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는 요즘 난리 났습니다.
평일인데도 피크시즌 휴일처럼 온 도심이 여행객들로 가득합니다.
에이펙(APEC) 때 꾸며놓은 여러 가지 볼거리와 전시회들이 가득한 데다 또 가을이라 더욱더 많은 여행객들이 찾고 있네요.
그중 가장 핫한 장소가 바로 신라 금관 전시가 되고 있는 경주박물관의 특별전시관.
이번 전시회는 APEC 2025 정상회의와 국립경주박물관 개관 80주년을 기념하여 개최되고 있는 특별전으로 12월 18일까지 개최가 되는 걸로 되어 있네요.
‘신라 금관, 권력과 위신’이란 주제로 열리고 있는 이번 전시회는 신라 금관이 세상에 처음 알려진 지 104년 만에 신라 임금님의 여섯 점 금관이 한자리에 모여 전시되는 사상 최초의 전시회입니다.
같이 선보이는 신라 왕실의 위엄 여섯 점의 금허리띠고 마찬가지이구요.
이걸 구경하려고 벼루고 벼루다가 평일날 아침 국립경주박물관으로 달려갔는데 주차장은 이미 난리법석.
긴 주차줄에 서 있는데 앞쪽 본 주차장에서 한대가 쏙 빠지는 바람에 운 좋게 바로 주차..
10시도 되기 전에 도착했는데도 이미 오후 2시 30분 입장권이 배부되고 있네요.
(9시 20부터 30분 간격으로 150명을 입장시키는 선착순 입장권을 배부합니다. 입장권은 무조건 1인 1매이고 주차 및 전시 관람은 모두 무료입니다.)
입장권 표를 받고 전시회 입장 시간인 오후 2시 30분까지 가만히 기다릴수는 없어 여유 있는 네댓 시간을 모처럼 천천히 박물관 인근의 여러 곳들을 둘러봤답니다.
신라 금관 여섯점, 금허리띠 여섯점을 둘러보고 나서 느낀점은 1,500년이 지난 요즘의 세공기술로도 이처럼 정교한 금관이나 허리띠를 만들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정말 놀랍고도 화려한 황금 작품의 절정입니다.
여행일자 : 2025년 11월 7일

지난 10월 28일부터 다음달 14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회는 황금의 문화가 절정으로 꽃피던 5세기와 6세기의 신라 권위의 상징인던 황금 문화 시기에 만들어진 왕관 전시회입니다.
신라 왕관이 출토된 후 여섯점이 모두 한자리에 모인 건 이번이 처음.
정말 의미있는 전시회입니다.

박물관은 사람들로 엄청 붐빕니다.
특별 전시회를 구경할려고 오신 분들이 거의 대다수지만 오전 10시 지나서 하루 전시회 관람 입장권이 모두 배부가 되는 바람에 그냥 박물관에 전시된 일반 전시물을 관람하는 분들이 많았답니다.

오늘 전시물을 관람하면서 제 사진 기술에 한계를 느껴 매우 아쉬움이 듭니다.
실제 전시물은 모두 완전하게 황금색입니다.
근데 전시장의 조명과 사진 찍는 기술 부족으로 인해 비까번쩍하던 금관들이 모두 동으로 만든 왕관처럼 보여지네요.

망치나 있었을까?
뭘로 이처럼 정교하게 만들 수 있었을까?
말 그대로 한땀한땀..
온전한 수공예의 진수입니다.

참말로 놀랍네요.
이걸 머리에 쓰고 있으면 움직일때마다 뭔가 ..
찰락~찰락... 하는 소리가 날 것 같은데 임금님만이 즐길 수 있는 특별한 오디오였을 것 같네요.

이걸 디자인을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구도, 간격, 소재, 크기...

날개 모양으로 생긴 금관총 순금 장식.
국보문화재입니다.
전시물은 몇개 되지 않는 전시관이지만 너무 특별한 전시물이라 천천히 보게 되네요.

일단 입장만 하면 관람시간 제한이 없기 때문에 느긋합니다.

전시물은 몇 점 되지 않습니다.
금관 6점과 금허리띠 여섯점. 머리를 장식하는 관식 1점이 전부입니다.
사진의 색상이 실물과 많이 다르개 표현되어 많이 아쉽네요.
실물은 완전 황금색입니다.


