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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일기

거창사건추모공원 국화관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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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스한 주말.

거창사건추모공원 국화축제를 다녀 왔습니다.

엄청나게 잘 꾸미고 멋지게 만들어 두었는데 관람객이 많지않아 구경하는 내내 미안한 기분이 들었네요.

아마도 홍보가 덜 되어 그런것 같습니다.

 

거창사건추모공원은 6.26때 이곳 거창 신원면 일대에서 희생이 된 양민들의  혼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곳입니다.

인민군 부역자로 몰려 아무죄도 없는 시골 벽촌 동네사람들이 어린아이 포함하여 모조리 우리 군인들에 의하여 총살당한 곳입니다.

양민학살 사건의 대표적은 곳으로는 지리산 자락 산청과 함양, 그리고 이곳 거창이 대표적인 곳입니다.

추모공원은 거창추모공원과 산청,함양추모공원이 따로 만들어져 있구요.

세월이 이만큼 흘렀는데도 이 사건의 명칭은 아직까지도 양민학살사건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거창사건이니, 산청사건이니.. 이렇게 부르고 있답니다.

 

방문일시 : 2025년 11월 8일

 

 

 

거창사건은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모두 우리 군경에 의하여 희생된 우리 양민들입니다.

 

날짜와 희생된 장소및 인원

1951년 2월 9일 신원면 덕산리 청연골에서 주민 84명 학살

2월 10일 대현리 탄량골에서 주민 100명 학살

2월 11일 과정리 박산골에서 주민 517명 학살

2월 9일 ~ 2월 11일 기타지역에서 주민 18명학살 등

 

『일부 미련한 국군』에 의해 719명이 학살된 거창양민학살사건은

15세 이하 남녀 어린이가 364명, 16세 ~ 60세가 295명, 60세 이상 노인이 60명(남자 333명, 여자 386명), 무고한 양민 719여명이 당시 11사단(사단장 최덕신 준장), 9연대(연대장 오익경 대령), 3대대(대대장 한동석 소령) 병력의 총검에 무지막지하게 학살되어, 처참한 시신위에 마른 나무와 기름을 뿌려 불로 태워 버리기까지한 천인공노할 사건을 저질러 놓고 후한에 두려움을 느낀 한동석은 신원면 일원에 계엄령을 내려, 이방인 출입을 막고, 어린이 시체는 골라내어 학살 현장에서 약 2㎞ 떨어진 홍동골 계곡으로 옮겨 암매장하여 은폐를 하고, 공비와 전투를 하여 희생자가 발생된 것으로 왜곡을 하였으나, 1951년 3월 29일 거창 출신 신중목 국회의원에 의해 국회에 폭로되고, 1951년 3월 30일 국회와 내무·법무·국방부의 합동진상조사단이 구성되어 1951년 4월 7일 합동진상 조사단이 신원면 사건 현장으로 오던 중 길 안내를 맡은 경남 계엄민사부장 김종원 대령은 신성모 국방 장관과 사전에 모의하여 9연대 정보 참모 최영두 소령의 수색 소대로 하여금 군인을 공비로 위장 매복시켜, 거창읍에서 신원면으로 통하는 험준한 계곡의 길목인 수영더미재에서 합동진상조사단에게 일제히 사격을 가해 조사를 못하고 되돌아 가게 하는 등 국방의 의무를 진 군인으로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만행에 대하여,

 

