던 곳인데 우리 동네보다는 두 배 정도 큰 마을이었다.
난 입대 전 몇 달간 시골에서 시간만 축내고 있는 중이라 저녁 마실을 그 동네로 자주 갔다.
방학이라 애들이 고향으로 거의 내려와 있었는데 뭔 주제를 맨날 만들면서 세상 이야기 나누며 술을 어지간하게도 많이 마셔댔다.
시국이 한창 시끄러울때였다.
우리 고향 동네와는 달리 이 동네는 동갑 처녀들도 많았는데 거의 같이 어울리면서 안주거리를 준비해 주곤 했었다.
지금 같은 세상이면 이상한 눈으로 볼 수도 있겠는데 그때는 참 순진한 건지 시골 동네라서 그런지 친구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고.
(혼자된 이후로 시골에..)
인순이의 말이 귀전 한쪽에서 맴맴거리며 울리는데 나는 못 들은 척 다른 잡다한 이야기들로 대화를 나눈다.
수십 년 만의 대화라 주제가 그리 많지 않아 약간 어색감이 드는데,
60 중반을 지난 인순이는 상기된듯한 목소리로,
뜻밖의 이야기를 한다.
"ㄷ현아, 니 아나? 내 니 얼마나 좋아했다고.."
.......
당황스럽다.
갑자기 뭔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는다.
인순이는 말을 잇는다.
"그때 우리 동네 와서 놀던 기억이 많이 난다. 니 그림도 잘 그리고 술도 많이 마셨제. 니 멋있었다. 그때 칵 고백하는 긴데.."
갑자기 할 말이 없다.
겨우 한다는 말이..
"그랬었나? 니도 참 예뻤는데.."
전화를 끊고 나니 여러 가지 생각이 많이 든다.
인생사 수많은 길모퉁이에서 만나고 헤어진 인연들..
인생사 수많은 갈림길에서 내가 선택했던 그 길..
사소한 하나라도 바꿔졌다면 지금 나의 인생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사소한 하나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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