교동금관
입구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금관.
(설명글)
최종호라는 한 도굴꾼이 경주시 교동의 한 폐고분에서 도굴했다가 1972년 국가에 발각되어 압수당한 신라시대 금관이다.
증언에 따르면 최종호는 1969년부터 3년에 걸쳐 그 고분을 도굴하였는데, 특히 도굴을 위해 고분 바로 근처에 미리 세를 든 뒤, 남 모르게 담장 밑으로 굴을 파고 들어가 이 금관을 비롯한 많은 유물들을 도굴하는 교묘한 방법을 썼다고 한다.
고분발굴에서 출토유물의 연대를 추정하려면 출토정황과 공반유물, 고분 구조와의 관계 등을 모두 고려해야 하는데, 교동 금관은 도굴품이기 때문에 도굴자의 증언에 의존하여 분석할 수밖에 없다.
또한 도굴꾼의 증언에 의존해야 하는 유물을 학술적 자료로 삼을 수 있느냐 하는 논쟁도 다소간 있다.
현재도 학술적 자료로 적극 활용하는 연구자와 간단히 참고자료로만 활용하는 연구자로 나뉜다.
같이 도굴당한 다른 유물들은 이미 최종호가 세상 곳곳에 팔아넘겨 흩어졌기 때문에 연대판단의 근거가 다소 불확실하다.
하지만 대도 손잡이, 금제완(金制碗)과 곡옥 몇 점 등이 교동 금관과 함께 회수되었고 도굴꾼이 증언하여 공반유물로 인정되었다.
유물 구성이 대릉원의 여러 대형 고분들과 유사하기 때문에 대략적인 연대는 4~5세기(서기 3~400년대)라고 많은 연구자들이 동의한다.
세부적으로는 금관의 형태적인 측면에서 신라 금관의 전형적인 모습이 나타나기 이전의 초기형태라고 여긴다.
호림 금관, 부산 복천동 출토 금동관과 양식이 비슷한데 형태로 보아 마립간 시기 초기에 만든 이른 시기의 금관으로 추정한다.
한편 여태 확인된 금동관이나 금관을 통틀어서 작은 편이다.
금관의 대륜 지름이 14 cm에 불과하여 금령총 금관처럼 어린 아이의 것으로 본다.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이들은 교동 64번지 고분을 어린 왕족의 무덤으로 보기도 한다.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재질을 조사한 결과 순도 88.8%의 순금이었다.
(설명글 나무위키 인용)

천마총 금관과 금허리띠
(설명글)
1973년 경주관광 개발사업의 일환으로 발굴조사한 천마총에서 발견된 삼국시대 신라의 금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소장 중이고 국보 제188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32.5 cm, 지름 20 cm의 금관으로, 무덤의 피장자의 턱까지 씌워진 채로 발견되었다.
이러한 발굴 정황 때문에 이 금관이 일상적으로 쓰던 금관이라기보다는 매장할 때 특별히 쓰던 제례 용품에 가까웠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
천마총에서 발견된 신라시대 금관으로 현재까지 발견된 금관 중 가장 크고 화려한 금관으로 유명하다.
제작연대는 대략 5~6세기라고 추정한다.
아직 완전히 확정되진 않았지만 지증왕의 금관이라고 추정한다.
그 화려함이 당시 팽창기에 있던 고신라(古新羅)의 국력과 강력해진 왕권을 상징한다.
천마총 관모, 천마총 금제 허리띠 등과 함께 세트로 구성되었다.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재질을 조사한 결과 순도 83.5% 순금으로 판명되었다.
1978년 12월 7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금허리띠는 황금판으로 만든 띠꾸미개 44매에 금제 허리장식 13줄, 금동제 허리장식 2줄을 매달고 그 아래에는 단검, 곡옥, 숫돌, 족집게, 물고기, 원통, 유리구슬 등 형태를 황금 장신구로 만들어 장식했다.
다른 황금 허리띠들과 함께 신라의 정교한 황금세공기술을 보여주는 유물로, 신라시대 금세공기술 및 금속공예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이도 역시 1978년 12월 7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설명글 나무위키 인용)