1951년 7월 27일 사건발생 5개월여만에 대구고등군법회의는

「재판장에 강영훈 준장, 심판관에 정진환 준장, 이용문 대령, 법무관에 이운기 중령, 검찰관에 김태청 중령, 김부남 소령, 김동수 대위」로 심판부를 구성하여, 1951년 12월 15일 구형공판에 이어 동년 12월 16일 판정판시에서 9연대장 오익경 대령 무기징역(구형 사형), 3대대장 한동석 소령 징역 10년(구형 사형), 소대장 이종대 소위 무죄(구형 징역 10년), 계엄민사부장 김종원 대령 징역3년(구형 징역 7년)으로 관련 군지휘관에게 실형이 확정 되므로서 책임이 국가에 있는 거창양민학살사건은 희생자와 유족에 대해 잘못을 뉘우치기 는 커녕 기회만 생기면 탄압을 가했다. 1961년 5.16 군사정부는 5월 18일 유족회 간부 17명을 반국가 단체로 몰아 투옥을 시키는 등 동년 6월 25일 경남지사 최갑중은 당시 학살현장 접근이 어려워 3년여만에 유골을 가매장할 때 앙상한 뼈로서는 성별 구별을 할 수가 없어 큰뼈는 남자, 중간뼈는 여자, 작은뼈는 소아로 구분, 화장하여 517기를 합장하여 놓은 박산합동묘소에 개장 명령을 내려, 천신만고 끝에 만들어진 묘역을 파헤쳐서 유족들은 뼈가루와 흙한줌으로 조부, 조모, 부모, 형제, 자매에 유골로 대산하여 거주지 공동묘지에 개인별로 개장하라 하였으며, 위령비는 글자 한자 한자를 정으로 지워서 땅속에 파묻어 제2의 학살인 부관참시를 당한 사건이 거창 양민학살사건이다.

(내용은 거창사건추모공원 홈 페이지에서 발췌)

 

조금 더 리얼한 내용으로 보시려면 이곳 보시면 됩니다.

 

 

거창 신원면 박산골학살장소와 거창사건추모공원 위치

지도로 보시려면 장소는 이곳입니다.

 

 

추모공원 가기 전 들린 박산골학살현장

 

거창양민학살사건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곳이 이곳 박산골학살현장인데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턴투데이에서 인용)

 

6·25전쟁 중 국군과 경찰이 거창군 신원면 일대를 수복하기 위해 토벌작전 ‘견벽청야’을 전개할 무렵에 발생했다.

‘견벽청야’는 인민군과 빨치산이 주민으로부터 식량을 확보하고 주민의 인력과 물건을 이용하지 못하게 산간벽촌의 물자를 다른 곳으로 옮기고 가옥을 파괴하는 작전이다.

 

육군 제11사단 9연대장 오익경은 3대대장 한동석에게 '견벽청야' 작전을 지시했다.

이에 1951년 2월 5일 3대대는 신원면 일대를 수복했지만, 2월 8일에 신원지서가 빨치산 공격을 받는 사건이 발생했다.

국군이 3일간 감행한 거창 주민 학살 신원지서가 빨치산의 공격을 받자 군인들은 다시 신원면에서 '견벽청야' 작전에 나섰고, 신원면 청연마을에서 첫 집단 학살이 발생했다.

 

군인들은 집집마다 불을 질렀다.

주민 84명을 논으로 내몰아 소총과 기관총으로 학살했다.

이튿날 2월 10일, 군인들은 신원면 ▲중유리 ▲대현리 ▲와룡리 마을 전체를 방화했다.

또한, 군인들은 주민을 과정리 신원초등학교로 끌고 가는 도중에 노약자 2명을 사살하고, 주민 100명을 탄량골로 몰아넣어 죽였다.

 

군인들은 신원초등학교에 신원면 주민 약 1000명을 감금하고, 군인·경찰·공무원 가족은 풀어줬다.

2월 11일, 군인들은 감금한 주민을 초등학교에서 박산골로 끌고 갔다.

군인들은 박산골로 가는 도중에 주민이 빨리 가지 않는다며 총기를 난사했다.

도로변에서 주민 16명이 사망했다.

주민들은 박산골에서 군인들이 만들어둔 구덩이 빠져 무차별 총격을 받았고, 그들의 시신은 군인들에 의해 불탔다.

이렇게 박산골에서만 517명이 학살당했다.