천마총 금관

금관총 금관과 금허리띠
(설명글)
경상북도 경주시 노서동 금관총에서 출토된 신라의 금관 및 금제 관식이다.
현존하는 삼국시대 금관 유물 중 최초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유물로, 당시 금관총에서 금관이 발견되면서 경주 일대에 방치되어 있던 신라왕릉들에 대해 일본 학계가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신라시대 고분들에 대한 대대적인(학술 목적 조사보다도 왕릉에 부장된 보물들에 대한 발굴을 주 목적으로 하는 것처럼 보이는) 도굴붐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금관총 금관 및 금제 관식은 금관의 내관과 외관, 그리고 금으로 된 장신구(관식)까지 해서 일종의 세트를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금관총 금관은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신라금관의 가장 전형적인 형태가 잘 드러난다고 평가 받으며, 내관과 외관이 모두 갖추어져 있어서 완형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 보존가치도 높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대한민국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금허리띠는 금관총 금관 및 금제 관식과 셋트로 1921년에 금관총에서 출토된 유물로, 제작 연대는 동일하게 5세기경(서기 400년대)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 금관총에서는 장신구류, 꾸미개류, 말갖춤류, 무기류, 용기류 등의 신라시대 유물들이 약 4만여 점이나 출토되었는데 그 중 금관총 금관과 함께 가장 유명한 유물이다.
이 금제 허리띠는 무덤 주인인 이사지왕의 허리 부근에서 발견되었고 그 옆에는 금동제와 은제 허리띠가 함께 있었다.
이보다 백년 앞서 4세기(서기 300년대) 초에 만들어진 경북 영주 금동제 허리띠와 비교하여, 금관총 금제 허리띠는 300~400년대 한반도의 금 세공기술 및 허리띠 양식에 대한 연구에서 귀중한 사료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과 거의 비슷한 허리띠꾸미개 장신구가 백제 웅진시기 왕족무덤인 공주 송산리 4호분에서도 출토되어, 5세기 후반 신라와 백제 간에 교류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물이기도 하다.
역시 국보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다.
(설명글 나무위키 인용)

금관총 금관

금령총 금관과 금허리띠
(설명글)
일제강점기인 1924년 일본인 우메하라(梅原末治) 등이 금령총을 발굴·조사하던 중 발견한 신라시대 금관으로,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 소형방제경(小形髣製鏡), 주형토기(舟形土器), 그림이 그려진 백화수피제(白樺樹皮製), 금동제신발, 은제허리띠, 띠드리개, 금동장안장틀(金銅裝鞍橋), 발걸이(鐙子), 금동장고리자루칼, 금은장소도(金銀裝小刀), 금동제합(金銅製盒), 쇠솥, 각종 그림이 그려진 칠기(漆器), 유리잔 등 고신라시대 유물 약 만여 점과 함께 출토되었다.
제작연대는 같이 출토된 다른 유물들과 마찬가지로 대략 6세기 초엽이라고 추정한다.
금관의 지름이 16.5 cm에 불과한데, 머리 크기로 보아 금령총에 묻힌 인물은 교동 금관의 주인과 마찬가지로 10세 전후인 어린 소년인 듯하다.
신라의 정교한 황금 세공 기술을 보여주는 유물로, 신라시대 금세공기술 및 금속공예사를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1963년 1월 21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재질을 조사한 결과 순도 82.2% 금으로 판명되었다.
금허리띠는 금관과 마찬가지로 일본인 우메하라(梅原末治) 등이 금령총을 발굴·조사하던 중 발견했습니다.
이 역시 허리띠의 전체 길이는 74㎝ 정도로 다른 신라 무덤 출토품과 비교하면 작은 편인데 이는 금령총 금관과 함께 금령총의 주인이 어린 아이였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보물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있구요.
(설명글 나무위키 인용)

금령총 금관

황남대총 남분 금허리띠
(설명글)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신라시대 금제 허리띠로, 제작 연대는 대략 4세기 후반~5세기 초반(서기 300~400년대 사이)로 추정되고 있다.
같은 시기에 제작되어 황남대총에 함께 묻힌 황남대총 북분 금관, 황남대총 북분 금제 허리띠, 황남대총 남분 금목걸이, 황남대총 북분 금팔찌 및 금반지, 황남대총 북분 유리잔, 황남대총 북분 은제 관식, 황남대총 북분 금제 고배, 황남대총 북분 은잔, 황남대총 북분 금은제 그릇 일괄, 황남대총 남분 금제 관식, 황남대총 남분 은관, 황남대총 남분 은제 팔뚝가리개 등 7만여점에 이르는 유물들과 함께 발견되었다.
이 황금 허리띠는 발굴 당시 시신의 앞쪽에 위치하고 있었고, 그 형태는 크게 순황금으로 금형을 뜬 34매의 띠꾸미개와 7개의 요패로 구성되어 있었다.
허리띠 띠드리개에는 금으로 만들어진 골무를 씌운 청색 곡옥이 3개, 족집게형 장식 1개, 물고기형 장식 1개가 장식되어 있었는데, 대형 띠드리개의 경우 시신의 왼쪽에 달려서 황남대총 북분 금제 허리띠가 오른쪽에 달린 것과는 위치가 정반대였다.
이는 곧 당시 남녀에 따라 허리띠의 패용방식이 다르다는 점을 말해 준다.
전체적으로 볼 때 북분에서 발견된 황남대총 북분 금제 허리띠보단 화려함이 덜하지만, 이 역시 신라시대 금세공기술 및 금속공예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여겨진다. 1978년 12월 7일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되었다.
(설명글 나무위키 인용)

황남대총 북분 금허리띠
(설명글)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신라시대 황금 허리띠로, 제작연대는 대략 4세기 후반~5세기 초반로 추정한다.
같은 시기에 제작되어 황남대총에 함께 묻힌 황남대총 북분 금관, 황남대총 남분 금목걸이, 황남대총 북분 금팔찌 및 금반지, 황남대총 북분 유리잔, 황남대총 북분 은제 관식, 황남대총 북분 금제 고배, 황남대총 북분 은잔, 황남대총 북분 금은제 그릇 일괄, 황남대총 남분 금제 허리띠, 황남대총 남분 금제 관식, 황남대총 남분 은관, 황남대총 남분 은제 팔뚝가리개 등 7만여 점에 이르는 유물들과 함께 발견되었다.
같이 묻힌 황남대총 남분 금제 허리띠보다 훨씬 화려하고, 여자의 신체에 맞춰 착용방법도 다르다.
신라시대 여성과 남성의 허리띠 착용법의 차이를 연구할 수 있다.
허리띠에는 황금 금판, 순금 곡옥 2개, 족집게형·물고기형 장신구, 금장도 등이 달렸다.
중국, 일본 등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 유물이라 중요하다.
1978년 12월 7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192호로 지정되었다.
(설명글 나무위키 인용)

황남대총 북분 금관
이 금관은 전시관 복판에 전시되어 있는데 성인 평균 키 높이에 맞춰 전시되어 유리관 뒤편에서 금관을 쓰고있는 형태의 인증 사진을 찍을 수 있게끔 해 둔 것이네요.
이곳에는 많은 이들이 금관을 쓴 모습을 찍기 위해 줄을 서고 있구요.
큰 키는 쭈구리면 되지만 키가 적은 분은 조금 애로가..
(설명글)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신라시대 금관으로, 제작연대는 대략 4세기 후반~5세기 초반이라고 추정한다.
같은 시기에 제작되어 황남대총에 함께 묻힌 황남대총 북분 금제 허리띠, 황남대총 남분 금목걸이, 황남대총 북분 금팔찌 및 금반지, 황남대총 북분 유리잔, 황남대총 북분 은제 관식, 황남대총 북분 금제 고배, 황남대총 북분 은잔, 황남대총 북분 금은제 그릇 일괄, 황남대총 남분 금제 허리띠, 황남대총 남분 금제 관식, 황남대총 남분 은관, 황남대총 남분 은제 팔뚝가리개 등 7만여 점에 이르는 유물들과 함께 발견되었다.
황남대총은 발굴 당시 남쪽에 있는 남분(南墳)이 왕의 능이고, 북쪽의 북분(北墳)은 그의 부인인 왕비의 능이었음이 밝혀졌는데, 특히 북분의 발굴 당시 발견된 은제 허리띠 꾸미개에 '부인대(夫人帶)'라는 구절이 있으므로 여자가 쓰던 관임이 거의 확실하다.
그런데 정작 북분에서 발견된 이 여성용 금관은 크고 화려한 금관인 반면, 남분에 안장된 남성용 금관은 상대적으로 덜 화려한 금동관이어서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여러 설이 나오고 있지만 현재까지도 여전히 여성이 남성보다 더 귀한 관을 쓰고 있는 정확한 이유는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무덤 축조 시기의 경우 최초 한일학계에서는 황남대총과 같은 거대한 신라 능묘는 고구려의 영향에서 벗어난 신라가 독자적인 발전을 이룬 시기에 만들었을 것으로 파악하여 눌지 마립간(417년~458년 재위)의 왕릉이라는 설이 다수였으나, 이후 지속적인 신라시대 유물 발굴 및 연구가 이루어지면서 기존 신라의 내적 수준을 지나치게 낮추어 보는 시각을 비판하는 여론이 한중일 동아시아 삼개국 역사학계에 두각을 나타냈다.
현재 이 왕릉의 축조시기도 내물 마립간(356년~402년 재위) 혹은 실성 마립간(402년~417년 재위) 시기로 보는 시각이 대세이다.
즉 이 금관의 주인도 남분에 묻힌 왕이 누구냐에 따라 그 시기의 왕비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러나 북분의 주인이 자비 마립간이라는 주장도 있으니 이 설을 따르면 자비왕이 이 금관의 주인이었을 것이다.
이에 따라 이 금관 및 왕릉에서 함께 발견된 유물 7만여 점은 356년~417년 사이에 한반도에서 제작되었다고 거의 확실시된다.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재질을 조사한 결과 순도 86.2%의 순금으로 확인되었다.
현재 국보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있다.
(설명글 나무위키 인용)