 

 

주차하고 1~2분만 걸어가면 되는 장소라 이곳 인근을 지나는 길이면 한번 들려보면 좋습니다.

 

 

 

 

 

지금은 정비가 되었지만 이 골짜기에 양민 500명 이상이 우리 군인들에 의하여 무차별 총격을 받아 사망한 곳입니다.

거창양민학살사건 전체 희생자 719명 중 이곳 박산골에서만 517명이 희생이 되었고 전체 719명 중 15세 이하 남녀어린이가 359명.

이들이 뭘 안다고 모두 죽였을까요?

 

 

아직도 바위에는 총탄 자국이 선명합니다.

 

 

건너편으로는 가창 감악산이 보이네요.

 

 

조금 더 지나 도착한 거창사건추모공원.

가을이 완연하구요.

 

 

오늘 독수리 4형제 중에서 3번째 손자인 아인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집에서 형들이 몇일 뒤 무슨 시험을 보기땜에 공부를 해야 하는데 가을 나들이 간다고 하니 데리고  가 달라고 하네요.

 

 

정말 많은 국화들로 장식을 해 두었네요.

 

 

어린이들 체험부스도 몇 곳 있는데..

 

 

이곳 부스 담당자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초등학교(거창국교)와 중학교(거창대성중학교) 15년 정도 후배.

90도로 깍듯이 경례를 하며 존중해 주네요.

덕분에 꼬맹이 아주 친절하게 체험도 하구요.

 

 

오늘 동행한 셋째 손자 아인이.

첫째와 둘째는 어린이집 다닐때부터 훈민정음과 기초영어까지 열공을 시키더니 애는 초등학교 들어갈때까지 전혀 내몰라라 해 버린 덕분에..

 

초등학교 입학을 했는데도 책을 읽을줄 몰랐답니다.

그러다가 남들 하는거 조금 따라 잡아서 이제는 대강 글은 읽을 줄 아네요.

공원입구에 들어가면서  적혀있는 내용들을 읽는걸 보니 얼마나 신기하던지. ㅎ

요즘 세상에... 참 내

 

 

아주 성의있게 멋지게 꾸며 두었는데 관람객이 없어도 너무 없습니다.

썰렁..

홍보가 너무 안되었나 봅니다.

 

 

 

 

 

우리끼리 돌아다니며 이곳 저곳 사진도 찍고  맘껏 구경.

 

 

 

 

 

 

 

 

숨은 그림찾기 : 김여사

 

 

 

 

 

 

 

 

 

 

 

사진에 사람들이 나오지 않고 꽃만 나오니 좋긴 좋네요.

 

 

멀리 다정하게..

 

 

 

 

 

거창 감악산

 

 

 

 

 

노래하는 분들도 초빙이 되었는데 구경꾼이 아무도 없어 ..

보는 제가 미안할 지경.

 

 

 

 

 

 

 

 

 

 

 

 

 

 

규모가 상당히 넓은데 모두 둘려보려면 대략 1시간 정도 잡으면 될 것 같습니다.

 

 

 

 

 

실내 교육관

 

 

 

 

 

 

 

 

이 사건을 최초 국회에서 고발한 신중목 의원.

 

 

생존자의 증언들.

거창사건에서 700명이 넘는 분들이 국군의 의해 죽었는데 이중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분들도 있답니다.

1951년 2월 9일 일부 국군이 처음으로 주민들을 집단학살한 청연마을에서는 이곳에서 84명의 마을주민들이 숨졌는데, 김운섭(남·9세), 김운출(남·2세), 정영자(여·10세), 김미순(여·2세), 김경순(여·4세) 등 다섯 명이 기적같이 살았고 2월 11일에는 박산골에서 517명이 학살되었는데  문홍준(남32세), 정방달(남46세), 신현덕(남23세) 세명이 기적처럼 살아남았답니다.

 

 

학살 장면

 

 

 

 

 

 

 

 

 

 

 

 

 

 

추모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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