서봉총 금관
(설명글)
1926년에 경주 노서동 제129호분 서봉총에서 당시 스웨덴 황태자였던 오스칼 프레드리크 빌헬름 올라프 구스타프 아돌프(Oscar Fredrik Wilhelm Olaf Gustaf Adolf)가 발굴한 신라시대 금관이다.
이때 다수의 부장품이 함께 발견되었는데 그중 은제대합(銀製大盒)에 고구려의 연호인 연수 원년 신묘년 3월에 왕이 제작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이 금관도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추적해보면 서기 391년, 451년, 511년 중 하나인데 서봉총의 무덤 양식인 돌무지덧널무덤은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초반까지 축조되었으므로 511년은 너무 멀고 서기 391년이나 451년 중 하나라고 추정한다.
서봉총 금관 고분의 규모와 출토유물로 보아, 당시 신라의 왕비나 또는 왕비에 버금가는 최고 지배층의 여성이 사용했다고 추측한다.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재질을 조사한 결과 순도 80%의 금으로 확인되었다.
국가 보물로 지정이 되어 있다.
(설명글 나무위키 인용)

서봉총 금관과 금제허리띠
(설명글)
금제허리띠는 위 사진의 서봉촌 금관가 마찬가지로 스웨덴 황태자였던 오스칼 프레드리크 빌헬름 올라프 구스타프 아돌프(Oscar Fredrik Wilhelm Olaf Gustaf Adolf)가 발굴했는데 기고문(동아사이언스)에 따르면 구스타프 아돌프 황태자는 이 허리띠를 먼저 발견한 후 이어서 서봉총 금관을 발견하였다.
이후 1935년 평양의 기생인 차릉파가 서봉총 금관과 함께 이 금제 허리띠를 착용하여 사진을 찍어 논란이 된 적이 있다.
국가 보물로 지정이 되어 있다.
(설명글 나무위키 인용)

얼마 전 APEC에서 트럼프한테 준 선물.
이건 천마총 금관을 모형으로 한 것으로서 전체가 금이 아니고 도금처리를 했는데 순금이 1kg(267돈) 들어 갔다고 합니다.
우리 집 김여사 몇년 전 한갑때 금덩어리 조그만거 하나 선물 했더니만 그 약발이 몇 개월 정도는 가던데 역시 금이 최고..
어찌되었건 아직도 세계 유일의 초 강대국인 미국..
자원없이 수출로 먹고 사는 우리나라는 미국의 입김을 무시 할 수 없다는 안타까움과 함께 금 좋아하는 트씨한테 참말로 할 수 없이 아부성 비위를 맞춰야하는 한국.
신라 천년의 혼결이 담긴 금관이 역할을 한번 해 보기를 기대해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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